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1 10:10

제 11 장 소련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보나파르트 체제 :정치적 위기의 산물

이미 앞에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수없이 많은 오류를 저지른 관료지배층이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 이 문제를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집단의 지적인 빈곤과 이들이 휘두르는 물질적 위력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제 이 문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단정적인 대답을 시도해 보자. 소련 사회는 결코 평온하지 않다. 한 계급·계층에게 죄악이 되는 것은 그 적대 계급·계층에게는 미덕이 된다. 사회주의적 소유형태의 관점에서 보면 관료집단의 정책은 놀라우리만치 모순과 비일관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 똑같은 정책은 관료집단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는 측면에서는 매우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국은 쿨락 즉 부농을 지지했는데 이 정책은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소부르주아 계급의 지원을 받은 관료집단은 노동계급 전위부대의 손과 발을 묶고 볼셰비키 좌익반대파를 탄압하는 데 성공했다.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오류"인 이 정책은 관료집단에게는 순도 100%의 승리였다. 그러나 급성장한 쿨락이 관료집단을 직접 위협하기 시작하자 관료집단은 쿨락에게 총칼을 들이대었다. 쿨락의 증대된 세력에 깜짝 놀란 관료집단은 반격을 가했는데 이 공격은 쿨락 뿐 아니라 중농도 타격대상으로 삼았다. 이 곁과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에 의한 내전만큼이나 경제에 치명적인 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자신의 정치적 요새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과거의 동맹군을 전멸시키는 데 겨우 성공하자 이들은 모든 힘을 다해 새로운 귀족층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일련의 사태는 사회주의 미래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어쨌든 관료지배층은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다른 모든 지배계급과 동일하다. 정치 일반의 영역에서 이들은 자신의 지도자들이 가장 조야한 수준의 오류를 범해도 눈을 감아줄 용의가 있다. 이 오류투성이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는 데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새로운 지배집단이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경계심을 곧추 세우면 세울수록 자신들이 정당하게 얻은 권리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을 그만큼 더 좋아한다. 바로 이 가차없는 무자비함이야말로 새로운 지도자의 자질이 되어야 한다. 이제 스딸린이 정치적 성공을 거둔 비결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권력과 자율성에도 한계가 있다. 총사령관이나 심지어는 총서기보다 더 강력한 역사적 요인들이 존재한다. 정확한 회계가 없는 합리적인 경제운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회계는 관료집단의 자의적 성격과 양립할 수 없다. 안정적인 루블화를 복권시키려면 "지도자들"의 자의가 통화정책에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관료집단의 전제정치는 생산력의 발전에 점점 커다란 모순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의 절대왕정이 당시 확립되고 있던 부르주아적 시장 질서와 화해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루블화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가 관료집단의 정치를 억누르고 있다. 그러나 화폐 회계는 국민총생산의 분배를 둘러싼 다양한 세력들의 투쟁에 좀더 공개적인 성격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식량배급표가 시행되던 시기에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임금 수준은 이제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노동조합의 문제도 새로 제기되고 있다. 노동조합 관료들을 상부에서 지명하는 관행은 일반 노동자들의 점점 더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도급제 하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 관리자들의 정확한 주문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생산조직의 문제점들에 대해 더욱 크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공장 책임자와 엔지니어를 임명하는 관행이었던 관료의 친·인척 등용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 되고 있다. 협동조합과 국가의 상거래는 과거보다 더 크게 제품 구매자에게 의존하고있다. 집단농장과 개인소유 농민들은 꼼꼼한 계산을 통해 국가와 거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방 관료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도자가 상부에 의해 빈번하게 임명되는 현상을 이들은 더 이상 비굴하게 좌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폐 회계를 통해 가장 비밀스러운 영역에 속하는 관료들의 합법적·불법적 수입 내역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정치활동이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나라에서 화폐 유통은 반체제 세력들을 동원하는 중요한 지렛대가 되고 있으며 소련판 "계몽" 절대주의(enlightened absolutism)의 종말 시점을 예측해주고 있다.

공업이 성장하고 농업이 국가계획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당국의 과업은 대단히 복잡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제품의 품질 문제가 전면에 제기된다. 그러나 관료주의는 품질의 개선을 가능하게 하는 창의성과 책임의식을 파괴한다. 관료주의의 궤양은 거대공업에서는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협동조합, 경공업, 식품공업, 집단농장, 소규모 지방공업 등 인민의 생활에 가장 가까운 경제부문들을 파괴하고 있다.

자본주의 기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소련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관료집단의 진보적인 역할이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이 다져 놓은 집단적 소유의 기반 위에 자본주의 선진 기술의 도입, 모방, 이전, 접목 등 거치른 작업이 수행되었다. 기술, 과학, 예술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성과들이 이식되면서 소련은 신조어를 발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관료적 명령으로 서방의 유형을 그대로 모방한 거대한 공장들이 건설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모국에 비교해서 이 공장들은 세 배나 더 많은 비용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진척되면 될수록 품질 문제가 점점 중대 사안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마치 그림자처럼 관료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소련의 제품들은 (품질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회색 상표를 부착한 것처럼 보인다. 국유화 경제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 같이 민주주의, 비판의 자유, 창의성을 발휘해야 품질 개선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연히 이 필요조건들은 두려움, 거짓말, 아첨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기술과 문화를 독창적으로 창조하는 문제는 품질 개선의 문제보다 더 복잡하고 규모가 크다. 투쟁은 모든 사물의 아버지라고 어느 고대 철학자가 말했다. 생각이 자유롭게 투쟁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가치도 창조될 수 없다. 물론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 혁명 독재의 핵심이다. 따라서 혁명의 시기에는 문화 창조의 좋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다만 문화 창조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을 뿐이다. 노동계급 독재는 독재의 성격을 지양하는 정도에 따라 인간의 천재성에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 준다. 국가가 사멸하는 것과 비례하여 사회주의 문화가 융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지만 제거될 수 없는 역사법칙은 현재 소련의 정치체제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정책적 요구가 아니며 추상적인 도덕률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의 사활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새로운 국가가 사회 전체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국가의 강제력이 사멸하는 과정은 갈수록 고통스럽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다. 특정 기능들이 특정 기구들을 만들었다. 대체로 관료집단은 국가의 기능보다는 이 기능이 가지고 오는 재물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관료지배층은 국가라는 강제기구를 강화시키고 영구화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권력과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은 수단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할수록 이들은 인민의 선진층에 대해 더욱 가차없는 폭압을 자행한다. 카톨릭 교회처럼 관료집단은 자신의 권력이 쇠퇴하자 무오류의 교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로마교황이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이 교리를 신격화시켰다.

끈질기게 도를 더해가는 스딸린의 신격화는 우스꽝스러운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지탱하는데 더없이 필요한 요소이다.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초능력의 심판관 또는 황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1 집정관이 관료집단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배집단은 자신의 지배권력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자를 지도자로 세운다. 지도자의 "강인한 성격"은 서방의 아마추어 문학 애호가들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거리끼지 않는 계층의 집단적 압력을 전부 합한 것에 불과하다. 이들 각자는 "짐은 곧 국가이다(L'etat --- c'est moi)"라고 생각하고 있다. 스딸린에게서 이들은 자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스딸린 역시 이들 하나 하나에게서 자기 모습의 일부를 본다. 스딸린은 관료집단의 인격화이다. 실제로 관료집단은 그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사회의 양대 계급이 사회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 우위를 가릴 수 없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시기가 있다. 이때 국가권력은 사회 위에 군림하여 이 계급들로부터 완전한 독자성을 보유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국가권력은 특권계급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자유만을 부여받았다. 이 역사적 순간에 케사르 체제(Caesarism) 또는 이것의 부르주아 형태인 보나파르트 체제가 등장한다. 정치적으로 원자화된 사회 위에 경찰과 장교집단을 버팀대로 삼아 군림하면서 어떤 세력의 통제도 받지 않는 스딸린 체제는 보나파르트 체제의 변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보나파르트 체제이다.

케사르 체제는 사회 내부의 투쟁으로 흔들리고 있던 노예제 사회에 기초하여 등장하였다. 보나파르트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중대 국면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무기 중의 하나이다. 스딸린 체제는 이 체제의 변종이다. 그리고 조직력과 무장력을 겸비한 소련의 지배층과 비무장 근로대중 사이의 적대관계로 분열된 노동자국가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보나파르트 체제는 보통선거권이나 비밀선거권을 허용해도 아주 잘 운영된다. 이 체제의 민주적 의례는 국민투표이다. 때때로 시민들은 이렇게 질문받는다: 지도자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그리고 이 유권자들은 자신의 양 어깨 사이에 권총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음을 느낀다. 시골뜨기 출신의 정치 아마추어 같은 나폴레옹 3세 이래 이 방식은 대단히 발전했다. 국민투표에 기초한 보나파르트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소련 관료지배층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결국 이것은 이 체제의 모습을 완성하는 왕관인 셈이다.

소련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노동계급의 세계혁명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똑같은 이유로 파시즘이 등장했다. 소련에서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다. 즉 역사가 제기한 문제들을 세계 노동계급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결론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불가피할 뿐이다.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 유럽 혁명운동의 성공으로 이 두 체제는 즉시 뒤흔들릴 것이다. 국제혁명에 등을 돌린 스딸린 관료집단은 자기 이익에 일치하는 행동을 실행에 옮긴 것 뿐이다. 단지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2. "계급의 적"에 대한 관료집단의 투쟁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당은 관료주의에 대해 투쟁했다. 관료집단이 국가를 운영했지만 당은 여전히 관료집단을 통제했다. 불평등이 필요 이상으로 증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경계를하면서 당은 항상 관료집단과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적으로 투쟁하였다. 스딸린 분파의 역사적 역할은 이 이중 구조를 깨뜨리고 당을 관료집단의 휘하에 두고 이후 국가기구마저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가 지금의 전체주의 체제이다. 관료집단에게 매우 중요한 이 역사적 역할을 스딸린 자신이 수행했기 때문에 스딸린의 정치적 승리는 보장되었다.

결성 후 10년 동안 좌익반대파는 당을 타도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당의 이념을 장악하는 강령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 분파의 구호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민주 개혁에 대항해 자기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어떤 혁명도 수행할 용의가 있었다. 1927년 투쟁이 특히 치열했을 때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스딸린은 좌익반대파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다: "내전을 통해서만 좌익반대파 간부들을 제거할 수 있다!" 당시 스딸린의 이 협박은 유럽 노동계급의 패배 때문에 인해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개혁의 길은 이제 혁명의 길로 바뀌었다.

당과 소비에트 조직에 대한 계속적인 숙청은 대중의 불만이 명확하게 정치 노선으로 표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탄압은 사상을 죽일 수 없으며 단지 지하로 내몰 수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자 뿐 아니라 비당원 시민도 흔히 두 가지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공식 사고체계이며 또 하나는 비밀 사고체계이다. 첩자질과 소문 퍼뜨리기로 소련 전역의 사회적 관계들은 침해당하고 있다. 관료집단은 자신의 적을 언제나 사회주의에 대한 적으로 포장한다. 법적 날조행위는 관행이 되었는데 이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자의적으로 죄를 뒤집어 씌운다. 총살형에 처한다는 협박을 통해 나약한 사람들로부터 자백을 강제로 받아내고 이것을 토대로 좀더 강인한 사람들을 법정에 내세운다.

1936년 6월 5일 『프라우다』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에 대해 논평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 "소련에서 계급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계급 세력들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며 동시에 범죄행위이다.‥‥‥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적대적인 계급세력"은 누구인가? 여기에 대해 『프라우다』는 이렇게 답변한다: "반혁명 그룹들의 잔당, 모든 색조의 백위군, 특히 뜨로츠키-지노비에프 파벌이다." 뜨로츠키-지노비에프 파벌(!)이 저지른 "첩자질, 음모, 테러행위"를 불가피하게 언급한 후 이 스딸린의 기관지는 이렇게 약속한다: "인민의 적인 뜨로츠키 파벌의 파충류들과 포악한 자들을 미래에 반드시 때려누이고 제거할 것이다.이들이 아무리 변장을 잘해도 우리는 이 일을 해내고야 말 것이다." 이 위협은 소련의 언론에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비밀경찰의 작업과 병행되고 있다. 1918년 이래 당원으로 있으면서 내전에 참여하였고 이후 소련의 농업전문가이자 우익반대파의 일원이었던 페트로프(Petrov)는 1936년 유형지에서 탈출하여 어느 자유주의자 망명신문에 글을 실었다. 그는 소위 뜨로츠키주의자들을 이렇게 특징짓고 있다: "좌익이라고? 심리적으로는 마지막 남은 진정한 열정적인 최후의 혁명가들이다. 음험한 협상을 하지 않으며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였다. 대단히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보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 이들은 세상이 대난(大難)을 겪고 있다고 허풍떨고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논외로 하자. 그러나 우익 인사가 좌익에 대해 내린 이 도덕적 정치적 평가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아닌가? 비밀경찰의 대령과 장군들이 제국주의 첩자이며 반혁명 분자라고 낙인찍으며 심문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진정하고 열정적인 최후의 혁명가들"이다.

볼셰비키 좌익반대파에 대한 관료집단의 증오심은 히스테리로 발전하였다. 이 히스테리는 부르주아 출신에 대한 사회적 제한을 해제하는 조치와 관련하여 특별히 날카로운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부르주아 출신들의 고용, 일, 교육과 관련된 유화적인 포고령은 구지배계급의 저항은 신질서가 안정되는 것과 비례하여 소멸한다는 당국의 사고에서 나왔다. 1936년 1월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몰로토프는 이들에 대한 제한 조치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지독한 "계급의 적"은 평생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특히 이들은 지노비에프나 카메네프와 같이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로부터 시작된다. 부르주아 계급과 구별되는 "뜨로츠키주의자"들은 『프라우다』에 의하면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특징들이 더 뚜렷하게 드러날수록" 더 절망한다. 이 철학의 정신착란적 성격은 새로운 사회관계들을 낡은 정식으로 은폐해야 할 필요에서 나온다. 그러나 당연히 사회적 적대관계의 진정한 변화를 은폐할 수는 없다. 한편 "신사" 계층의 창조는 부르주아 계급의 좀더 야망있는 자식들에게 출세할 수 있는 넓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이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반면 이 조치는 대중 특히 청년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단히 위험스런 불만을 조성한다. 바로 이 때문에 "파충류와 포악한 자들"에 대한 일소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계급 독재의 칼날은 원래 구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을 부활시키려는 자들에게 가해졌으나 이제는 관료집단의 특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제 공격을 당하는 쪽은 노동계급의 적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전위부대이다. 과거 정치경찰은 볼셰비키 당원 가운데 특히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분자들로부터 충원되었으나 이제는 관료집단의 가장 타락한 분자들로 구성되고 있다.

혁명가들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동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고 미래를 두렵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모든 증오심을 퍼붓고 있다. 감옥,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벽촌, 급격히 늘어나는 강제 수용소 등은 볼셰비키당의 가장 강인하고 진실한 최우수 당원들을 가두고 있다. 심지어 시베리아의 독방 감옥에서도 좌익반대파 성원들은 여전히 수색, 우편물 금지, 굶주림 등의 박해를 받고 있다. 저항을 깨뜨리고 전향을 유도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유형중인 남편과 부인은 강제로 분리되고 있다. 그러나 전향하는 사람들도 구제되지는 않는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끄나풀이 암시만 주어도 이들은 갑절로 벌을 받아야 한다. 친척들이 유형수들을 도와주는 것조차 범죄이다. 상호부조는 모의죄로 처벌받는다.

이 상황에서 자기방어의 수단은 단식투쟁 밖에 없다. 비밀경찰은 이에 대해 강제 급식을 시키거나 아예 죽도록 내버려 둔다. 최근 수백 명의 러시아인 또는 좌익반대파의 외국인 성원들이 총살, 단식투쟁, 자살 등으로 사망하였다. 지난 12년 동안 당국은 좌익반대파가 마침내 근절되었다고 수십 번이나 전 세계에 선언했다. 그러나 1935년 12월과 1936년 상반기에 걸쳐 진행된 "숙청"에서 수십만 명의 당원들이 제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수만 명의 "뜨로츠키주의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적극적인 분자들은 즉시 체포되어 감옥과 강제수용소에 처넣어졌다. 제명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지 말라고 스딸린이 직접 『프라우다』 지면을 통해 지방 당국에게 조언했다.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 일자리를 주지 말라는 것은 서서히 굶어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옛날의 원리는 당국에 의해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새로운 원리로 바뀌었다. 보나파르트 체제가 시작된 1923년 이래 얼마나 많은 볼셰비키들이 제명, 체포, 유형, 사형 등에 처해졌는지는 스딸린 정치경찰의 문서들을 검토하면 그 정확한 숫자가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관료집단이 붕괴하기 시작할 때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숫자가 지하활동에 가담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2백만의 당원을 거느린 당에서 2만 내지 3만의 반대파가 어느 정도의미가 있을까? 단순한 수치 비교는 이 문제의 경우 별 의미가 없다. 격화되는 정치 상황에서는 10명의 혁명가만 있어도 일개 연대가 인민의 편으로 넘어을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군 당국은 아주 작은 지하서클이나 개인들도 지독히 두려워 한다. 이 반동적인 군당국의 두려움은 스딸린 관료집단 전체에 확산되어 있다. 이들이 자행하는 탄압과 가증스러운 비방의 광적인 성격이 이로써 충분히 설명된다.

소련에서 관료집단의 탄압을 끝까지 견디었던 빅토르 세르쥬는 혁명에 대한 충성과 혁명 파괴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품으며 고문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혁명가들의 놀라운 소식을 서방에 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어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있다. 내가 한 말 하나 하나의 진실을 비극적인 증거와 피해자의 이름으로 증명할 수 있다. 다수의 순교자들과 반대자들은 현재 대개의 경우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심정적으로 나에게 가까운 영웅적인 혁명가들이 소수 존재한다. 이들은 활력, 통찰력, 인내, 위대한 시대의 정치사상인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헌신 등으로 다른 어떤 분자들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건자인 레닌과 뜨로츠키의 동지들인 수천 명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퇴보에 저항하며 사회주의의 원칙을 수호하고 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노동계급의 권리를 방어하고 있다. 이들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전부 치르고 있다. 이것만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투쟁이다‥‥‥‥ 여러분들에게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한다. 이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이들이 혁명의 새로운 여명을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서방의 혁명가들은 이들을 믿을 수 있다. 감옥 안에서나마 혁명의 불꽃은 계속 타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여러분을 믿고 있다. 여러분과 우리는 세계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노동계급 독재의 해방 정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들을 방어해야 한다. 이 결과 미래에 소련은 도덕적 위대성과 노동자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것이다. "

 

3. 새로운 혁명의 불가피성

국가의 사멸에 대해 논하면서 레닌은 "만약 분노, 저항, 봉기 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사라져서 인민을 억압할 필요가 전혀 없다면" 사회생활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관습은 모든 강제성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만약"에 있다. 현재 소련 체제는 모든 곳에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저항은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다. 관료집단은 강제력 행사의 기구일 뿐 아니라 저항을 촉발하는 끊임없는 원천이다. 탐욕스러우며 거짓말을 예사로 하는 냉소적인 지배집단의 존재 자체가 불가피하게 인민의 분노를 은밀하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동자의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어도 당국에 대한 이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들이 점점 더 긍지를 갖고 정치 일반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경우 이들은 관료집단과 공공연하게 투쟁하게 될 것이다.

"연구"와 "기술 획득"의 필요성, "교양의 자발적 습득" 그리고 다른 멋진 일들에 대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을 "지도자들"은 아주 좋아한다. 더욱이 이들은 선거나 그밖의 방식으로 교체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무식하고 교양이 전혀 없다. 진지하게 연구하지도 않으며 사회생활에서 거만하며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집단이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을 보호하는 듯이 생색을 내며 협동조합 상점뿐만 아니라 음악 작곡에 대해서까지 명령을 내리려고 설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은 이 집단의 굴욕적인 지배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소련 인민은 더 높은 문화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를 집어삼킬 것인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이들을 쓸어 없애 버릴 것인가? 이 문제에 소련의 운명이 달려 있다. 소련의 노동자 절대 다수는 아직까지도 관료집단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다. 농민 대중 역시 이들에 대해 건강한 인민의 증오심을 품고 있다.농민과 달리 노동자들은 공개적으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결과 저항하는 농촌 마을들을 혼란과 무기력 속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억압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관료집단을 타도하면 자본주의를 복귀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국가와 계급 사이의 관계는 속류 "민주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계획경제가 없다면 소련은 수십 년 후퇴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체제를 붕괴시켜 혁명의 성과를 완전히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노동자들은 현실적이다. 관료지배층 그리고 최소한 자신들과 가까이 있는 하급 관료집단을 이들은 현실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당분간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이 달성한 혁명의 성과 중 일부만이라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노동자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내는 순간 이 부정직하고, 버릇이 없으며, 믿을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을 몰아낼 것이 틀림없다. 바로 이 때문에 서방이나 동방에서 혁명의 아침은 한번 더 도래해야 한다.

크렘린궁의 친구들이나 하수인들은 노동자의 정치투쟁이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 체제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료집단의 안정은 일시적일 뿐이다. 대중의 불만이 깊은 골을 파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은 이 "계몽 절대주의"의 멍에를 특히 괴롭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계몽의 성격보다는 절대주의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 소련의 관료집단이다. 관료집단의 히스테리는 비판적 사고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점점 더 감시의 눈을 불길하게 치켜뜬다. 이와 동시에 "지도자"의 은덕에 대한 칭송의 노래가 참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은 국가기구와 사회가 점점 더 분리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 내부의 모순이 꾸준하게 격화되어 국가에 대해 강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들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이다. 대중의 체제 저항 압력이 분출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권력층의 대표자들에 대한 테러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은 현재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명석하지만 일말의 양심도 없는 레닌그라드의 독재자 키로프(Kirov)는 관료집단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암살은 테러행위의 가장 잘 알려진 경우이다. 그러나 테러행위자들은 보나파르트 체제의 과두집단을 타도할 능력이 전혀 없다. 물론 개별 관료들은 테러주의자의 권총이 자기 심장을 겨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테러행위를 빙자하여 관료들은 자신들의 폭력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정적들을 테러행위의 가담자로 몰아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기타 볼셰비키 인사들이 바로 이렇게 제거되었다. 테러행위는 참을성이 없고 쉽게 절망하는 개인들의 무기이다. 그리고 관료집단의 자식 세대들 자신이 가장 자주 의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짜르시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암살은 의심할 여지없이 폭풍 전야의 징후이며 공공연한 정치적 위기의 시작을 예고한다.

관료집단은 이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새로운 헌법의 도입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 역사에서 그렇듯이 관료주의적 독재체제는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약화시켰을 뿐이다. 새로운 헌법은 보나파르트 체제를 폭로하면서 동시에 이 체제에 대한 투쟁을 반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은폐물을 제공했다. 선거 시기에 관료집단의 분파들이 경쟁할 경우 정치투쟁의 가능성이 좀더 커질 수 있다. 스딸린에 의하면 새로운 헌법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권력기관"에 대한 채찍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나파르트 체제에 대한 채찍으로 변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징후들은 문화수준이 높은 인민 세력과 과두 관료집단이 불가피하게 충돌할 것임을 똑같이 예견하고 있다. 이 위기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은 없다. 스스로 발톱을 자른 악마는 없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신의 지위를 싸우지 않고 선선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태의 진행은 명백히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인민 대중에 의한 강력한 압력과 이 경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국가기구의 이완으로 권력층의 저항은 생각보다 훨씬 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가설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관료집단은 혁명세력의 힘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 그리고 혁명세력의 공세가 강하고 대담할수록 충돌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자는 더 적을 것이다. 혁명을 준비하면서 유리한 역사적 상황에서 대중을 지도하는 과업은 바로 제4인터내셔널 소련 지부의 몫이다. 현재 이 지부는 매우 허약하며 지하활동을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당의 비합법 존재도 존재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어려운 상황의 존재방식일 뿐이다. 정치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는 계급들에 대해서는 억압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1917년에서 1923년까지의 혁명적 독재기가 이것을 완벽히 증명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일반 정세가 이런 식으로 지속될 경우 이미 존재이유가 소멸한 관료집단이 혁명적 전위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통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료집단이 자기 무덤을 파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혁명은 1917년 10월 혁명과 같은 사회혁명은 아니다.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변화시키고 특정 소유형태를 다른 소유형태로 대체하는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봉건체제를 대체하여 부르주아체제를 등장시킨 사회혁명 뿐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파괴시키지 않은 채 구지배집단을 일소한 정치혁명도 있었다. 1830년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과 1917년 2월의 러시아 혁명 등은 이런 예에 속한다.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타도는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겠으나 그 자체로는 정치혁명의 테두리 내에 머물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에 의해 탄생한 국가가 생존한 경우는 소련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 국가가 거쳐야 할 발전 단계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앞길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소련의 이론가들과 창건자들은 완전하게 대중에 의해 통제되고 신축성이 있는 소비에트 체제가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과 함께 평화적으로 해체와 사멸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현실은 이론보다 더욱 복잡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후진국의 노동계급이 첫 번째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운명을 타고 났다. 이 역사적 특권을 관료집단의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제2차 보완 혁명으로 되갚아야 한다는 사실이 모든 증거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혁명의 강령은 혁명 당시의 상황, 나라의 발전 수준, 국제 정세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강령의 기본 내용들은 이미 명확해졌으며 이 책 전체를 통해 소련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면서 객관적 추론으로 이미 제시되었다.

문제는 한 지배집단을 또 다른 지배집단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경제와 문화를 운영하고 인도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관료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회복시키고 노동조합을 부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 활동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근로대중의 이해에 부합하도록 기존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문제를 자유로이 논의하는 것을 통해 관료적 오류와 좌충우돌의 결과 발생하는 전체비용이 감소될 수 있다. 소비에트 궁전, 새로운 극장, 전시용 지하철 등 실속은 없으면서 비용만 많이 드는 사업들은 노동자 주택단지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점차 소멸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분배 규범"은 엄격하게 필요한 영역 내로 제한되고 사회적 부의 증대와 함께 사회주의적 평등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군대 내의 계급은 즉시 철폐되어야 한다. 훈장의 번쩍거리는 쇠조각은 도가니 속에 집어 넣어질 것이다. 청년은 자유롭게 숨쉬고 비판하고 오류를 범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다. 과학과 예술은 쇠사슬로부터 풀려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외정책은 혁명적 국제주의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10월 혁명의 운명은 유럽 및 전세계의 운명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소련의 문제는 이제 스페인 반도,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결정되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되는 시점에는 마드리드의 성벽 아래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보다 상황이 비교할 수 없이 명확해질 것이다. 배신적인 "인민전선(people's front)" 정책을 통해 소련 관료집단이 스페인과 프랑스의 반동세력에게 승리를 보장할 경우 그리고 코민테른이 이 방향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경우 소련은 파멸의 벼랑으로 내몰릴 것이다. 관료집단에 대한 노동자의 봉기가 아니라 부르주아 반혁명이 대세가 될 것이다. 개량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공동 사보타지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노동계급이 권력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경우 소련의 역사는 새로운 지평을 맞이할 것이다. 유럽 혁명의 첫 승리는 전기충격처럼 소련의 대중을 일깨워 이들의 독립적 정치행동을 고양시킬 것이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의 전통을 일깨우고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지위를 침식할 것이다. 10월 혁명이 제3인터내셔널에게 중요했던 만큼이나 이 새로운 상황은 제4 인터내셔널에게 중요할 것이다. 오직 이 전망을 통해서만 인류 역사상 첫 노동자국가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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