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1 10:09

제 4 장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쟁

1. 화폐와 계획

지금까지 국가의 단면도를 통해 소비에트 체제를 검토해 보았다 . 이것은 화폐의 단면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 국가와 화페의 문제는 서로 공통점이 많다 . 왜냐하면 이 두 존재는 결국 핵심적 문제인 노동생산성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 화폐의 강제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강제력도 계급사회의 유산이다 . 계급사회는 교회나 세속의 물신 ( 物神 ) 을 통해서만 인간 관계를 규정할 수 있다 . 물신들을 수호하는 임무는 물신 중에서 가장 끔찍한 물신인 국가가 담당한다 .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와 화폐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것들은 서서히 사멸하기 시작해야 한다 . 사회주의가 실제로 승리할 때 국가는 반 ( 半 ) 국가로 변화하고 화폐는 마술 같은 힘을 잃기 시작한다 . 이것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온갖 물신들로부터 해방되어 인간 사이에 좀더 투명하고 자유롭고 가치 있는 관계들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화폐의 " 철폐 ", 임금의 " 철폐 " 또는 국가와 가족의 " 일소 " 와 같은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요구들은 기계적인 사고의 전형이다 . 화폐는 우리 마음대로 " 철폐 " 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국가와 오랜 관습인 가족도 우리 마음대로 " 일소 " 할 수 없다 . 이것들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증발하거나 해체되어야 한다 . 사회적 재화가 꾸준히 증가하면 일분 일초의 초과노동에 대한 혐오감과 생활필수품의 부족에 대한 굴욕적인 두려움 등이 사라질 때가 온다 . 이때 화폐라는 물신은 마지막 일격을 받고 쓰러질 것이다 . 인간에게 행복이나 불행을 가져다줄 능력을 잃어버린 후 화폐는 통계 종사자들의 편의와 계획 달성에 필요한 장부 영수증에 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영수증도 아마 필요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이와 관련된 문제는 우리보다 지능이 훨씬 뛰어난 후배들의 문제로 넘기자 .

생산수단과 신용제도의 국유화 , 국내 상업의 협동조합화나 국영기업화 , 외국무역의 독점 , 농업의 집단화 , 상속재산법 등은 화폐의 개인적 축적에 엄격한 제한을 가한다 . 그리고 화폐가 고리대금 자본 , 상업자본 , 공업자본 등으로 전환하는 것을 방해한다 . 그러나 화폐의 기능이 착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도 노동계급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에 일소되지는 않는다 . 다만 수정된 형태로 상인 - 채권자 - 실업가의 역할을 하는 국가로 이전될 뿐이다 . 동시에 가치 척도 , 교환 수단 , 지불 수단 등과 같은 화폐의 근본 기능들은 그대로 유지될 뿐 아니라 자본주의 때보다 활동의 영역을 더 확장한다 .

계획경제의 실행은 화폐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위력의 한계도 드러내었다 . 러시아는 1 억 7 천만의 많은 인구에 도시와 농촌간의 모순이 심각한 후진국이다 .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선험적인 경제계획은 효험이 입증된 복음이 될 수 없다 . 차라리 그 위력이 목표 달성 과정에서 확인되고 수정되어야 할 대강의 실무적 가정 ( 假定 ) 에 불과하다 . 어쩌면 계획경제에 대한 이런 규칙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 행정적 과업이 더 " 정확하게 " 달성되면 될수록 경제적 지도력은 그만큼 더 무능하다 . 계획을 통제하고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두 개의 지렛대가 필요하다 . 우선 정치적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은 생산에 이해관계가 있는 대중이 계획경제의 지도과정에 실제로 참여하면서 존재한다 . 따라서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없는 정치적 지렛대는 상상할 수도 없다 . 또한 재정적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은 보편적 등가물인 화폐의 도움을 받아 선험적인 계산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 그런데 이것은 안정적인 화폐가 없이는 생각도 할 수 없다 . 소련 경제에서 화폐는 그 역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얘기했듯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한다 .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상업과 무역이 일반적으로 축소되기는커녕 정반대로 크게 확대되어야 한다 . 모든 산업 부문은 변모하며 성장한다 . 새로운 산업이 계속 등장한다 . 그리고 모든 산업들은 질적 양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규정한다 . 자급자족을 위한 농민경제와 폐쇄적 가족생활 등의 일소는 사회적 교환과정 즉 화폐의 실제 유통과정으로 모든 형태의 노동을 수렴시킬 때 가능하다 . 농민의 안마당이나 개인주택에서 발휘된 노동력은 이제 사회의 모든 교환과정에서 합류한다 .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제품과 서비스가 하나의 교환과정 영역으로 수렴된다 .

한편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접적 개인적 이해 즉 이기심이 계획경제 내부로 수렴되지 않으면 사회주의는 건설될 수 없다 . 그런데 이들의 이기심은 신뢰성과 신축성을 갖춘 화폐가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 자유롭게 모든 산업에 침투할 수 있는 정확한 가치 척도인 안정적 화폐체계 없이는 노동생산성과 품질은 향상될 수가 없다 .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기 경제에서나 금에 기초한 화폐 즉 금태환 화폐만이 진짜 화폐이다 . 이와 다른 형태의 화폐는 대체화폐에 지나지 않는다 . 물론 소련 정부는 거대한 재화를 소유하고 있으며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도구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 행정적 차원에서 상품가격을 국가가 멋대로 조작하더라도 국내 상업이나 외국무역을 위해서는 안정된 화폐가 있어야 한다 . 소련의 화폐는 경제 당국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금본위 화폐가 아니다 . 따라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화폐처럼 필연적으로 폐쇄성을 띠고 있다 . 세계시장에서 루블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 소련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좀더 용이하게 화폐의 부정적 측면들을 극복하는 이유의 하나는 국가가 외국무역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주요한 이유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급자족 폐쇄경제라는 골방에서도 소련 경제가 질식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임무는 단순히 질식을 피하는 데에 있지 않다 . 철저히 합리적이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울 강력한 경제체제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 . 물론 이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가장 높은 성과들을 접하고 흡수할 것이다 .

기술혁명과 대규모의 실험들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역동적인 소련 경제는 안정된 가치척도를 수단으로 경제성과를 계속 측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 소련 화폐가 금본위 루블화라면 5 개년 계획의 결과가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나을 것이다 . 이것은 이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물론 " 불가능한 일을 할 수 " 는 없다 . 그러나 순간 순간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 이럴 경우 경제 영역에서 더 많은 오류와 손실이 발생할 뿐이다 .

 

2. " 사회주의적 " 인플레

소련 통화체제의 역사는 경제적 난관 , 성공 , 실패의 역사일 뿐 아니라 관료집단의 좌충우돌 정책의 역사이기도 하다 .

신경제 정책 (NEP) 이 시행되면서 1922 년에서 24 년에 걸쳐 루블화가 다시 등장하였다 . 이것은 소비재 분배에 " 부르주아적 권리 규범 " 을 회복시킨 조치였다 . 쿨락 강화 정책이 계속되는 동안 루블화는 정부 당국에게 걱정거리가 되었다 . 이와 반대로 5 개년 계획의 초기에는 모든 인플레 요인들이 통제에서 해제되었다 . 1925 년 초에는 총통화량이 7 억 루블이었으나 1928 년 초에는 소폭으로 증가하여 17 억 루블이 되었다 . 이것은 제 1 차 세계대전 전야에 짜르 체제가 보유하고 있던 통화량과 대충 맞먹는 양이다 . 물론 짜르 하에서는 루블화가 금본위 화폐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 그런데 1928 년 이후에는 총통화량이 열병에 걸린 것처럼 급속히 증가한다 :20 억 루블 -28 억 루블 -43 억 루블 -55 억 루블 -84 억 루블 ! 84 억 루블은 1933 년 초의 총통화량이다 . 이 해를 기점으로 통화정책이 다시 바뀌어 통화량이 줄어들었다 :69 억 루블 -77 억 루블 -79 억 루블 (1935 년 ). 1924 년에 공식적으로 13 프랑에 교환되었던 루블은 1935 년 11 월이 되자 3 프랑으로 교환되었다 . 과거에 비해 가치가 4 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 이것은 전쟁의 결과 프랑화가 평가 절하된 정도와 비슷했다 . 과거나 지금이나 루블화의 프랑화 환율은 매우 일시적 성격을 띠고 있다 . 현재 세계시장 가격에 의하면 루블화의 구매력은 1.5 프랑에도 미치지 못한다 . 그러나 평가절하의 규모는 소련의 통화가 1934 년까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가치를 상실해 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경제 모험주의에 한참 경도되고 있던 때에 스딸린은 신경제 정책 즉 시장관계를 " 악마에게나 "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 마치 1918 년처럼 소련 언론은 모두 상거래가 최종적으로 " 사회주의 직접 분배 " 로 바뀐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식량배급표가 발급되어 새로운 정책의 표상이 되었다 . 동시에 인플레는 소련 체제와는 전혀 같이할 수 없는 현상이라며 완전히 배격되었다 . 1933 년 스딸린은 이렇게 말했다 : " 정부가 상품을 대규모로 통제하여 가격을 안정시켰기 때문에 소련의 화폐가치는 안정되고 있다 ." 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공언은 이후 전혀 상세히 설명되거나 정책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 부분적으로는 발언의 본질이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 그런데도 그의 발언은 소련 화폐이론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발언을 통해 거부한 인플레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 이후 루블화는 보편적 등가물이 아니라 " 엄청나게 " 많은 상품의 보편적 그림자가 되었을 뿐이다 . 그리고 모든 그림자가 그렇듯이 루블화는 자신을 짧게 또는 길게 만들 권리를 누렸다 . 스탈린의 화폐이론은 현실을 무시한 채 자기위안에만 탐닉했다 . 그의 이론이 의미가 있다면 이것을 말하고 있다 : 소련의 화폐는 기능을 상실했다 ; 가치척도의 기능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 " 안정된 가격 " 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정해진다 ; 10 루블 금화 (chervonetz, 역자 주 : 1922 년에 제정되어 1936 년에 폐지되었다 .) 는 계획경제의 관습적인 이름에 불과한 허깨비이다 ; 다시 말하면 루블화는 보편적 배급표이다 . 한마디로 결론을 말하면 이제 사회주의는 " 최종적으로 그리고 역전시킬 수 없을 정도로 " 승리했다 .

전시공산주의 시절에 횡행했던 가장 유토피아적인 견해가 이제 새로운 경제적 토대 위에 다시 등장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새로운 경제 기초의 수준은 과거보다는 약간 높았지만 화폐 유통을 일소하기에는 아직도 불충분했다 . 소련의 지배층은 계획경제가 시행되고 있으므로 인플레는 무서워할 것이 전혀 없다는 생각에 푹 빠졌다 . 나침반이 있으면 배에 물이 새어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과 비슷한 논리였다 . 그러나 현실에서 통화 인플레는 필연적으로 신용 인플레를 초래하면서 가상 수치들이 현실 수치를 대체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 결국 계획경제가 내부에서 삭아 들어간다 .

인플레는 근로인민에게 끔찍히 무거운 세금이다 . 이 사실은 말할 나위가 없다 . 인플레의 도움으로 획득된 사회주의의 강점은 지극히 의심스럽다 . 물론 산업은 계속해서 급격히 성장했다 . 그러나 거대한 건설사업의 경제 효율은 통계에만 나타날 뿐 실물 경제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루블화를 장악한 관료집단은 특정 계층과 경제부문들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구매력을 선사했다 . 이 결과 관료집단은 객관적으로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스스로 박탈했다 . " 기존 루블화 " 와 합쳐져 서류에만 올라 있는 수치로 인해 정확한 회계는 실종되었다 . 이로 인해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 저하로 노동생산성이 낮아지고 상품의 질은 더 낮아졌다 .

제 1 차 5 개년 계획 기간에 이 해악은 위협적 수위에 도달했다 . 1931 년 7 월 스딸린은 유명한 "6 개 조건 " 을 들고 나왔다 . 이것의 최고 목표는 공업제품의 생산비용을 낮추는 것이었다 . 노동생산성에 따른 임금지불 , 생산비용에 대한 회계 도입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조건들은 새로운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 " 부르주아적 권리 규범 " 은 신경제 정책이 시작될 때에 이미 제출되었었고 1923 년 초의 제 12 차 당대회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 1931 년에 자본투자의 효율이 감소하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다 . 이 때가 되어서야 스딸린은 과거에 이미 실행되었던 정책을 새로운 것 인양 다시 천명하였다 . 이후 2 년 동안 언론의 거의 모든 기사들은 이 "6 개 조건 " 의 구원 능력을 언급했다 . 한편 인플레는 계속되었다 . 그리고 인플레가 발생시킨 병의 증세도 당연히 치유될 수 없었다 . 생산시설 파괴자들과 태업자들에 대한 엄한 탄압조치도 사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 .

" 몰개성 " 과 " 균등 " 은 익명의 " 평균 " 노동과 모두에게 비슷한 " 평균 " 임금을 의미한다 . 그런데 소련 당국은 " 몰개성 " 과 " 균등 " 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 동시에 관료집단은 신경제 정책을 " 악마에게 " 주어버렸다 . 신경제 정책은 노동력을 비롯한 모든 재화를 화폐를 기준으로 계산한다는 의미였다 . 그런데 이것을 폐기하는 것은 " 몰개성 " 과 " 균등 " 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조장하는 것이었다 . 당시 관료집단의 혼란스러운 방향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정도로 기이하였다 . 한 손으로는 "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 " 을 회복시키면서 다른 손으로는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도구를 폐기시켰다 .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 대신 국가의 자의적 계산과 행정조치가 시행되었다 . 가격체계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자 노동량과 이에 따른 임금 사이의 조응관계가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 이로써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관심과 동기도 함께 사라졌다 .

회계 , 제품의 품질 , 생산비용 , 생산성 등에 대한 엄밀한 당국의 지시사항들도 이제 구름 잡는 일이 되었다 . 그런데 소련의 지도자들은 모든 경제적 난관의 원인이 스딸린의 6 개 조건을 악의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 인플레에 대한 아주 조심스러운 언급도 반체제 범죄라고 못박았다 . 학교 교사들에게 비누가 배급되지 않는 사실을 언급하지 말 것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학교 위생 규정을 어겼다고 가끔 비난했다 .

루블화의 운명은 당내 분파투쟁의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 좌익반대파 (1927 년 ) 의 강령은 " 화폐의 무조건적 안정 " 을 요구했다 . 이것은 이후 몇 년간 좌익반대파의 중심적 요구가 되었다 . 1932 년 좌익반대파의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 " 아주 엄격한 조치들을 통해 인플레 경향을 저지시키고 화폐를 안정시켜야 한다 . 자본투자를 과감하게 축소하더라도 통화는 안정되어야 한다 ." 거북이 걸음 " 주창자들과 초공업화론자들이 임시로 자리를 바꾼 것 같았다 . 당국이 시장관계를 " 악마에게 " 주어버리겠다고 허풍을 떨자 좌익반대파는 국가계획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표어를 내세울 것을 권유하였다 : " 인플레는 계획경제의 매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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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에도 인플레의 해악은 극심했다 . 농민 정책이 쿨락 위주로 시행되고 있을 때 신경제 정책의 기초 위에 협동조합을 통해 수십 년에 걸쳐 농업의 사회주의화가 완수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 협동조합은 구매 , 판매 , 신용의 기관이 되어 장기적으로 농업생산을 사회주의적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 이것은 "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 " 이라고 명명되었다 . 그러나 알다시피 실제 과정은 이와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 즉 국가의 폭력과 통합적 집단화를 통해 쿨락이 청산되었다 .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물질적·문화적 조건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농업 각 부문을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하자는 예전의 정책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 농업에서 공산주의가 즉각 실현된 것처럼 집단화가 추진되었다 .

강제적 농업집단화의 해악은 즉시 나타났다 . 소련 전역에서 가축의 절반 이상이 도살되었다 . 그러나 이보다 더 커다란 해악이 닥쳤다 . 집단농장 농민들이 사회주의 소유형태와 자기 노동의 결과에 완전한 무관심해졌다 . 그러자 당국은 서둘러 기존 정책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 농민에게 닭 , 돼지 , 양 , 소 등을 제공하면서 이것들을 개인재산으로 인정해 주었다 . 그리고 집단농장 옆에 농민 개인의 텃밭을 조성해 주었다 . 집단화의 필름이 이제는 완전히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

소규모 개인소유를 허용하면서 당국은 농민의 소위 개인주의 경향을 매수하기 위해 타협했다 . 집단농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정책의 후퇴가 부차적인 것처럼 보였다 .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후퇴가 심대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 집단농장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일반 농민의 일상적 필요는 집단농장이 아니라 " 자기 소유 " 텃밭을 통해 더 많이 충족되고 있다 . 농민이 개인 농장에서 기술 영농을 채용하고 과일농장 , 가축종자 농장을 경영할 경우 그의 수입은 집단농장의 노동에 비해 3 배정도 많아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 이 사실들은 소련 언론에도 보도되고 있다 . 정책의 후퇴를 통해 영세기업 여성 노동력을 포함하여 수천만 명의 노동력은 완전히 야만적으로 낭비되고 있다 . 또한 집단농장의 노동생산성은 지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 대규모 집단농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농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 즉 시장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현물세를 폐지하여 상거래를 회복시켜야했다 . 다시 말하면 너무 일찍 악마에게 주어버린 신경제 정책을 다시 빼앗아 오는 것이 필요했다 . 따라서 어느 정도 안정된 통화회계 체제가 계속된 농업 발전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

 

3. 루블화의 복권

잘 알려져 있듯이 지혜의 부엉이는 해가 진 후에나 날아간다 . " 사회주의 " 가격 및 화폐 이론은 인플레 파의 환상이 사라진 후에나 개발되었다 . 이미 언급했듯이 스딸린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내용의 "6 개 조건 " 을 천명했었다 . 이제 그의 의도를 고분고분한 교수님들이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 이 결과 시장가격에 대비되는 소비에트 가격이 계획적 또는 지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혀 새로운 이론이 탄생하였다 . 즉 소비에트 가격은 경제 범주가 아니라 행정 범주이며 사회주의의 이익을 위해 인민의 수입을 재분배하는데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진짜 생산비용을 알지 못한 채 어떻게 가격을 " 지도 " 할 수 있는가 ? 모든 가격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이 아니라 관료집단의 의지를 표현한다면 어떻게 진짜 생산비용을 계산할 수 있는가 ? 교수 양반들은 이 점을 설명하는 일을 까먹었다 . 당국은 인민의 수입 재분배를 위한 세금 , 국가예산 , 신용제도 등 아주 강력한 지렛대들을 실제로 장악했다 . 1936 년 예산 지출 내역에 의하면 경제의 여러 부문에 대한 재정의 직접 지원을 위해 376 억 루블이 책정되었으며 간접 지원을 위한 재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 . 인민 소득의 계획적 분배를 위해 예산과 신용체제는 아주 유효하다 . 그리고 실제 경제관계들을 상품가격이 정직하게 표현할수록 사회주의의 대의는 더 신장될 것이다 .

이 주제에 대해 경험은 이미 최종 판결을 내렸다 . " 지도 " 가격은 학자들의 책 속에서나 그럴듯해 보이지 실제 생활에서는 하잘 것 없었다 . 같은 상품에 전혀 다른 범주의 가격들이 책정되었다 . 그리고 이 범주들 사이의 널찍한 틈을 통해 모든 종류의 투기 , 특혜 , 기생행위 등 해악들이 판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이 해악들은 예외가 아니라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 동시에 10 루블 금화는 안정된 가격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대신 자기 그림자에 불과했다 .

그런데 다시 정책을 급격하게 전환할 필요가 생겼다 . 이제는 계획경제가 성과를 거두면서 난관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 1935 년 벽두에 빵 배급표는 폐지되었다 . 같은 해 10 월 다른 식량품목들의 배급표가 사라졌다 . 1936 년 1 월 일반 소비재 공업생산품이 배급에서 해제되었다 . 도시와 농촌이 국가와 맺는 경제관계가 화폐로 매개되기 시작했다 . 이제 루블화는 대중의 경제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가 되었다 . 먼저 소비재의 질과 양으로 이 영향력이 행사된다 . 이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소련 경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

1935 년 12 월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은 이렇게 발표했다 : " 은행과 산업 사이의 상호관계는 수정되어야 하며 은행은 루블화를 통해 경제 통제력을 장악해야 한다 ." 이제 행정 계획에 대한 미신과 행정 가격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 루블화가 배급표로 바뀌는 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면 1935 년의 개혁은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다 . 그러나 실제로 이 관점은 어설픈 오류에 불과하다 . 루블화가 배급표를 대체하는 것은 허구 (fiction) 를 거부하는 것이다 .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부활시켜 사회주의 건설의 전제조건을 확보할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

1935 년 1 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재무인민위원은 이렇게 발표했다 : " 소련의 루블화는 세계 어느 통화보다 안정되어 있다 ." 이 발표를 순전 허풍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 소련의 국가예산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수입이 지출보다 증가하고 있다 .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지만 외국무역이 예산 균형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 중앙은행의 금 보유고는 1926 년 1 억 6 천 4 백만에서 현재 10 억 루블을 상회하고 있다 . 소련의 금 산출량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 1936 년 현재 소련의 금광산업은 세계 제 1 위를 기록하고 있다 . 시장이 부활되면서 상품 유통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 지폐를 남발하여 발생한 인플레는 1934 년에 정지되었다 . 루블화의 안정도를 나타내는 요소들은 실제하고 있다 . 그러나 재무인민위원의 발표는 과도한 낙관 속에서 나왔다 . 산업생산이 증가하면서 루블화의 가치가 크게 오르고 있다 . 그러나 생산비용이 너무 높은 것이 여전히 치명적 약점이다 . 소련의 노동생산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 결국 화폐가 필요 없을 때 루블화는 가장 안정된 통화가 될 것이다 .

엄밀한 회계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루블화의 우수성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약하다 . 금 보유고가 10 억 루블에 달하고 있지만 은행이 발행한 지폐 80 억 루블이 유통되고 있다 . 따라서 금이 통화를 지지하는 비율은 12.5% 에 불과하다 . 그리고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은 통화의 기반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비축되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다 . 소련 경제가 더 발전할 경우 국내 경제계획을 정확하게 확정하고 외국과의 경제관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당국은 금을 통화로 사용할 수 있다 . 이것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마감하기 전에 루블화는 다시 한번 순금의 광택을 빛낼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 상황은 가까운 미래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

소련이 금본위제로 회귀하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하지만 당국은 금 보유고를 늘려 순수 이론적 계산을 통해서나마 통화를 금으로 지지하는 비율을 늘릴 수 있다 . 이 결과 은행의 지폐 발행 규모가 관료집단의 의지가 아니라 객관적 기준에 의해 제한된다면 최소한 루블화의 상대적 안정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만 되어도 소련 경제는 크게 이익을 볼 것이다 . 미래에도 인플레를 계속해서 강력하게 억제한다면 루블화는 금본위제의 이점은 보유하지 못할지라도 지난 기간 관료집단의 주관이 경제에 입힌 깊은 상처를 대부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

 

4. 스타하노프 운동

인류문명의 모든 단계에 존재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 경제활동이다 . 이와 관련하여 " 모든 경제는 최종적으로는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 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 주요한 측면으로만 환원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노동시간 절약을 위한 투쟁의 역사에 불과하다 . 사회주의는 착취의 철폐만으로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 .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의 노동시간보다 더 짧은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사회가 진정한 사회주의이다 .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착취의 근절은 한편의 드라마에 불과할 뿐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적용한 첫 번째 역사적 실험은 사회주의가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그러나 인류문화의 가장 소중한 원자재인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식을 소련은 결코 배우지 못했다 .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입한 기술은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는 주요한 도구인데 소련의 국경을 넘는 순간 효율성이 떨어진다 . 모든 문명의 결정적 요소인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에서 사회주의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 다만 승리할 수 있고 승리해야한다는 점을 확실히 과시했을 뿐이다 . 그러나 아직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이와 반대되는 모든 주장들은 무지나 허풍 떠는 사기에 불과하다 .

올바르게 평가해서 몰로토프는 공식적으로 거짓 발언만을 일삼는 다른 지도자들보다 좀더 솔직하다 . 그는 1935 년 1 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 " 우리의 평균 노동생산성 수준은 ‥‥‥ 미국과 유럽에 비해 아직도 상당히 뒤져 있다 ." 이 말을 덧붙이면 그의 선언은 더욱 정확할 것이다 : 유럽과 미국에 비해 소련의 노동생산성은 3 배 , 5 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10 배나 뒤져 있다 ; 그리고 소련의 생산비용은 같은 정도로 더 높다 . 같은 회의에서 몰로토프는 좀더 일반적인 고백을 털어놓았다 : "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문화수준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것보다 여전히 낮다 ." 여기에 이 말을 덧붙여야한다 : 평균 생활수준도 역시 낮다 . 지나가면서 내뱉은 그의 말이 지닌 진실성은 수없이 많은 소련 정부기구의 자부에 찬 성명서와 소련의 외국 " 친구들 " 의 사탕발린 찬사의 분출을 가차없이 논박하고 있다 !

국방에 대한 우려와 함께 노동생산성 향상이 소련 정부정책의 근간이다 . 소련의 발전 단계마다 이 투쟁은 다양한 성격을 띠었다 . 제 1 차 5 개년 계획 기간 내내 그리고 제 2 차 초기에는 " 돌격대 "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 이것은 선동 , 개인의 모범 , 행정적 압력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집단 포상과 특권을 동원한 방식이었다 . 1931 년 스딸린이 6 개 조건을 교시한 이후 시도된 일종의 도급제 (piecework payment) 는 루블화의 허깨비 같은 성격과 가격체계의 이질성 때문에 실패했다 . 관료집단의 변덕이 작용하는 " 프리미엄 체계 " 가 가미된 융통성 있는 노동평가제를 대신해서 생산품을 국가가 직접 분배하는 체제가 실행되었다 . 그러자 엄청난 규모의 특권을 따내기 위해 돌격대 대오에는 특별한 연줄을 가진 사기꾼들이 침투하여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 결국 이 체제는 원래 목적과 정반대 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

물가를 안정시키고 통일시키는 조치는 배급표 제도의 철폐로 시작되었다 . 이로써 도급제 시행의 조건이 마련되었다 . 이 기초 위에서 돌격대 방식은 소위 스타하노프 운동 (Stakhanov movement) 으로 바뀌었다 . 이제 진짜 가치를 지닌 루블화를 손에 넣기 위해 노동자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기계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노동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 크게 보면 스타하노프 운동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시간의 연장을 의미했다 . 소위 " 비 ( 非 ) 노동시간 " 에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작업장의 의자와 도구를 정리하고 원자재를 분류하였다 . 그리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 이런 일들이 진행되면서 7 시간 노동일은 말뿐이고 실제 노동시간은 현재 훨씬 길어졌다 .

도급제의 비밀은 소련 관료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 이 제도는 외부적 강제가 가해지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옥죄는 제도인데 이것을 마르크스는 "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가장 적합한 제도 " 라고 생각했다 . 소련 노동자들은 도급제에 공감하기는커녕 적대감으로 대했다 . 이 반응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사회주의 건설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스타하노프 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런데 특히 관리부문에 있어서 단순한 출세주의자나 사기꾼에 비해 이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 그러나 노동자 대다수는 새로운 임금체계를 봉급 차원에서 평가한다 . 그런데 새로운 임금체계로 인해 월급 봉투는 점점 얇아지고 있다 .

" 최종적이고 역전시킬 수 없는 사회주의의 승리 " 후에 소련 정부가 도급제로 돌아선 현상은 언뜻 보면 자본주의 생산관계로의 후퇴인 것 같다 . 그러나 실제로는 루블화의 복권에 대해 말한 것을 여기서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조야한 환상을 거부했다 . 변화된 임금 지불 형태는 소련의 현실에 적합하기 때문에 등장했을 뿐이다 . " 법은 경제체제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 ."

그러나 소련의 지배층은 사회현실을 치장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다 . 1936 년 1 월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메쥴라우크는 이렇게 말했다 : " 루블화는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는 사회주의 (!) 원칙을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 옛날 왕조 때는 심지어는 공공 화장실까지 왕립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 그러나 노동자국가에서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가 되지는 않는다 . 루블화는 사회주의 소유형태에 기초하여 노동의 자본주의적 지불 원칙을 실현하는 " 유일한 수단 " 이다 . 이 모순은 이미 우리에게 낯익다 . " 사회주의 " 도급제에 대해 새로운 미신을 만들면서 메쥴라우크는 이렇게 덧붙였다 : " 각자가 능력에 따라 일한 만큼 돈을 받는 것이 사회주의 기본 원칙이다 . " 이 양반들은 이론을 조작하는 데에는 확실히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 루블화를 더 많이 손에 넣기 위해 노동할 경우 사람들은 " 능력에 따라 " 즉 자기의 신경과 근육 상태에 맞추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몸을 망치면서 일한다 . 도급제는 조건적으로 그리고 엄혹한 필요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 이것을 " 사회주의 기본원칙 " 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새롭고 높은 문화를 주창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자본주의라는 낯익은 오물에 냉소적으로 짓이기는 것과 같다 .

스타하노프 운동을 "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 " 라고 치켜세우면서 스딸린은 한술 더 뜬다 . 행정적 편의에 따라 소련 지배층이 채용하고 있는 사고들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에서 노동량과 소비량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 반면 사회주의는 착취의 천재인 자본이 발명한 것보다 더 인간적인 통제를 전제로 한다 . 그러나 현재 소련에서는 자본주의에서 빌려온 기술에 낙후된 인적 자원을 가혹하게 끼워 맞추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 유럽과 미국에 버금가는 노동생산성을 달성하기 위해 도급제 같은 고전적 착취방식이 노골적이고 조야한 형태로 도입되고 있다 .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 노동조합조차 이 착취형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 소련 노동자들이 " 자발적으로 " 노동한다는 말은 역사적 전망 속에서 파악할 때만 진실이다 . 그리고 이 말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노동자가 전제적인 관료집단의 통제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거름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 그리고 가장 거대한 생산력인 인간을 소모시키는 가혹한 착취체제를 성스럽게 만들지도 못한다 . 스딸린이 말한바 "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 을 준비하는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시작될 것이다 . 즉 야만적 착취방식의 유물인 도급제 철폐를 통해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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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하노프 운동을 결산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 . 그러나 이 운동의 특징 뿐 아니라 소련 체제 전체의 특징을 파악하는 작업은 이미 가능하다 . 개개 노동자들의 일부 업적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현상이므로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흥미롭다 . 그러나 경제전체의 차원에서 가능성이 현실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주 멀다 . 생산과정들이 밀접하게 상호 의존하는 상황에서 높은 생산량의 계속적 달성은 몇몇 개인의 노력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 . 개별공장과 기업 사이의 관계에서 생산과정을 재조정하지 않으면 평균 노동생산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 더욱이 수백만 노동자들의 기술수준을 소폭이나마 향상시키는 일은 몇천 명의 기록보유자들을 다그치는 일보다 한없이 더 힘들다 .

이미 들은 바 있듯이 소련의 지배층조차 소련노동자들의 노동숙련도가 낮다고 가끔 불만을 늘어놓는다 . 그러나 이것은 진실의 반에 불과하다 . 게다가 더 작은 반쪽일 뿐이다 . 러시아 노동자는 주도성과 창조성과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 예를 들어 백 명의 러시아 노동자들을 미국 산업의 조건 속에 이식시키면 몇 개월 아니 몇 주만 지나도 미국 노동자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 문제는 전체적 차원에서 노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 새로운 생산 과업 달성에서 노동자들보다 소련의 관리자 집단이 일반적으로 훨씬 능력이 뒤진다 .

자본주의 국가에서 도입한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도급제를 실시할 경우 현재 매우 낮은 노동생산성은 체계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 .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현상이다 . 그러나 공장의 십장에서 크렘린궁의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관리 및 행정 분야가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 스타하노프 운동은 아주 적은 정도로만 이 점을 만족시키고 있다 . 관료집단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뛰어넘으려고 무모하게 달려들고 있다 . 도급제 자체가 즉각적인 기적을 가져오지 않으므로 관리집단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자에게 온갖 압력을 가한다 . 한편에서는 장려금과 허풍이 또 한편에서는 벌칙이 시행된다 .

스타하노프 운동 초기에는 저항과 태업이 있었다 . 어떤 경우에는 스타하노프 운동원이 살해되어 기술직 요원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 . 탄압의 가혹함은 저항의 정도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 " 태업 " 을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설명했다 . 그러나 대개의 경우 기술적·경제적·문화적 난관에 이 저항의 원인이 있다 . 특히 관료집단 자체가 난관의 대부분을 초래하고 있다 . " 태업 " 은 금방 진압된 것처럼 보인다 . 불평분자들은 위협을 받아 공포에 질렸고 말로 표현을 잘하는 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 여기저기에서 미증유의 성취를 알리는 전보가 날아다녔다 . 운동의 선구자들이 나타나면 지방의 관리자들은 상부의 명령에 충실하여 이들의 작업을 배려해 주었다 . 물론 광산이나 동업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 그러나 수십만 노동자들이 갑자기 " 스타하노프 운동원 " 이 되자 관리자들은 완전한 혼란에 빠진다 . 아주 짧은 시간에 생산체제를 정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관리집단은 노동력과 기술을 모두 파괴하고 있다 . 태엽장치가 고장나면 관리자들은 조그만 톱니바퀴에 못을 꽂아 넣는다 . " 스타하노프 " 주간과 10 일 돌격작전 기간이 끝나자 많은 기업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 이 사태는 언뜻 보면 놀랍지만 스타하노프 운동원의 증가가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저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

현재 이 운동의 " 영웅적 " 시기는 지난 것처럼 보인다 . 이제 하루하루의 지겨운 일이 시작된다 . 배을 필요가 있다 . 가르치는 자들이 더 많이 배워야 한다 .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배우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부류들이다 . 소련 경제의 모든 동업조합을 저지하고 마비시키는 사회적 동업조합의 이름은 --- 관료집단이다 .

 

 

제 5 장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

1. 왜 스딸린은 승리했는가

소련 역사가들은 이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관료지배층은 모순에 찬 좌충우돌의 정책을 계속했다 .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 변화하는 상황 " 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해도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 국정을 이끈다는 것은 최소한 어느 정도 예측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 스딸린 분파는 불가피한 결과들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 이들은 졸고 있다가 매번 당했다 . 대신 행정적인 반사신경만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대응했을 뿐이다 . 정책이 전환될 때마다 등장한 이론들은 모두 상황이 전개된 후 창조되었으며 이전의 교시들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 반박할 수없는 사실들과 문서들에 기초하여 역사가들은 소위 " 좌익반대파 " 가 다수파 지도부보다 나라의 현안을 훨씬 더 정확하게 분석했으며 이후의 사태를 훨씬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주장은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 한치의 앞도 내다볼수 없었던 분파가 승리한 반면 예리한 분석력을 지닌 분파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합리론적으로만 사고하면서 정치를 논리적인 주장이나 장기 시합으로 바라볼 경우에만 이 모순은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 정치투쟁은 근본적으로 이해집단과 사회세력 간의투쟁이며 단순한 논쟁이 아니다 . 물론 지도부의 자질은 분쟁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 그러나 결과의 유일한 요인도 아니다 . 그리고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결정적 요인도 되지 못한다 . 더욱이 투쟁하고 있는 세력들은 자기 특성에 맞는 지도부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

1917 년 2 월 혁명은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권좌에 앉혔다 . 이들이 당시 짜르 지배집단보다 " 더 영리하거나 통찰력이 있어서가 " 아니라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구체제에 대항해 들고 일어선 혁명 대중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케렌스키는 레닌을 지하로 피신하게 만들고 다른 볼셰비키당 지도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 그러나 이것은 그의 개인적 능력이 볼셰비키당 지도자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 오직 당시 노동자와 병사 대다수가 여전히 애국적 소부르주아 계급을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우월성 " 이란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케렌스키의 개인적 " 우월성 " 은 그가 절대 다수의 대중보다 예측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 반면 볼셰비키 당원들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을 결국 제압했는데 이것도 지도자들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세력 관계 때문에 가능했다 . 노동계급은 불만에 찬 농민대중을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도록 지도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 등장했다가 사라져간 혁명 " 지도자들 " 과 " 영웅들 " 의 위력은 이들을 지지한 계급 계층의 성격에 조응했다 . 프랑스 대혁명의 연속 단계들이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 구체적 상황과 무관한 개인의 우월성이 아니라 바로 이 계급적 조응이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이들의 개성을 부각시켰다 . 미라보 (Mirabeau), 브리쏘 (Brissot),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바라 (Barras), 보나파르트 (Bonaparte) 등은 두각을 나타내면서 혁명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 그러나 역사의 주연 배우인 이들의 특수한 개인적 자질과 성향에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객관 법칙이 이들의 등뒤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혁명 이후에는 반드시 반동이나 반혁명이 뒤따랐다 . 이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있다 . 물론 반동이나 반혁명이 상황을 혁명 이전으로 완전히 후퇴시킨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항상 대중 혁명의 성과 대부분을 거두어 갔었다 . 처음 몰아치는 반동의 희생자는 대개 혁명기에 대중의 선두에 섰던 선구자 , 주도자 , 선동가들이었다 . 대신 투쟁의 제 2 선에 머물렀던 분자들은 혁명 퇴조기에 혁명의 적들과 함께 선두로 떠밀려졌다 . 그리고 반동적 대세를 이용하여 사회의 지배력을 장악했다 . 공개된 정치 현장에서 " 주연 무용수들 " 이 극적인 대결을 벌였지만 배후에는 이미 변화된 계급 역관계와 최근까지 혁명적이었던 대중의 심리 변화가 작용하고 있었다 . 러시아 노동계급의 혁명적 주도성 , 헌신성 , 인민적 긍지 , 볼셰비키당의 혁혁한 활동상은 어디가고 이 모든 것 대신 사악 , 비겁 , 무기력 , 출세주의가 판치고 있는가 ? 어리둥절하여 이렇게 질문하는 많은 동지들에게 라코프스키 (Rakovsky) 는 18 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실화를 언급하면서 바뵈프 (Babeuf) 의 예를 전해준다 . 그는 아바이 (Abbaye) 감옥에서 풀려난 후 파리 교외의 영웅적 인민들의 변화된 모습에 의아해 했다 . 혁명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활력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괴물이다 .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혁명 인민의 신경은 마모되어 소진된다 . 의식은 흔들리고 배짱은 걸레조각이 된다 . 혁명의 파도가 너무 급격하게 휘몰아치기 때문에 활력에 찬 새로운 세력이 혁명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를 메울 시간이 없다 . 기아 , 실업 , 혁명 중핵의 사망 ,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던져진 대중 등 모든 현상들이 파리 교외를 물질적 도덕적 폐허로 만들었다 . 30 년이 지나서야 파리 대중은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회복되어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

부르주아 혁명의 법칙들은 노동계급 혁명에 " 적용될 수 없다 " 는 주장을 소련 언론은 표어처럼 늘어놓고 있다 .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 러시아 10 월 혁명의 노동계급적 성격은 세계 정세 , 러시아 국내 세력들의 특수한 상호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 그러나 사회계급들은 짜르 체제와 후진적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야만적 상황속에서 형성되었다 . 따라서 계급들은 결코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에 따라 주문되어 형성되지 않았다 . 실제는 이와 정반대였다 . 혁명에 대한 반동이 불가피하게 혁명 대중의 대오에서 일어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 많은 측면에서 여전히 후진적이었던 러시아 노동계급이 몇 개월 사이에 반봉건 왕조체제에서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도약한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 이 반동은 파도를 타고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 국외 상황과 사건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반동의 조건을 성숙시켰다 . 내전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반동적 개입이 잇따르면서 혁명을 괴롭혔다 . 혁명은 서구로부터 어떠한 직접적 도움도 구할수 없었다 . 혁명 이후 농촌은 번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 불길한 궁핍이 아주 오랫동안 농촌을 지배했다 . 더욱이 노동계급의 뛰어난 대표들은 내전 중에 전사하거나 관료사회의 사다리를 몇 번 오르더니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 결국 적대 세력들간의 유례없는 팽팽한 긴장 , 희망 , 환상 후에 피로 , 위축 , 혁명에 대한 실망감 등이 지배하는 긴 시기가 이어졌다 . " 인민적 긍지 " 가 썰물처럼 사라진 후 공백을 소심함과 출세주의의 밀물이 메웠다 . 새로운 지배집단이 이 물결을 타고 권력을 장악했다 .

5 백만 붉은 군대의 동원 해제는 관료지배층의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 내전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들은 지역 소비에트 , 경제 , 교육 등의 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 그리고 내전을 승리로 이끈 비상체제를 사회모든 분야에 도입했다 . 이 결과 모든 분야에서 대중은 사회의 실질적 지도 역할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

노동계급 내부의 반동의 물결은 도시와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 이들은 이미 신경제 정책을 통해 상승하고 있었는데 이제 더욱 대담해졌다 . 젊은 관료집단은 처음에는 노동계급의 대표로 등장했으나 이제 계급간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스스로 떠맡기 시작했다 .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관료집단의 독립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

국제정세는 소련 내부의 관료주의 경향을 강력하게 추동시켰다 . 세계노동계급에게 가해지는 자본가계급의 철퇴가 무거울수록 소련 관료집단은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 그러나 이 두 사실 사이에는 시기적 인과적 연관이 모두 존재하였다 . 그리고 이 연관은 두가지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 즉 관료지배층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조장했으며 노동계급의 패배는 이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 1923 년 불가리아의 대중봉기가 진압되었으며 독일의 노동자 정당은 굴욕적으로 혁명에서 후퇴하였다 . 1924 년 에스토니아의 봉기 기도는 곧 붕괴했다 . 1926 년 영국 총파업은 노동관료들의 배신으로 끝났다 . 폴란드에서는 필수스키 (Pilsudski) 독재정권의 등장 앞에 폴란드 노동자당이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 1927 년 중국혁명은 끔찍한 피의 학살로 끝났다 . 마지막으로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더욱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 이들 일련의 역사적 대재앙으로 세계혁명에 대한 소련 대중의 신념은 사라졌다 . 이로써 관료집단은 구원의 유일한 빛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높은 고지를 점령했다 .

지난 13 년 동안 세계 노동계급이 패배한 이유를 필자는 여러 저서들을 통해 설명했다 . 이 저서들에서 필자는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지극히 보수적인 크렘린 궁의 지도부는 모든 나라의 혁명운동을 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 유럽과 아시아에서 혁명이 연속해서 괘배하자 소련의 국제적 지위는 약화되었다 . 그러나 소련 관료집단의 힘은 크게 강화되었다 . 이 사실은 논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후 사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지금 얘기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서 두 사건은 특히 의미가 크다 . 1923 년 후반에 소련 노동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독일로 향해 있었다 . 독일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손을 뻗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공포에 질린 후퇴는 소련의 근로대중에게 매우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 소련의 관료집단은 즉시 " 연속혁명 (permanent revolution)" 이론 ( 역자 주 : 이 용어는 그동안 영구혁명으로 알려졌ㄷ . 그러나 뜨로츠키는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이 용어가 중단없이 진행되는 혁명 , uninterrupted revolution, 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 즉 부르주아 혁명은 계속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하며 일국 사회주의혁명은 세계적 차원의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뜨로츠키는 이 용어를 통해 혁명이 영원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좌익반대파에게 첫번째 잔인한 타격을 가했다 . 1926 년과 1927 년 사이에 소련의 대중은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 모든 시선은 이제 중국혁명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동양으로 향했다 . 한편 좌익반대파는 관료집단에 의해 가해진 이전의 타격으로부터 회복되었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 1927 년 중국혁명은 장개석이라는 사형집행인에 의해 학살당했다 . 코민테른은 그의 손아귀에 중국의 노동자 농민을 문자 그대로 갖다 바쳤다 . 그러자 차가운 실망감이 소련 대중을 엄습했다 . 언론과 집회를 통해 거리낌없이 도발을 자행하던 관료집단은 1928 년 마침내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감행했다 .

물론 수만 명의 혁명 투사들이 볼셰비키 - 레닌주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 선진노동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좌익반대파에 공감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 공감은 수동적이었다 . 대중은 새로운 투쟁을 통해 상황이 크게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한편 관료지배층은 이렇게 주장했다 : " 좌익반대파는 국제혁명을 위해 우리를 혁명전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 소동은 이제 그만 ! 우리는 휴식을 취할 권궈를 얻었다 . 우리는 국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 . 여러분의 지도자인 우리를 믿어라 !" 이 휴식의 복음은 공산당 , 군대 , 국가기구 등에 포진한 관료들을 강력히 결속시켰고 피곤에 지친 노동자와 농민대중에게 당연히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이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 좌익반대파가 " 연속혁명 " 사상을 위해 소련을 팔아넘기는 것이 아닌가 ? 그런데 실제로 좌익반대파의 투쟁은 소련을 생존시키기 위한 투쟁 그 자체였다 . 코민테른의 잘못된 독일 정책은 10 년 후 히틀러의 승리를 가져왔다 . 즉 전쟁 위험이 서구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 그리고 코민테른의 똑같은 정도의 잘못된 중국 정책은 일본 제국주의를 강화시켰고 동방의 위협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 그러나 반동기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용기 있는 사상의 결여에 있다 .

좌익반대파는 고립되었다 . 관료지배층은 때를 놓치지 않고 노동자의 당혹감과 수동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 이들은 노동계급의 후진 부위가 선진 부위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 그리고 더욱 대담하게 쿨락과 소부르주아 동맹군에게 의존했다 . 이후 몇 년에 걸쳐 관료지배층은 노동계급의 혁명 전위를 분쇄했다 .

그 동안 대중에게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스딸린이 완벽한 전략으로 무장하여 권력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이다 . 이런 일은 실제하지 않았다 . 그가 나름의 노선을 모색하고 있을 때 관료지배층은 그를 모색하고 있었다 . 그는 관료지배층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 고참 볼셰비키의 권위 , 강인한 성격 , 협소한 안목 , 자신의 유일한 정치기반인 정치기구와의 밀접한 유대 등등 . 그는 갑자기 자기에게 닥친 성공에 우선 놀랐다 . 새 지배집단은 그에게 환영의 손길을 뻗쳤다 . 과거의 혁명 원칙과 대중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기들 집단 내부의 안정을 가져다줄 믿을 만한 조정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 대중의 눈에 그리고 혁명 과정에서 주변적 인물이었던 스딸린은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관료집단의 우두머리로 등장했다 .

새 지배층은 자신의 사상 , 감정 그리고 더 중요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곧 드러냈다 . 현재 관료집단 중 구세대의 절대 다수는 10 월 혁명기에 혁명 반대 진영에 있었다 . 소련 대사들만을 예로 들 경우 트로야노프스키 , 마이스키 , 포템킨 , 수리츠 , 킨추크 등이 혁명에 반대했던 자들이었다 . 혁명에 반대하지 않은 인물들은 기껏해야 투쟁에서 빠져나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 10 월 당시 볼셰비키 진영에 있었던 현직 관료 대부분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 . 소장 관료들은 노땅들에 의해 선택되어 훈련을 받았다 . 종종 부자관계도 있었다 . 이런 부류의 인물들은 10 월 혁명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지만 혁명의 결과를 이용하는 일에는 커다란 수완을 발휘했다 .

10 월 혁명과 테르미도르 반동기 사이에 인물 개개인의 신변은 사태에 확실히 영향을 끼쳤다 . 레닌의 병환과 사망은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 상황을 재촉했다 . 레닌이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관료집단은 최소한 첫 몇 년간 좀더 서서히 세력을 확대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미 1926 년에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는 좌익반대파 성원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 레닌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감옥에 있을 겁니다 ." 레닌 자신은 이미 앞으로 전개될 사태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 그녀는 아직도 이것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녀는 반동의 대세에는 레닌의 전지전능함도 소용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그리고 관료지배층은 좌익반대파보다 더 큰 재물인 볼셰비키당을 장악했다 . 이들은 레닌의 강령을 패배시켰다 . 그는 국가기구가 " 사회의 하인에서 지배자 " 로 변모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이들은 좌익반대파 , 당 , 레닌 등 모든 적들을 패배시컸다 . 그리고 사상과 논쟁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력과 비중으로 승리했다 . 관료집단의 납 엉덩이가 혁명의 머리보다 더 무게가 많이 나갔다 . 이것이 소련에서 일어난 테르미도르 반동의 비밀이다 .

 

2. 볼셰비키당의 퇴보

볼셰비키당은 10 월 혁명을 준비하였고 노동자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 또한 소련 국가기구를 창건하고 그 기구의 튼튼한 근간을 구성했다 . 그러나 당의 퇴보 (degeneration) 가 이제 국가기구 관료화의 원인이자결과가 되었다 . 이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것이 필요하다

볼셰비키당의 운영원리는 민주집중제 (democratic centralism) 였다 . 민주주의와 집중제라는 두 개념의 결합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다 . 볼셰비키당은 당의 경계선을 항상 엄격하게 규정했다 . 이것만이 아니었다 . 일단 이 경계선 안에 들어온 당원에게는 당의 정책방향을 규정할 실질적 권리를 부여하는 면밀한 조치를 취했다 . 당내부에서 자유롭게 당정책을 비판하고 지적인 투쟁을 수행하려면 당내 민주주의가 반드시 있어야한다 . 볼셰비키당이 분파활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금의 사고는 혁명 퇴조기의 미신에 불과하다 . 실제로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분파투쟁의 역사였다 . 자본주의 세계를 타도하고 자신의 깃발 아래 가장 대담한 투사와 반란자들을 결집시키는 임무를 가진 진정한 혁명조직이 지적 분쟁이나 일시적 분파 없이 살아 움직이고 발전할 수 있겠는가 ? 볼셰비키 지도부의 넓은 시야가 당내 분쟁을 최소화시켰고 분파투쟁의 기간을 단축시켰다 .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 끓어 오르는 당내 민주주의가 당 중앙위원회를 지탱하였다 . 당 지도부는 이 지지에 기반하여 필요한 사안을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하는 대담성을 발휘하였다 . 모든 결정적 국면에서 명백하게 옳았으므로 당 지도부는 집중제의 한없이 값진 도덕적 자산인 높은 권위를 누렸다.

특히 권력 장악 이전 볼셰비키당의 내부 조직 체계는 현재 코민테른 지부인 각국 공산당의 체계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 현재의 공산당에서 " 지도자들 " 은 상부에서 임명되며 상부의 명령 한마디에 정책을 완전히 바꾼다 . 그리고 평당원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당기구는 이들 위에 거만하게 군림하며 크렘린궁 지도자들에게만 노예처럼 복종한다 . 권력을 장악한 초기의 몇 년간 이미 당기구는 삐걱대고 있었다 . 그러나 당시 스딸린을 비롯한 모든 볼셰비키당원들이 그로부터 10 년 또는 15 년이 지난 후 당의 모습을 담은 필름을 미리보았다면 이것이 어느 비방분자의 작품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 레닌과 그의 동료들의 관심은 다수파 집권층의 악행으로부터 볼셰비키 평당원들을 보호하는 데 끊임없이 집중되었었다 . 그러나 당과 국가기구의 대단히 밀접한 관계와 인적 구성의 중복 때문에 이미 초기 몇 년간 당의 자유와 유연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손상당했다 . 여러 난관들의 점점 심각해지면서 당내 민주주의는 이와 비례하여 축소되었다 . 초기에 당은 소비에트의 틀 안에서 정치투쟁의 자유를 보존하려했다 . 그러나 내전은 이 소망에 아주 준엄한 수정을 가했다 . 야당들은 차례로 불법화되었다 . 이 조치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정신에 명백히 위배되었다 . 그러나 당지도부는 이 조치를 원칙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한 일시적 조치로 간주했다 .

볼셰비키 당기구의 급속한 성장은 수행할 임무의 새로움과 거대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내 이견들을 표출시켰다 . 노동자 권력에 도전하는 반동 지하조직들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당에 영향을 미쳤다 . 따라서 유일한 합법 정치조직인 볼셰비키당의 분파투쟁은 격렬해졌다 . 내전이 끝날 무렵 이 투쟁은 너무 날카로와 국가권력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 1921 년 3 월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 볼셰비키 당원들 상당수가 이 반란에 가담했는데 이때 열린 제 10 차 당대회는 분파를 금지하고 국가권력을 당으로 이전시켰다 .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상황이 호전되자마자 폐기할 특별조치로 간주되었다 . 동시에 중앙위원회는 이 새로운 결정으로 당내 활동이 질식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필요한 후퇴로 간주되었던 애초의 조치는 관료집단의 취향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 관료집단은 당내 활동을 행정적 편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 레닌은 건강이 잠시 호전된 1922 년에 이미 당 관료기구의 위협적 성장에 경악했다 . 그리고 당기구를 핵심적으로 장악하면서 국가기구 탈취를 준비하고 있던 스탈린 분파에 대한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그러나 당내 반동 세력에 대한 레닌의 투쟁은 그가 두 번째 뇌일혈을 일으키고 사망함으로써 중단되었다 .

지노비에프 , 카메네프와 동맹한 스딸린은 당기구를 평당원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주력하였다 . 중앙위원회의 " 안정 " 을 위한 투쟁에서 스딸린은 동료들 중에서 가장 일관되고 믿을 만한 인물로 판명되었다 . 그는 국제문제에서 손을 뗄 필요도 없었다 . 애초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새 지배집단의 소부르주아 세계관은 그의 세계관이기도 했다 . 사회주의 건설의 과업은 일국적 행정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 그리고 코민테른을 가능하면 대외정책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필요악 정도로 간주했다 . 그에게 당은 자신의 권력 기구를 수동적으로 지지하는 정도의 가치만 가지고 있었다 .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중앙위원회는 모든 것이고 당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상이 관료집단에 의해 유포되었다 . 이 새로운 이론은 일국사회주의 이론보다 관료집단의 이해에 더 잘 복무했다 . 레닌의 사망을 기화로 관료지배층은 " 레닌의 소집 (Lenin's levy)" 을 선언하였다 . 과거에 당의 문호는 항상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개방되었다 . 노동자 , 점원 , 하급관리 등이 떼를 지어 당으로 몰려들었다 . 이 조치의 정치적 목적은 혁명 전위의 해체에 있었다 . 조직 경험이나 독립성 등이 부족하지만 권위에 복종하는 구래의 습관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 당원이 될 수 있었다 . 이 조치는 성공했다 . 관료집단을 노동계급 전위의 통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 레닌의 소집" 은 레닌이 건설한 당에게 마지막 죽음의 일격이 되었다 . 이제 당기구는 필요한 독자성을 얻었다 . 민주집중제는 관료집중제로 바뀌었다 . 상부와 하부를 막론하고 곧 대대적인 인사태풍이 불어닥쳤다 . 볼셰비키 당원의 주요한 미덕은 복종이라고 선언되었다 . 좌익반대파와 투쟁한다는 명분 하에 혁명가들은 당기구에서 축출되고 대신 전문관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이제 당의 급속한 퇴보의 역사로 돌변했다 .

좌익반대파 , 중앙파 , 우파의 지도자들이 모두 정치국원이었기 때문에 분파투쟁의 정치적 의미는 베일에 가려졌었다 .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면 분파투쟁은 레닌의 " 법통 " 을 차지하려는 개인적 경쟁이었다 . 그러나 철의 독재체제에서는 사회적 갈등은 처음에는 권력을 장악한 당기구들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 프랑스의 경우 테르미도르 반동에 가담한 인물 대다수는 자코뱅 클럽 출신이었다 . 나폴레옹 역시 혁명 초기에는 이 클럽의 회원이었다 . 제 1 집정관 시절과 이후 황제가 되었을 때 그가 가장 충성스러운 하수인들을 모집한 것도 바로 자코뱅 클럽 구회원들로부터였다 . 시대는 변했고 자코뱅파도 변했다 . 20 세기의 자코뱅파인 볼셰비키당도 마찬가지이다 .

레닌 생전의 정치국원들 중 스딸린 만이 아직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오랜 망명시절 레닌과 함께 일했는데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어 쓰고 지금 10 년 징역형을 살고 있다 . 리코프 , 부하린 , 톰스키는 지도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는데 복종의 대가로서 한가한 직책을 맡고 있다 . 그리고 필자는 현재 망명 중이다 .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 모든 노력을 했으나 그녀도 테르미도르 반동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

현직 정치국원들은 볼셰비키당 역사 내내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 혁명 초기 몇 년간 이들의 영전을 예상한 자가 있었다면 아마 그가 가장 이 현상을 놀랍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 그리고 이 놀라움에는 가식이 없었을것이다 . 바로 이 때문에 정치국은 언제나 옳으며 어느 누구도 정치국보다 옳을 수 없다는 규칙이 과거 어느 때보다 엄격히 준수되고있다 . 그러나 정치국도 무오류의 스딸린보다 더 옳을 수는 없다 .

당내 민주주의 회복 요구는 이 시기 내내 모든 반대세력의 구호였다 . 그러나 실현될 수 없는 구호였기에 더욱더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 이미 언급한 좌익반대파 강령은 1927 년에 " 비판적 노동자를 직접적·간접적 방식으로 탄압하는 것을 중대한 국가적 범죄로 처벌 " 할 조항이 특별법으로 제정되어 형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 그러자 좌익반대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조항이 형법에 도입되었다 .

이제 당내 민주주의는 구세대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다 . 당내 민주주의의 실종은 소비에트 , 노동조합 , 협동조합 , 문화단체 , 체육단체 등의 민주주의 실종과 함께 진행되었다 . 당 간부들의 무제한적 위계질서가 모든 기구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 이제 소련은 " 전체주의 " 체제가 되었으며 이 용어가 독일에서 건너오기 몇 년 전에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 라코프스키는 1928 년 이렇게 썼다 : " 독자적 사고 능력이 있는 공산주의자의 의지 , 용기 , 존엄성이 파괴당해 이제 공산주의자는 기계가 되었다 . 이 결과 관료지배층은 제거될 수 없는 과두제로 정착했다 . 이제 당과 계급은 사라졌다 ." 분노에 찬 이 글이 나온 이래 당의 퇴보는 더욱 끝없이 진행되었다 . 비밀경찰 (GPU) 은 당생활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 1936 년 3 월 몰로토프가 프랑스 기자에게 집권 여당 내부에는 분파투쟁이 없다고 자랑하였다 . 그러나 이 현상은 당내 이견이 정치경찰의 자동적 개입으로 해소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 이제 과거의 볼셰비키당은 죽었으며 어떤 힘도 이것을 부활시킬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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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정치적 퇴보와 함께 평당원의 통제를 받지 않는 당기구가 도덕적으로 부패했다 . 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뜻의 " 소브부어 (sovbour)" 는 특권 관료층을 의미했는데 노동자들의 어휘에 일찌감치 등장했다 . 신경제 정책의 등장과 함께 부르주아 경향은 활동영역을 더 넓혔다 . 1922 년 3 월 제 11 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권력층의 타락 위험을 경고했다 . 피정복자가 정복자보다 문화수준이 더 높을 경우 정복자는 피정복자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 이 경우는 인류 역사에서 적어도 두번 이상 존재했다고 레닌은 말했다 .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짜르체제 관료집단의 문화는 확실히 형편없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새로운 지배층은 종종 이 문화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 모스크바에서는 "4,700 명의 책임감 있는 공산주의자들 " 이 국가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 "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가 ? 공산주의자가 지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의심스럽다 " 고 레닌은 말했다 . 이후의 당 대회에서 레닌은 병환으로 연설을 할 수 없었다 . 그러나 활동적 삶의 최후의 몇개월간 그의 생각은 관료집단의 억압 , 변덕 , 타락을 노동자들에게 경고하고 이들의 저항을 촉구하는데 바쳐졌다 . 그러나 그는 질병의 첫 징후만을 보았을 뿐이다 .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의장이었으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소련 대사를 지냈다 . 그는 1928 년 당시 유형 중에 있던 친구들에게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짤막한 조사보고서를 보내 주었다 . 이것은 이미 이 책에서 여러 번 인용된 바 있는데 현재까지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훌릉한 자료이다 . 라코프스키는 이 조사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 " 레닌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당지도부의 임무가 아주 명확했다 : (1) 권력층의 특권 , 지위 , 전용상점 등의 부패 (2) 구귀족계급 및 부르주아 잔존세력과 권력층의 화해 (3) 신경제정책의 부패적 영향력 (4) 부르주아지의 도덕과 이데올로기가 가하는 유혹 등 해악적 요인들로부터 당과 노동계급의 보호 . ....... 그러나 당기구는 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며 대중의 교육자및 보호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완전히 모자란다는 점을 우리는 정직하게 틀림없이 큰소리로 말해야 한다 . 당 지도부는 실패했으며 파산했다."

라코프스키 자신이 관료집단의 억압에 굴복하여 자신의 비판적 판단을 철회한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70 노인 갈릴레오 역시 자기 신념을 철회했었다 . 종교재판소의 탄압 때문에 이 과학자는 코페르니쿠스 우주 이론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지구가 태양주위로 도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 우리는 60 노인 라코프스키가 진심으로 자기 신념을 철회했다고 믿지않는다 . 왜냐하면 그는 최소한 두번 이상 강요된 전향을 날카롭게 분석했기 때문이다 . 사태의 객관적 전개는 그의 정치비판들의 올바름을 주관적 지조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

노동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여타 계급과의 역관계에 변화를 가져을 뿐 아니라 자기 내부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 국가권력의 행사는 특정 사회집단의 전문영역이 된다 . 이 경우 혜택받은 권력층은 우선 자신의 " 사회 문제 " 를 해결하기 위해 급급하게 된다 . 특히 자신의 역사적 임무의 숭고함을 높이 자각할수록 이 경향은 더욱 강하다 . " 노동자국가는 집권당 성원의 자본주의적 축적을 금지한다 . 이 경우 노동계급의 계층적 분화는 처음에는 각 집단의 기능에 따라 발생하지만 이후에는 사회적 성격을 띤다‥‥‥ " 계속해서 라코프스키는 설명한다 : " 승용차 , 고급 아파트 , 정기 휴가 등의 특권을 누리면서 당 최고수준의 급료를 받는 공산주의자의 사회적 조건은 한달에 기껏해야 50 내지 60 루블을 받으며 석탄광산에서 일하는 공산주의자의 사회적 조건과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 재물 욕심 , 정부 사업권 획득 , 보급품 확보 등 자코뱅파가 권력을 잡은 후 타락한 이유들을 열거하면서 라코프스키는 바뵈프의 흥미 있는 발언을 인용한다 . 권력을 장악한 자코뱅파의 타락은 이들과 아주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구귀족 계급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크게 영향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 바뵈프는 외쳤다 : " 소심한 인민의 자식이여 ,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 귀족계급의 젊은 여성들이 오늘은 당신들을 포옹하지만 내일은 당신들을 목졸라 죽일 것이다 ." 소련 지배층 부인들에 대한 호구조사 통계는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아주 잘 알려진 소련의 언론인 소스노프스키 (Sosnovsky) 는 소련 관료집단의 도덕수준 형성에 특별한 역할을 한 " 승용 - 여자 요인 " 을 지적한다 . 소스노프스키 역시 라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자기 발언을 철회하고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왔다 . 그렇다고 소련 관료집단의 도덕 수준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 이와 반대로 과거 발언을 철회한 것 자체는 심화되고 있는 사기저하를 증거할 뿐이다 .

소스노프스키의 오랜 신문기사들은 원고의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 그의 기사들은 새로운 지배층의 일상생활에 대한 잊지 못할 일화들을 싣고 있었다 . 이 일화들은 현재 권력층이 과거 권력층의 도덕에 어느 정도 동화되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 그는 1934 년 마침내 관료집단에게 굴복하였다 . 그러므로 과거의 예를 찾을 것 없이 새로운 예들만을 소련 언론에서 발굴해보자 . 그리고 권력 남용이나 소위 " 비리 " 들보다 합법적이어서 소련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일상사들을 다루어 보자 .

어느 모스크바 공장의 책임자는 아주 유명한 공산주의자인데 자기 공장의 문화 수준 개선 상황을 『프라우다』에서 자랑하고 있다 . " 어느 기계공이 전화를 건다 :' 책임자님 , 지시의 내용이 무엇이십니까 ? 용광로를 즉시 확인할까요 아니면 기다릴까요 ?' 나는 대답했다 ' 기다려 .'" 기계공은 2 인칭 복수를 쓰면서 책임자에게 아주 공경한 어조로 말한다 . 이에 대해 책임자는 자신의 우수한 지위를 의식하여 2 인칭 단수를 써서 기계공을 마치 하인처럼 대한다 . 이 구역질나는 대화는 문화수준이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아주 보통인 것처럼 책임자 자신이 『프라우다』에 소개하고있다 ! 그런데 신문 편집자는 이 어투에 반대하지 않는다 . 자신도 그것이 보통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신문 독자들도 반대하지 않는다 . 이미 이런 대접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역시 놀라지 않는다 . 크렘린궁의 엄숙한 회의에서 " 지도자들 " 과 인민위원들은 자신들의 부하인 공장 책임자들 그리고 훈장을 받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집단농장의 대표들 , 십장 , 여성들에게 똑같은 투로 말하기 때문이다 . 짜르시대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혁명 구호는 사장이나 고위관료들이 하급자에게 쓰는 2 인칭 단수 금지 요구였다 . 이 사실을 어떻게 벌써 잊을 수가 있는가 !

위에서 소개한 크렘린궁 지도자들의 " 인민 " 에 대한 태도는 마치 주인이 하인에게 대하는 것처럼 오만불손함이 놀라울 지경이다 . 그러나 이 사실은 10 월 혁명의 승리 , 생산수단의 국유화 , 농업의 집단화 , " 쿨락 계급의 해체 "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 특히 소비에트 위계질서 최상층부의 인간 관계가 사회주의에 걸맞게 높아지기는커녕 많은 측면에서 문화적으로 우수한 자본주의에 비교해도 여전히 훨씬 뒤쳐지고 있음을 실수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

문화의 영역에서 최근 커다란 후퇴가 있었다 . 그리고 러시아 야만주의 부활의 진정한 원천은 당연히 소비에트판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 이 계기를 통해서 세련된 문화를 갖지 못한 관료집단이 대중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사회에 군림하게 되었고 대중은 복종과 침묵이라는 잘 알려진 복음을 선사 받았다 .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여 양자의 강점들을 순수이성에 기초하여 재어 볼 생각은 필자에게 결코 없다 .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변화만이 영원히 지속되는 요소이다 . 볼셰비키당의 독재는 인류 진보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 판명되었다 .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어느 시인의 말대로 , " 이성은 비 ( 非 ) 이성이 되고 친절은 짐이 된다 ." 야당 금지는 분파활동 금지로 이어졌다 . 분파활동 금지는 무오류 지도자들에 대한 반대를 금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 비밀경찰이 제조한 당의 통일성은 관료집단의 전횡을 낳았다 . 이로부터 온갖 종류의 잔악함과 부패가 생겨났다 .

 

3. 테르미도르 반동의 사회적 기반

우리는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을 대중에 대한 관료집단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 그리고 이 사건의 역사적 조건들을 밝혔다 . 노동계급의 혁명 전위 가운데 일부는 행정기구에 집어삼켜져 서서히 사기를 잃어갔고 또 일부는 내전으로 전몰하였으며 나머지 일부는 사회의 주요 영역에서 배제되어 압살되었다 . 지치고 실망한 대중은 사회의 정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 지금까지 열거한 조건들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왜 관료집단이 사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운명을 확고하게 장악했는 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관료집단의 권력의지도 이 현상을 설명하는데 불충분하다 . 새 지배층의 등장에는 깊은 사회적 원인들이 있다 .

18 세기 자코뱅파에 대한 테르미도르 반동도 대중의 피로와 혁명 중핵의 사기저하에 일부 원인이 있었다 . 그러나 본질적으로 부차적인 이 현상 밑에서는 깊은 유기적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 자코뱅파는 거대한 혁명의 파도로 들어 올려진 하층 소부르주아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 그러나 장기적으로 18 세기 프랑스 대혁명은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여 대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 테르미도르 반동은 이 불가피한 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은 어떤 사회적 필연을 표현했는가 ? 경찰기구가 승리한 문제에 대해 필자는 이미 예비적으로나마 해답을 제시했었다 . 이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적 조건과 이 과정에서 필요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존의 분석을 확장시켜야 한다 . 다시 한번 이론적 예언과 현실을 비교해보자 . 국가권력을 장악한 직후 곧바로 개시될 시기에 대해 1917 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 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저항을 억압할 필요가 여전히 존재한다 . 그러나 여기에서 억압의 주체는 - 지금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 인구의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다‥‥‥‥ 이 경우 국가는 사멸을 시작한다 . " 그러면 국가 사멸의 과정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 " 특귄 관료 , 상비군의 사령관 등 특권 소수 지배층의 특별한 기구들 대신 다수 대중이 직접 억압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다 . " 그리고 레닌은 곧이어 격언과도 같은 반박할 수 없는 사고를 개진한다 : " 국가권력의 기능이 다수에 의해 좀더 보편적으로 수행되면 될수록 이 권력에 대한 필요성은 점점 더 줄어든다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면서 국가에게 주어진 주요한 역사적 임무 즉 절대 다수에 대한 소수의 특권적 소유를 방어할 임무가 없어진다 .

레닌에 의하면 국가의 사멸은 착취자를 착취한 날 바로 다음 즉 새로운 체제가 경제적·문화적 문제들을 해결할 시간을 갖기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 . 이 문제들이 해결될 때마다 국가는 철폐되고 사회주의 체제 내로 해소된다 . 이 해소의 정도는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 대체로 이와 같은 사회학적 가설이 제시될 수 있다 : 노동자국가에서 대중이 행사하는 강제력의 강도는 착취의 경향 즉 자본주의로의 복귀 위험과 정비례한다 .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대중의 충성심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 따라서 특권 관료와 상비군 사령관을 포함한 관료집단의 역할을 대중은 맡을 수도 맡기를 원치도 않는다 .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 자신을 억압한 강제력의 특수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

민주적 소비에트가 원래의 위력과 독립성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혁명 후 첫 몇 년간 사용했던 억압과 강제력을 지금도 사용해야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우려를 제기할 만하다 . 그런데 현재 대중 소비에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강제력의 기능을 스딸린 , 야고다 등에게 넘겨주었다 .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한다 : 국가가 의연히 그 억압의 위력을 고수하면서 경찰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는 배경에는 어떤 사회적 원인이 버티고 있는가 ? 이 질문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따라서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 일반에 대한 기존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든가 소련의 공식적 견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

이제 어느 모스크바 신문의 최신호에 소개된 소련에 대한 틀에 박힌 정의를 검토해보자 . 이 정의 가운데 하나는 매일 소련 전국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학교 어린이들이 외우고 있다 : " 소련에는 자본가 , 지주 , 쿨락 등 기생적 계급들이 완전히 일소되었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는 영원히 종식되었다 . 전국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고 발전하고 있는 스타하노프 운동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조건들을 준비하고 있다 ."( 『프라우다』 1936 년 4 월 4 일자 ) 코민테른이 발행하는 세계신문도 이 주제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 그러나 착취가 " 영원히 종식되었다 " 면 그리고 소련이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공산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면 국가라는 마지막 족쇄를 던져버리는 일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 그런데 현재 소련은 전체주의적 관료체제이다 . 이 엄청난 차이는 머리로 상상하고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

이 치명적 모순은 당 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이 경우 문제는 대개 이렇게 정식화될 수 있다 : 1917 년부터 1921 년까지 구 지배계급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혁명에 대항했으며 전세계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적극 지원 받고 있었다 ; 동시에 무기를 든 쿨락이 나라의 군대와 식량공급을 방해하고 있었다 ; 이 당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당내에서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논의하는 것이 가능했는가 ? 한편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이 끝나고 착취계급이 일소되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공업화가 성공했으며 농민 절대다수에 대한 집단화가 시행되었다 . 그런데 왜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교체되지 않는 지도자들이 존재하며 이들에 대한 단 한마디의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 당헌에 따라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볼셰비키당원이 왜 즉시 출당 조치를 당하며 스딸린의 무오류성에 대한 의구심을 크게 소리내어 표현한 시민이 왜 마치 테러 음모의 가담자인 것처럼 기소되어 유죄선고를 받는가 ? 어디서 이 끔찍하고 괴물 같으며 참을 수 없는 탄압과 경찰력의 강화 현상이 등장했는가 ?

이론은 언제나 현실에게 지불을 요구할 수 있는 어음이 아니다 . 어떤 이론이 오류로 판명되면 그것을 수정하고 빈틈을 메워야 한다 . 소련의 현실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가져온 진짜 사회세력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 현재 소련 지도자들의 권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살아 있는 현실의 뺨을 때리며 모욕하는 공 문구를 반복하면서 어둠 속을 헤맬 수는 없다 . 이제 이 공 문구의 설득력 있는 예를 찾아보자 .

1936 년 1 월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인민위원회 의장 몰로토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 " 소련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다 ( 박수 ). 이 의미에서 (?) 우리는 계급을 일소시켰다 ( 박수 )." 그러나 과거부터 " 우리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분자들 " 인 구 지배계급들의 잔당이 남아 있다 . 더욱이 집단농장의 농부 , 국가 공무원 , 심지어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가끔 " 피라미 투기꾼들 " 이 발견된다 . 이들은 " 집단적 재산과 국가 재산을 뜯어먹는 사기꾼 , 소련에 해악을 끼치는 수다장이 등 " 으로 불린다 . 이 결과 독재를 더욱 강화해야한다 . 엥겔스의 견해와는 반대로 노동자국가는 " 잠들어서는 " 안된다 . 반대로 더욱더 경계를 단단히 해야한다.

소련 정부의 수반인 몰로토프가 제시한 소련의 현재 상황은 너무 참혹하게 자기모순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가장 안심스러운 내용일 것이다 . 사회주의는 소련을 완전히 정복하고 있다 : " 이런 의미에서 " 계급은 철폐되었다 (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경우에도 계급은 철폐되어 있다 ). 물론 사회 안정은 과거 유물들의 파편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흔들리고 있다 . 여기저기에 흩어진 자본주의 복귀파 몽상가들은 권력과 재산을 박탈당하고 있다 . 따라서 비록 "( 진짜 투기꾼이 아니라 ) 피라미 투기꾼들 " 이나 " 수다장이 " 들과 연합해도 무계급 사회를 타도할 수는 없다 . 모든 일이 최선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 그렇다면 관료집단에 의한 철의 독재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

반동적 몽상가들이 점차 소멸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 " 피라미 투기꾼들 " 과 " 수다장이들 " 은 초 ( 超 ) 민주적 소비에트에 의해 우습게 제거될 것이다 . 1917 년 레닌은 관료주의적 국가의 부르주아 및 개량주의 이론가들에게 이렇게 응답했다 : "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지 않다 . 개개인의 비리나 권력남용 가능성과 불가피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 그리고 이 남용들을 억압할 필요성 역시 마찬가지로 부인하지 않는다 . 그러나 ‥‥‥ 이런 조치를 취하기 위한 특별한 억압기구는 필요 없다 . 이것은 무장 인민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 현대 사회에서 문명인이 싸움하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고 여성에 대한 폭행을 막는 것과 같이 아주 단순하고 쉴게 인민들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 이 말은 마치 레닌이 몰로토프 같은 정부 수반들의 견해를 특별히 예상한 것처럼 느껴진다 . 소련의 공립학교는 레닌 사상을 가르친다 .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 그렇지 않다면 레닌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며 비판하는 엉터리 이론을 인민위원회 의장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용감하게 말할 리가 없을 것이다 . 소련의 창시자와 그의 아류 사이의 모순이 우리 앞에 드러났다 ! 레닌은 관료적 기구가 없이도 착취계급이 일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반면 몰로토프는 계급의 일소 이후에도 왜 관료기구가 인민의 독립성을 질식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 그저 일소된 계급의 " 잔당 " 을 언급할 뿐이다 .

그러나 " 잔당 " 의 존재를 관료주의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 왜냐하면 관료집단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자백에 의하면 어제의 적들은 소련 사회에 이미 성공적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 1936 년 4 월 당 중앙위원회 비서의 하나였던 포스티세프 (Postyshev) 는 공산주의 청년동맹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 " 많은 수의 태업 분자들은 ‥‥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고 소련 인민의 대열에 합류했다 ." 농업 집단화가 성공했으므로 " 쿨락의 자식들이 자기 부모들의 과거를 책임질 수 없다 ."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발언도 있다 : " 과거 농촌의 착취자였던 쿨락은 다시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 출신 성분에 따른 사회활동 제한법을 정부는 철폐했다 . 이 조치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 몰로토프가 전적으로 동의한 포스티세프의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오직 이 때문이다 : 관료집단은 끔찍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강제력은 일반적으로 소련에서 전혀 인연이 없다 . 그러나 몰로토프나 포스티세프는 이 거역할 수 없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 이들은 자기모순에 가득한 자신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

또한 현실에서 이들은 권력을 거부할 수 없다 . 이 사실을 객관적 언어로 옮기자면 이렇다 : 지금 소련 사회는 국가기구 그리고 제한적인 의미에서 관료집단 없이 운영될 수 없다 .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불쌍한 잔당들 때문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위력 있는 세력과 정치경향들 때문이다 . 강제력의 기구인 국가가 소련에 존재하는 이유는 지금의 이행기 체제가 여전히 사회 모순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 사회 모순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소비 영역에서 대단히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 그리고 이 영역의 모순은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갈 위험이 언제나 있다 . 사회주의의 승리가 최종적이거나 역전될 수 없다고 말할 상황이 전혀 아니다 .

소비재의 결핍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관료집단의 통치 기반이다 . 상점에 물품이 충분히 있으면 구매자는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살 수 있다 . 그러나 물품이 거의 없을 때 구매자는 줄을 서야 한다 . 이 줄이 아주 길면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관이 있어야 한다 . 이것이 소련 관료집단이 누리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 관료집단은 누가 어떤 물품을 가져야 하고 누가 줄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를 " 알고 있다 ."

언뜻 생각하면 , 물질적·문화적 수준이 올라가면 특권 , " 부르주아 법 " 의 적용 , 이 법의 옹호자들인 관료집단 등이 축소되어야 한다 .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 생산력의 발전이 모든 형태의 불평등 , 특권 , 이권 등의 극단적인 발호와 관료주의의 성장을 초래했다 . 그러나 이 현상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

초기에 소련 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보다 훨씬 평등했고 관료주의가 덜 기승을 부렸다 .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빈곤의 평등이었다 . 나라의 자원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대중과 광범위한 특권층이 분리될 수 없었다 . 동시에 임금의 " 평등적 " 성격은 개인의 노동 의욕을 저하시키고 생산력 발전을 저해했다 . 특권을 가능하게 하는 재화의 축적을 위해 소련 경제는 빈곤에서 벗어나 더 높이 성장해야 했다 . 현재의 생산수준으로는 모두에게 모든 생활필수품을 보장할 수 없다 . 그러나 소수에게 상당한 특권을 부여할 정도는 되었고 대중을 자극하기 위해 불평등을 채찍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 경제성장이 소련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보다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훨씬 강화시킨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그리고 다른 이유들이 있다 . 지금 단계에서 자본주의적 임금지불 방식을 강요하는 경제적 요인과 함께 정치적 요인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 그리고 관료집단은 정치적 요인 그 자체이다 . 불평등을 조장하고 옹호하는 것이 관료집단의 핵심 역할이다 . 맨 처음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의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등장했다 .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확립하고 옹호하면서 관료집단은 당연히 자신의 몫을 챙긴다 . 분배할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분배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는 경우는 결코 없다 . 이렇게 사회적 필요에 의해 등장한 집단이 일정 시점을 경과하면 자신의 사회적 역할보다 더 커다란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 전체로부터 독립적 암적 존재가 된다 .

이제 소련판 테르미도르 반동의 사회적 의의가 명료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 대중의 빈곤과 문화적 후진성이 손에 커다란 곤봉을 든 통치자의 흉악한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으나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은 전에는 사회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사회의 주인이 되어 사회와 대중 위에 군림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으로부터 사회적 도덕적 독립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활동과 수입에 대한 어떤 통제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료집단이 " 피라미 , 투기꾼 , 사기꾼 , 수다장이 " 에 대해 의아할 정도로 두려움을 갖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 인구 전체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련 경제는 모든 요소 요소에 사기와 투기 경향을 조성한다 . 한편 새로운 귀족계급이 누리는 특권은 현 체제에 적대적인 " 수다장이들 " 의 말에 대중이 귀기울이게 만든다 . 즉 귓속말로나마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지배층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대중은 관심을 보인다 . 따라서 과거의 유령이나 더 간단히 말해 지난 해에 내려 아직 녹지 않은 눈의 문제가 아니다 . 개인적 축재에 눈먼 강력하고 지속적이며 재생산되는 현재의 세력과 정치경향이 문제이다 . 현재 소련의 미미한 번영의 물결은 이 원심적 경향들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켜 왔다 . 한편 새로운 특권층의 탐욕스런 손에 매질을 가하려는 대중의 욕구가 동시에 성장하였다 . 다시 사회적 갈등은 날카로워지고 있다 . 관료집단이 휘두르는 권력의 원천은 바로 이 상황에 의해 조성되고 있다 . 그러나 이와 똑같은 상황에 의해 관료집단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도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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