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공산주의자
1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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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I 제국주의 시대의 전략과 전술

1. 강령 초안 중심 장(章)의 완전한 파산

코민테른의 강령 초안에는 혁명 전략 문제를 다룬 장이 있다. 그 의도는 매우 올바르고,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국제 강령의 목표와 정신에 부합한다고 인정받아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정착된 혁명 전략 개념은 처음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군사 용어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코 우연히 정착하지 않았다. 전쟁 전에 우리는 노동자당의 전술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런 생각은 일상적 요구와 임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당시의 일반적인 노동조합, 의회주의적 방식에 그만그만할 정도로 들어맞는 것이었다. 전술 개념은 계급투쟁의 각각의 당면 임무나 각 부문에 복무하는 체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혁명 전략은 각 행동의 결합, 일관 성, 성장을 통해 반드시 노동자계급을 권력 장악으로 이끌 통합적인 행동체계를 포함한다.


혁명 전략의 기본적 원칙은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에 기초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임무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에 처음으로 제시한 이래 자연스럽게 정식화되었다. 그렇지만 제1인터내셔널은 이런 원칙들을 정확히 말하면, 이론적으로만 정식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것도 여러 나라의 경험 속에서 부분적으로만 검증할 수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시대는 ‘운동이 전부이며, 궁극적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베른슈타인의 악명 높은 표현을 좇는 방식과 전망으로 지도되었다. 바꿔 말하면, 전략적 임무는 당시의 문제를 다룬 부분적 전술들과 함께 일상적 ‘운동’ 속에서 용해되어 사라져버렸다. 오직 제3인터내셔널만이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 전략을 제대로 복구시켰으며, 전술 체계를 이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제3인터내셔널이 어깨를 기대고 있는 앞선 두 인터내셔널의 매우 귀중한 경험 덕분에, 그리고 현 시대의 혁명적 성격과 10월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 덕분에, 제3인터내셔널의 전략은 곧바로 정력적인 전투성과 가장 광범한 역사적 시야를 획득했다. 동시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10년은 우리에게 위대한 승리뿐만 아니라 1918년부터 시작된 노동자계급의 가장 큰 패배의 파노라마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전략과 전술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코민테른 강령에서 중심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만 실제로 강령 초안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재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 아래 코민테른의 전략과 전술을 다룬 장은 거의 의미도 없는 가장 근거가 박약한 장 가운데 하나다. 동양을 다루고 있는 6장의 한 절은 정말로 단지 이미 저지른 오류를 일반화하고, 새로운 오류에 대한 준비로만 이루어져 있다.

6장을 소개하는 절은 무정부주의, 혁명적 조합주의, 구조적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여기에서는 순전히 《공산당 선언》을 문학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은 당시에 공상적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변종들에 대한 재치 있고 간결한 설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정책을 과학적으로 수립하는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10주년을 맞은 지금, 코르넬리센(Comelissen), 아르투로 라브리올라(Arturo Labriola), 버나드 쇼(Bernard Shaw) 또는 좀 덜 알려진 길드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에 대한 산만하고 무기력한 비판에 착수하는 것은 정치적 요구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문학적인 박식함의 포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류의 마음의 안정은 아마도 강령이 아니라 선전물 분야에서나 적합할 것이다.

그 말의 본래 의미에서, 전략적 문제에 관한 한, 강령 초안은 다음과 같은 초보적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 계급의 대다수에 대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
근로대중 일반의 광범한 부위 에 대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
특히 노동조합을 획득하는 일상적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가장 광범한 부위의 빈농을 획득하는 것 또한(?) 커다란 중요성이 있다 …

그 자체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런 평범한 말들은 여기서 그냥 돌아가며 적시될 뿐이다. 즉, 이 말들은 역사적 시대의 특성과 어떤 관련도 없이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형태로도 별 어려움 없이 제2인터내셔널의 결의문에 끼워 넣을 수 있다. 여기서 강령의 중심 문제는 ‘구조적’ 사회주의와 ‘길드’ 사회주의를 다루는 구절에 비해 훨씬 더 짧은 도식적인 단 한 구절에서 아주 무미건조하고 대수롭지 않게 검토되고 있다. 이것은 혁명적 전복 전략, 무장봉기 그 자체로 가는 조건과 방법, 그리고 권력 장악 一 이 모든 것이 우리 시대의 생생한 경험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현학적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 핀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소비에트공화국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투쟁, 이탈리아의 9월시기, 독일의 1923년 사태, 영국 총파업 등등이 단조로운 연대순 형태로 열거된 것에 지나지 않은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노동자계급의 전략을 다룬 6장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세계혁명 발전의 첫 단계’를 다룬 2장에서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투쟁을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경험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의 표현으로, 객관적 사건으로서만 접근한 것이다. 그 자체로 필요한 혁명적 모험주의(폭동주의)에 대한 거부가 예컨대, 에스토니아의 봉기, 또는 1924년 소피아 대성당 폭격, 또는 최근의 광동(廣東) 봉기 등은 혁명적 모험주의의 영웅적 발현인가, 아니면 거꾸로 노동자계급의 혁명 전략에서 나온 계획된 행동인지 여부에 답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이 강령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폭동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초미의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는 강령 초안은 외교관의 직분에 충실한 것일 뿐, 공산주의 전략에 관계되는 문서가 아니다. 


강령 초안이 노동자계급의 혁명 투쟁 문제를 이렇게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으로 정식화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적극적인 혁명적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대체로 학문적이고, 현학적이며, 설교적으로 다루는 부하린 식의 방법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 쉽게 이해되는 이유 때문에 강령 초안 기초자들은 대체로 지난 5년간의 전략적 교훈들을 너무 중실하게 다루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당연히 혁명적인 행동강령은 이런 아주 중요한 시기에 일어난 모든 사태와 아무 관련도 없는 정언명제들을 모은 것일 뿐인 것이라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강령이 과거의 사태를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령은 이런 사태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이런 사태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하며, 이런 사태를 망라해야 하고, 이런 사태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 위상 때문에 강령은 노동자계급 투쟁의 모든 주요한 사실과 코민테른 내부의 이데올로기 투쟁과 관련한 중요한 사실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강령 전체에 대해서도사실이라면, 특히 전략과 전술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사실일 것 이다. 이 점에서 레닌의 말 속에서 이미 획득한 것 외 에도, 지금까지 놓쳐 왔지만 만약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획득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노동자계급 전위에게는 진부한 문구의 목록이 아니라 행동 교범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전후 시대, 특히 지도부의 비참한 오류로 점철된 최근 5년의 투쟁 경험에 밀착하여 ‘전략’을 다룬 장의 문제들을 검토할 것이다.

 

2. 혁명적 시대의 전략에 고유한 근본적 특성들과 당의 역할

전략과 전술을 다루고 있는 장은 어느 정도 일관되게 제국주의 시대를 전전(戰前) 시대와 대비하여 노동자혁명의 시대라고 ‘전략적’으로 성격 규정하려고도 않는다.

물론 강령 초안 1장에서 산업자본주의 시대 전체를 ‘자본주의가 아직 점령되지 않은 식민지의 분할과 무력 점령을 통해 전 세계에 걸쳐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발전과 확대를 이룬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성격 규정은 분명 매우 모순적이며, 산업자본주의 시대 전체를 명백하게 이상화하는 것이다. 산업자본주의 시대는 거대한 격동의 시대였으며, 지구상에서 앞선 인류 역사 전체를 훨씬 능가하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는 불균등 발전법칙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는 최근 강령 초안 기초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이런 목가적인 성격 규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의 전체 역사를 ‘지속적인 발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1871년부터 1914년까지, 아니 적어도 1905년까지 포함하여 예외적인 유럽의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때는 모순이 체계적으로 누적된 시기였다. 유럽의 내적 계급관계에 관한 한, 합법적 투쟁의 한계를 거의 넘은 적이 없었으며, 국제관계에 관한 한, 무장 평화라는 틀에 순응한 시기였다. 이때는 제2인터내셔널이 태어나고 발전하여 틀을 갖춘 시대였다. 이 제2인터내셔널의 진보적인 역사적 역할은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과 함께 완전히 끝장나버렸다.

거대한 역사적 힘으로 간주되는 정치는 항상 경제에 뒤처진다. 그 한 예로, 금융자본과 트러스트 독점의 지배는 이미 19세기 말 무렵에 시작 되었지만, 이 사실을 반영하는 국제정치의 새로운 시대는 제국주의 전쟁, 10월혁명,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치적 부침의 갑작스런 변화,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이의 끊임없는 발작적 계급투쟁을 포함하는 이 새로운 시대의 폭발적 성격은 국제자본주의 체제가 이미 지쳐버렸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개별 산업 부문이나 개별 국가들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거나, 그것도 정말 기록적인 속도로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발전은 계속해서 다른 산업 부문과 다른 국가들의 성장을 희생시키고 있고, 또 희생시켜야 할 것이다. 세계자본주의 생산체제 때문에 치른 지출은 끊임없이 늘어나면서 세계의 수입을 삼켜버린다. 세계 지배에 익숙한 유럽은 전전(戰前) 시기에 거의 방해받지 않는 빠른 성장으로 관성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역관계, 세계시장의 새로운 분할, 전쟁으로 심화된 모순에 의해 다른 대륙보다 더욱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일원화된’ 시대에서 혁명적 시대로의 이행이 특히 가파른 곳이 바로 유럽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장 강력하고, 유력하며, 지도적인 나라들에서 일반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자본주의는 먼저 국가 간의 장벽뿐만 아니라 계급이라는 엄청난 장벽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또 오랫동안 노동자혁명을 억압해야 할 것이다. 중국을 완전히 노예화하고, 소비에트공화국 등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등등. 우리는 아직 이 모든 것으로부터 훨씬 벗어나 있다. 이론적 예측의 결말은 특히 정치적 가능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연히 많은 부분은 우리에게, 즉 코민테른의 혁명 전략에 달려 있다. 결국, 이 문제는 국제적 세력들의 투쟁 속에서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강령이 작성된 현 시대의 자본주의 발전은 대체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과 모순, 그리고 이에 거세게 부딪치는 발작 상태에 처해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에 혁명적 성격을 부여하고, 혁명에 영구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대의 혁명적 성격은 주어진 모든 경우에 혁명을 성취할, 즉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준다는 것에 있지 않다. 시대의 혁명적 성격은 심각하고 급격한 변동과 갑작스럽고 빈번한 이행에 있다. 즉 혁명적 상황, 바꿔 말하면 예컨대, 공산당이 권력을 얻기 위해 분투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즉시 파시스트나 반(半)파시스트 반(反)혁명의 승리로 이행하고, 여기서 그 직후 다시 지배자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권력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하게 하는 임시 중도체제(‘좌익블록’, 사회민주주의의 연립정부 참여, 맥도널드 당으로의 권력 이동 등등)로 이행한다.

전쟁 이전 최근 몇 십 년 동안에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경제 분야에서는 위기의 ‘정상적인’ 파동과 함께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이 있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아주 보잘것없는 변동과 함께 사회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면서 성장했다. 바꿔 말하면, 경제적, 정치적 모순의 체계적 강화 과정이자,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혁명을 위한 전제조건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전쟁 이후에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경제 분야에서는 생산이 불규칙적이고 발작적으로 감축되고 확대되었다. 특정 산업 부문들에서 커다란 기술적 성과를 거뒀음에도 대체로 전전(戰前)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한 불규칙하고, 발작적인 생산의 단축과 확대가 있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좌익이나 우익 쪽을 향해 미친 듯 널뛴 정세의 동요가 있었다. 1~2년이나 3년 중에 일어나는 정세의 급격한 전환은 기본적인 경제적 요소의 어떤 변화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상부구조적 특성을 지닌 원인과 욕구 때문에 초래되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따라서 이것은 그 토대가 화해할 수 없는 모순들에 의해 침식되고 있는 체제 전체의 극도의 불안정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전술과 대비해 혁명 전략의 틀림없는 중요성이 솟아나오는 유일한 원천이다. 이에 따라 당과 당 지도부의 새로운 의미도 나오는 것이다.

초안은 당에 대해 순전히 형식적인 정의를 말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전위, 마르크스주의 이론, 경험의 구체화 등등). 이런 정의는 전쟁 이전 사회민주주의 좌익의 강령에서 볼 때,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정의는 완전히 부적절하다.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시기에는 최고의 당 지도부조차도 단지 노동자 당의 창당을 촉진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거꾸로 지도부의 오류는 이 과정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노동자혁명의 객관적 전제조건은 단지 서서히 무르익었을 뿐이며, 당 활동은 예비적 성격을 유지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시 왼쪽으로 급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세는 혁명정당에게 그 결정을 맡긴다. 결정적 상황을 놓치면, 상황은 그 반대로 바뀐다. 이런 상황에서 당 지도부의 역할은 각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2~3일이 세계혁명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레닌의 말은 제2인터내셔널 시대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 시대에 이런 말은10월혁명을 제외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자주, 그러나 늘 부정적인 측면에서 확인되었다. 이런 일반적 조건에서만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역학 전체와 관련해 코민테른과 그 지도부가 차지하고 있는 이례적인 지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른바 ‘안정화’의 최초의, 기본적 원인이 한편으로 자본주의 유럽과 식민지 동양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전반적인 혼란,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의 나약함, 준비부족, 우유부단함과 당 지도부의 비난받을 만한 오류 사이의 모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1918~19년이나 최근 몇 년 동안의 혁명적 상황의 발전을 저지한 것은 불쑥 나타나는 이른바 안정화가 아니다. 이에 반해서 이용되지 못한 혁명적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자본가계급에게 안정화의 상대적인 성공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보증했다. ‘안정화’를 위한 이런 투쟁,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생존과 발전을 위한 투쟁의 첨예화하는 모순은 각각의 새로운 단계마다 새로운 국제적, 계급적 격변을 위한 전제조건, 즉 새로운 혁명적 상황과 전적으로 노동자당에 달려 있는 이러한 상황의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완만하고 유기적인 발전의 시기에 주체적 요인의 역할은 상당히 부차적인 것에 그칠 수 있다. 이때 다양한 점진주의의 격언 예컨대, ‘느리지만 확실하게’나 ‘쓸데없는 저항을 해서 다쳐서는 안 된다’ 등등이 등장한다. 이것은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유기적인 시대의 모든 전술적 지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객관적인 전제조건이 무르익자마자, 역사적 과정 전체의 열쇠는 주체적 요인, 즉 당의 손으로 넘어 간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난 시대의 영감에서 활기를 얻는 기회주의는 항상 주체적 요인의 역할, 즉 당과 혁명적 지도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독일의 10월 경험, 영-러위원회, 중국혁명에 대해 토론하는 동안 충분히 드러났다. 중요성이 덜한 다른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경우에서도 기회주의적 경향은 오직 ‘대중’에게만 의지하는 방침을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최고의’ 혁명적 지도력 이라는 문제를 철저히 경멸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총체적으로 잘못된 이러한 태도는 제국주의 시대에 단연코 파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10월혁명은 러시아와 전 세계의 특수한 계급역관계의 결과였으며, 이 특수한 계급역관계는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발전했다. 이런 일반적인 명제는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기본 원칙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사이에는 약간의 모순도 없다 : 레닌이 제때에 러시아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10월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권력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이 있다. 당 수뇌부一덧붙여 말하자면, 이들 대부분이 오늘날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一의 저항은 심지어 레닌의 지도 아래에서도 매우 거셌다. 그런데 레닌이 없었다면 저항은 틀림없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당은 제때에 필요한 방침을 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에는 때로 며칠이 결정적이다. 노동자 대중은 정말 아주 영웅적으로 밑에서부터 위로 압박을 가했지만, 스스로를 확신하며 의식적으로 목표로 이끄는 지도부가 없었다면 승리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자본가계급은 페테르부르크를 독일에 넘겨주고, 노동자 봉기를 진압한 다음, 독일과의 단독 강화나 다른 조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모르긴 몰라도 보나파르트주의로 다시 공고히 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몇 년 동안 사태의 전체 과정은 다른 방향을 취했을 것이다.

1918년 독일혁명에서, 1919년 헝가리혁명에서, 1920년 이탈리아 노동자계급의 9월 운동에서, 1926년 영국 총파업에서, 1927년 빈 봉기에서, 그리고 1925~27년 중국혁명에서 一 이 모든 곳에서 비록 다른 단계에서, 다른 형태일지라도 지난 10년 내내 동일한 정치적 모순이 나타났다. 객관적으로는 혁명적 상황이 무르익었다. 그 사회적 토대뿐만 아니라 종종 대중의 투쟁 분위기와 관련해서도 무르익었다. 그러나 주체적 요인, 즉 혁명적 대중정당이 없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당에 선견지명이나 대담성을 갖춘 지도부가 없었다.

물론 공산당과 그 지도부들의 나약함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유럽의 과거 전체의 산물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혁명적 모순이 지금과 같이 객관적으로 무르익고 있다면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런 발전과정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속화하는 코민테른의 정확한 지도가 있었다면 말이다. 모순이 대체로 진보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라면, 객관적 상황의 전반적인 혁명적 성숙(썰물과 밀물이 있지만)과 노동자계급 국제당의 미성숙 사이의 모순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지금쯤 적어도 코민테른의 유럽 지부를 전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급격한 전환의 시대인 현 시대에 대한 포괄적이고 일반화된 변증법적 이해가 없다면, 미숙한 신생 공산당에 대한 실제적인 교육도, 계급투쟁에 대한 올바른 전략적 지도도, 전술의 올바른 결합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계속되는 일촉즉발의 상황 때마다 기민하고 대담하며 결정적 인 재무장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 해 동안, 때로 국제혁명의 운명을 2~3일이 결정한다면, 바로 이러한 느닷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인 것이다. 

전략과 전술을 다룬 강령 초안의 장은 노동자계급 당의 투쟁 일반에 대해 말한다. 총파업과 무장봉기 일반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러나 현시대의 고유한 성격과 내적인 리듬을 조금도 분석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감지하지’ 못한다면 실제적인 혁명적 지도력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현학적이고, 내용이 없으며, 파탄을 드러내는 것이다.

 

3. 제3차 대회와 레닌과 부하린 각각의 혁명적 과정의 영속성 문제

전후 유럽의 정치적 발전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1921년 3월부터 1923년 10월까지이며, 세 번째 시기는 1923년 10월부터 영국총파업(1926년) 까지 또는 현재(1928년)까지이다.

전후 대중의 혁명적 운동은 자본가계급을 꺼꾸러뜨릴 정도로 강했다. 그렇지만 이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노동자계급의 전통적 조직들에서 지도부를 장악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당시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즉각적인 권력 장악을 기대했을 때, 우리는 혁명정당이 내전의 시련 속에서 빠르게 성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기간이 일치하지 않았다. 봉기의 지도권을 떠맡기 위해 공산당이 사회민주주의와 투쟁하면서 충분히 성장해 성숙해 지기 전에 전후의 혁명적 물결이 빠지기 시작했다.

1921년 3월, 독일공산당은 부르주아 국가를 일격에 꺼꾸러뜨리기 위해 쇠퇴하는 물결을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독일당 중앙위원회를 이끈 생각은 소비에트공화국을 구하는 것이었다(당시에는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아직 선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부의 결단력과 대중의 불만이 승리를 얻기에는 충분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여러 조건들, 무엇보다도 지도부와 대중의 긴밀한 결속과 지도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해야 했다. 당시에는 이런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코민테른 제3차 대회는 첫 번째 시기와 두 번째 시기를 구별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대회는 공산당의 힘이 조직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대회는 일상생활과 일상투쟁에 기초하여 먼저 대중을 획득하고 권력 장악으로 나아간다는 ‘대중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왜냐하면 대중은 혁명적 시기에도, 비록 조금 다른 방식일지라도 일상생활을 계속 영위하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이런 정식화는 제3차 대회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부하린은 이 저항을 이론적으로 부채질했다. 당시 그는 마르크스의 연속혁명이 아니라 자신만의 연속혁명 관점을 고수했다. ‘자본주의가 피폐해졌다. 따라서 중단 없는 혁명적 공세를 통해 승리를 쟁취해야한다.’ 부하린의 입장은 늘 이와 같은 삼단논법으로 정리된다. 

당연히 나는 부하린 판 ‘연속’혁명론을 공유한 적이 없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혁명 과정에서 중단이나 침체기, 후퇴, 이행기 요구 등은 상상 할 수도 없다. 도리어 나는 10월혁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연속혁명의 이런 희화화에 맞서 싸웠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내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제국주의 세계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그 전술적 굴곡이 아니라 큰 전략적 곡선 운동을 염두에 두었다. 반면에, 부하린은 스스로 정반대 입장으로 바꾸기 전에는 늘 연속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현학적으로 희화화하여 설명했다. 부하린은 ‘좌익 공산주의’ 시절에 혁명은 후퇴도 적과의 일시적인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하린의 입장과 내 입장 간에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둘러 싼 논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시 코민테른의 초좌익과 일체가 된 부하린은 독일의 1921년 3월시기 노선을 주창했다. 즉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자극받지’ 않으면, 앞으로 새로운 혁명적 분출이 일어나지 않으면, 소비에트 권력은 확실한 파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이 실제로 소비에트 권력을 위협하고 있다는 의식은 마르크스주의의 연속혁명 개념에 대한 이런 폭동주의적 모방에 맞서 내가 제3차 대회에서 레닌과 서로 협력하여 전개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막지 못했다. 제3차 대회 중에 우리는 조급한 좌익들에게 몇 십 번 이상 이렇게 표명했다 :‘우리를 구하겠다고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자멸하는 길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우리 또한 파멸시킬 것이다. 요컨대, 권력 투쟁에 이르기 위해 대중투쟁의 길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라. 우리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기꺼이 싸우려는 여러분의 의향이 아니라 여러분의 승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소비에트공화국에서 신경제정책(NEP)에 의지하여 스스로 어떻게든 꾸려나갈 것이며, 더욱 전진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힘을 모으고 유리한 상황을 활용해갈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여전히 제때에 우리를 돕게 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이 일이 비록 분파를 금지한 제10차 당 대회 이후에 일어났지만, 레닌은 당시 강력했던 극좌익에 맞서 싸울 새로운 분파의 중핵을 세워내기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우리의 사적인 협의에서 레닌은 제3차 대회가 부하린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그 뒤에 어떠한 투쟁을 수행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단호하게 제기했다. 당시 우리 ‘분파’는 오직 대회 중에 우리 정적들의 상당수가 ‘손을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물론 부하린은 다른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좌익에게 더욱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제3차 대회와 그 뒤에도 그는 유럽의 경제적 위기는 불가피할 것이라는 내 견해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일련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불가피한 위기의 발생이 혁명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혁명 투쟁을 새롭게 자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부하린은 평소대로 현실이 결국 자신이 틀렸음을 아주 뒤늦게나마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을 때까지, 이런 내 견해에 대해 오랫동안 투쟁을 전개했으며, 경제 위기와 혁명 모두에 대해 대체적으로 현학적 영속성을 지닌 자신의 견해를 고수했다.

제3, 4차대회에서 부하린은 혁명적 과정의 영속성에 대한 자신의 기계적 이해에 따라 공동전선과 이행적 요구 정책에 맞서 싸웠다.

이런 두 경향, 즉 노동자혁명의 연속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종합적 개념과 결코 부하린의 개인적 기벽이 아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현학적 모방 사이의 투쟁은 크고 작은 일련의 다른 문제들을 통해서도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그래봐야 쓸데없다. 오늘날 부하린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연속혁명’에 대한 극좌적 현학주의와 똑같은 것이다. 단지 이번에 방향을 바꿨을 뿐이다. 예컨대, 만약 부하린이 유럽에서 항구적인 경제위기와 항구적인 내전이 없다면 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할 것이라고 1923년까지 생각했다면, 그는 오늘날 국제혁명이 전혀 없어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비책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부하린 식의 전도된 영속성은 코민테른의 현재 지도자들이 너무도 자주 과거 자신들의 모험주의를 현재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입장에 접목시키거나 그 반대로 한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제3차 대회는 큰 지침이 되었다. 그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익하다. 제4차 대회는 이런 가르침을 구체화시 켰을 뿐이다. 제3차 대회의 슬로건은 단지 ‘대중 속으로!’가 아니라 ‘먼저 대중을 획득하고 권력 장악으로!’라고 해석해야 한다. 레닌이 이끈 분파(그는 이 분파를 ‘우파’라고 노골적으로 규정했다)가 대회 기간 전체에 걸쳐 비타협적으로 통제해야 했기 때문에, 레닌은 대회 끝 무렵에 비공식 회의를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예언적으로 이렇게 경고했다 :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혁명적 도약을 위해 충분한 도움닫기를 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대중을 획득하는 투쟁은 권력을 획득하는 투쟁입니다.’ 

1923년 사태는 ‘지도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지도자들도 이런 레닌주의 입장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 1923년의 독일 사태와 10월의 교훈

1923년의 독일 사태는 코민테른의 발전에서 새로운 레닌주의의 후기를 개막하는 구분점이 된다. 1923년 초, 프랑스군대의 루르 점령은 유럽이 다시 전쟁의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이 질병의 두 번째 발작이 첫 번째에 비교도 안 될 만큼 약했지만, 시작부터 극단적인 혁명적 결과가 예견되었다. 왜냐하면 이 질병이 이미 완전히 쇠약해진 독일이라는 유기체를 덮쳤기 때문이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제때에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독일공산당은 여전히 폭동주의에 이를 우려가 있는 길로부터 단호하게 빠져나온 제3차 대회의 슬로건을 계속해서 일면적으로 해석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급격한 전환의 시대에 혁명적 지도부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뜻밖의 사고를 감지하고 제때에 키를 돌리기 위해 적절한 순간에 정세의 맥을 짚을 수 있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혁명적 지도부의 이러한 자질은 단지 코민테른의 최근 회람장에 충성을 맹세한다고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필요한 이론적 전제조건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자질은 개인적으로 습득한 경험과 진정한 자기비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1921년 3월시기의 전술로부터 신문, 모임, 노동조합, 의회에서 조직적인 혁명적 활동으로 급격한 전환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전환의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정반대 성격의 일면적 편향이 다시 성장하는 위험이 나타났다. 대중을 획득하는 일상투쟁이 모든 주의력을 빼앗고, 자신의 전술적 관행을 만들어냈으며, 객관적 상황 변화에서 나오는 전략적 임무들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려버렸다.

1923년 여름, 독일의 국내 상황은 특히 소극적 저항 전술의 좌절과 관련하여 파국적 성격을 띠었다. 공산당이 자본가계급의 처지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제때에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만, 공산당이 필요한 모든 혁명적 결론을 끌어내지 못할 경우에만 독일 자본가계급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명백해졌다. 그러나 자기 손에 쥐어 있는 열쇠를 자본가계급이 사용하도록 기회를 준 것은 바로 공산당이었다.

독일혁명은 왜 승리에 이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현존하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전술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놓친 혁명적 상황의 전형적 본보기였다. 요컨대, 독일 노동자계급은 최근에 이번에는 문제가 결정적으로 해결될 것이며, 공산당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있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을 경우에만 단호한 투쟁을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아주 오랫동안 지체한 끝에, 그것도 대단히 우유부단하게 방향을 전환했다. 서로 아주 격렬하게 싸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도, 1923년 9~10월까지 혁명의 발전과정을 다소 운명론적으로 바라보았다.

혁명가가 아닌 공론가만이 사태가 끝난 지금, 올바른 정책이 있었다면 권력 장악을 어느 정도까지 ‘확신했을’ 것인지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점과 관계가 있는 〈프라브다〉지의 주목할 만한 증거를 인용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이런 증거는 이 기관지의 다른 모든 발표문과 모순되기 때문에 순전히 우발적이고 특이한 것이다.

중간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이 민족주의자로 전향했기 때문에, 당이 심각한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중대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1924년 5월에 징후가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자본가계급이 어느 정도 정비되었다면, 이런데도 공산주의자들이 370만 표를 규합할 수 있었다면, 이는 분명 1923년 10월에, 즉 전례 없는 경제적 위기, 중간계급의 완전한 분해, 자본가계급 자체 내의 강력하고 날카로운 모순과 산업 중심지 노동자대중의 전례 없는 전투적 분위기에서 비롯하는 사회민주주의 대오 내의 끔찍한 혼란 중에 공산당이 인구 대다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싸울 수 있었고 싸웠어야 했으며, 성공할 모든 기회를 갖고 있었다. (〈프라브다〉지, 1924년 5월 25일자)

그리고 이것은 제5차 세계대회에 참석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독일 대의원의 말이다.

독일에는 당이 전투에 참가했어야 하고, 이를 피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계급의식 있는 노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독일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당의 독자적 역할에 대해 깡그리 잊어버렸다. 이는 10월 패배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1923년, 특히 이 해 후반 중에 독일당 상층 지도부와 코민테른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토론에는 이미 많은 것이 설명되어 있다. 비록 대부분의 말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 대단히 어긋났지만 말이다. 특히 쿠지넨 (Kimsinen)은 이런 문제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 쿠지넨은 1926년 어느 날부터 지노비예프의 지도가 파멸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열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1924년부터 1926년까지는 지노비예프의 지도력에만 구제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이러한 책임 있는 판단을 퍼뜨리기 위해 필요한 권한이 어쩌면 1918년에 그 스스로 핀란드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파멸시키기 위해 자신의 온건한 방책들을 모두 동원한 사실 때문에 쿠지넨에게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사태 뒤에, 내가 브란틀러 노선과 일치하는 속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소련에서는 이런 시도가 감춰졌는데, 현장에 있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독일에서는 이런 시도가 공공연했다. 이런 실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우연히, 나는 내 소지품에서 독일혁명 문제에 대해 당시 우리 중앙위원회에서 일어난 이데올로기 투쟁에 관계된 인쇄물 일부를 발견했다. 1924년 1월 협의회의 문서에서 정치국은 내가 독일공산당이 항복하기 이전 시기에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대해 적대적이고 불신하는 태도를 취했다면서 정면으로 비난했다. 이 문서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 중앙위원회(1923년 9월의 전원회의) 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트로츠키 동지는 중앙위원 전원이 크게 동요한 연설을 했다. 그는 독일공산당 지도부가 쓸모없으며,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체념, 몽롱함 등으로 물들어 있다고 단언했다. 곧이어, 트로츠키 동지는 독일혁명은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연설은 참석자 모두를 침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동지들은 이 격렬한 공격적 연설이 한 에피소드(?!) 때문에 야기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중에 일어난 독일혁명과는 전혀 무관하며, 이 연설은 객관적인 실정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1924년 1월, 소련공산 당 협의회 문서, 14쪽, 트로츠키의 강조)

중앙위원들이 내 경고를 어떻게 설명하려고 애쓰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첫 번째 경고도 아니었으며, 나는 오직 독일혁명의 운명에 대한 우려에서만 말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사태는 내 입장을 충분히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들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지도 정당의 중앙위원회 대다수가 내 경고가 충분히 ‘객관적 사태에 부합했다’는 것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브란틀러의 중앙위원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고(결정적 사태 직전에 이러한 변화는 가장 완전한 모험주의였을 것이다) 경솔하게 제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1923년 여름부터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독일 중앙위원회를 지지하는 세력 결집의 필요성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시기적절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독일 중앙위원회의 오류는 단지 코민테른 지도부의 전반적 오류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 브란틀러주의 중앙위원회의 노선과 일치한다고 뒤집어씌우려는 훗날의 시도는 주로 독일당의 항복 이후, 내가 브란틀러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에 반대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왔다. 비록,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독일의 패배를 중앙위원회 대다수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나왔다. 다른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서도, 나는 지부 지도부를 주기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즉 무지막지한 박해를 겪게 하거나, 심지어 당에서 제명함으로써, 단지 중앙 지도부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려는 것일 뿐인 용납할 수 없는 방식에 대항해 싸웠다.

독일 중앙위원회의 항복이 주는 영향 때문에 쓴 〈10월의 교훈〉에서 나는 현재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는 몇 년 만에 맞은 혁명적 상황도 며칠 사이에 놓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개진했다.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이 견해는 ‘
블랑키주의’이자 ‘개인주의’라고 낙인찍혔다. 〈10월의 교훈〉에 반대하여 쓰인 수많은 글들은 10월혁명의 경험이 얼마나 철저히 잊혔는지, 그 교훈이 얼마나 불철저하게 의식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지도자들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대중’에게 전가하거나, 결과적으로 그 죄를 줄이기 위해 지도부 일반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는 전형적인 멘셰비키주의자의 속임수다. 이것은 ‘상층’ 일반, 즉 계급의 상층인 당, 따라서 그 중앙 지도부로서의 당의 상층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에 이를 수 없는 완전한 무능력에서 비롯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조차 역사의 발전을 한 치도 밀고 나갈 수 없는 시대가 있다. 또 훨씬 변변찮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적인 지위에 서서 몇 년 동안 국제혁명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는 다른 시대도 있다. 

마치 내가 〈10월의 교훈〉을 부정한 것처럼 사태를 묘사한 최근의 기도는 아주 터무니없다. 물론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한 가지 ‘실수’를 ‘인정’했다. 〈10월의 교훈〉을 썼을 때인 1924년 여름에 내게는 스탈린이 1923년 가을의 지노비예프보다 더 좌익(즉, 좌익 중도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수파의 비밀 중앙기구 역할을 한 그룹의 내부 사정에 그다지 정통하지 않았다. 이 파벌 그룹의 분열 이후 공표된 문서, 특히 스탈린이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에게 보낸 순전히 브란틀러주의적인 편지를 보고, 이런 사적인 그룹들에 대한 나의 부정확한 평가를 수긍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는 제기된 문제의 본질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물비평에 대한 이런 오류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노비예프의 ‘진화’가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처럼, 중도주의는 큰 갈지자를 그리며 분명히 좌익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이다. 그러나 체계도 없이 혁명적 방침을 수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10월의 교훈〉에서 내가 개진한 생각은 오늘날에도 충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런 생각은 1924년 이후 계속해서 확인되었다.

노동자혁명의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에는 특수하고 구체적이며 분명한 어려움이 있다. 이 어려움은 사태의 급격한 전환 중에 혁명정당 지도부의 처지와 임무에서 기인한다. 가장 혁명적인 정당도 사태 발전에 뒤처져 과거의 슬로건과 투쟁방법들을 새로운 임무와 새로운 요구에 대치시킬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의 필요성을 빚어내는 것보다 더 급격한 사태의 전환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당 지도부와 당 전체의 정책이 계급의 행동과 상황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할 위험이 발생한다. 상대적으로 침체된 정치생활 중에는 이런 불일치가 비록 손실은 있더라도 큰 불행 없이 치유된다. 그러나 심각한 혁명적 위기 상황에서 이런 불일치를 없애고, 이를테면 공격받는 전선을 구제하는 데 부족한 것이 바로 시간이다. 혁명적 위기가 최대한으로 격화되는 시기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다. 객관적 임무와 혁명 지도부 사이의 불일치(망설임, 동요, 자본가계급의 격렬한 공격에 직면하여 일시적으로 쓰는 미봉책)는 몇 주나 심지어 며칠 만에 파국에 이르게 하고, 준비하는 데 몇 년이 걸린 일을 수포로 돌릴 수 있다. 

물론 지도부와 당의 불일치 또는 당과 계급의 불일치는 반대 성격을 지닌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지도부가 혁명의 발전을 앞질러 임신 5개월을 9개월로 헷갈려하는 경우다. 이러한 불일치의 가장 명백한 사례는 1921년 3월 독일에서 목격되었다. 독일당에는 ‘좌익주의라는 소아병’이 비정상적으로 퍼져 있었으며, 그 결과는 폭동주의(혁명적 모험주의)였다. 이런 위험은 앞으로도 적잖이 실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민테른 제3차 대회의 교문이 그 충분한 효력을 계속 지니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1923년 독일의 경험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정반대의 위험을 우리 앞에 제기했다 : 상황이 무르익었는데도 지도부는 뒤처져 있다. 지도부가 상황 적응에 성공할 때쯤이면, 상황은 이미 바뀌어, 대중은 후퇴하고, 세력관계는 급격히 악화된다.

물론 1923년 독일의 패배에는 여러 가지 일국적 특수성이 있었지만, 일반적 위험을 보여주는 완전히 전형적인 특징들도 있었다. 이 위험은 무장봉기로 이행하기 직전의 혁명 지도부의 위기라고 부를 수도 있다. 노동자당의 평당원들은 본래 부르주아 여론의 압력에 훨씬 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당 상층부와 중간층의 일정 부위는 결정적 순간에 자본가 계급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테러에 크든 작든 틀림없이 굴복할 것이다. 이 위험을 망각하는 것은 위험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위험에 대비하여 모든 경우에 타당한 만병통치약은 없다. 그러나 위험에 맞서 싸우는 데서 필요한 첫 번째 조치는 위험의 근원과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다. ‘10월 이전’ 시기에 모든 공산당에서 우익 그룹의 출현이나 발달이 불가피한 것은 한편으로 이 ‘도약’에 내재하는 거대한 객관적 어려움과 위험들을 반영하며,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여론의 거센 압력을 반영한다. 이 속에 우익 그룹 형성의 요점과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장 위태로운 바로 그때 공산당에서 불가피하게 우유부단과 동요가 발생하는 이유다. 1917년에 우리 당에서는 상층의 소수만이 동요했으며, 레닌의 엄격한 지도력 덕분에 이 동요를 극복했다. 독일에서는 지도부 전체가 동요했으며, 이 우유부단이 당으로 전해졌으며, 당을 통해 계급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때문에 혁명적 상황이 유실되었다. 노동자와 빈농이 권력 장악을 위해 투쟁하고 있던 중국에서는중앙 지도부가 이 투쟁에 반대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 나타난 지도부 위기의 마지막 사례는 아니다. 이런 불가피한 위기를 최소로 줄이는 것이 각 공산당과 코민테른 전체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임무는 1923년 독일당의 경험과 대조를 이루는 1917년 10월의 경험과 당시 우리 당내 우익반대파의 정치적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10월의 교훈〉의 요점이 있다.


5. 제5차 대회의 기본적인 전략적 오류

우리는 1923년 가을에 범한 ‘템포상의 오류’라는 주제에 대해 1923년 말부터 시작된 코민테른 지도자들의 고백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일련의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어김없이 마르크스를 언급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마르크스도 자신의 시대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은 코민테른의 ‘템포상의 오류’가 권력을 장악할 결정적 순간에 근접했는지를 과소평가하는지, 아니면 거꾸로 과대평가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고의적인 침묵으로 무시했다. 이 문제는 최근에 지도부의 전통이 된 복식부기 제도에 따라, 전자나 후자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한 빈 칸으로 남겨졌다.

그렇지만 이 시기 중에 코민테른의 정책 전체로부터 1924년 전부와 1925년 대부분동안 코민테른 지도부가 독일 위기의 중대한 시점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를 고수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전망에 따라 마르크스도 때때로 임박한 혁명이 실제보다 더 가까이에 와 있다고 파악했지만, 그는 혁명에 직면했을 때 혁명의 특징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따라서 혁명이 이미 뒤로 돌아선 뒤에, 혁명의 후면을 정면이라고 억지를 부린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공산당 제13차 협의회에서 지노비예프는 ‘템포상의 오류’에 대한 애매모호한 정식을 유포시키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여러분들에게 비슷한 사태가 반복된다면, 그와 똑같은 상황에서는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프라브다>지, 1924년 1월 25일자)

이 약속은 협박 티가 났다. 

1924년 2월 20일에 지노비예프는 국제적색원조협회 회의에서 유럽 전체의 상황이 이렇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아무리 짧더라도 현 시기에 대해 외면적인 평화의 회복이나 어떤 소강상태라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 유럽은 사태의 결정적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 독일은 분명히 첨예한 내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2일자)

1924년 2월 초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의는 독일 사태의 교훈에 대한 결의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공산당은 안건에서 봉기와 권력 장악 문제를 삭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 문제는 그 구체성과 긴급성 모두에서 우리 앞에 놓여 있음에 틀림없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7일자)

1924년 3월 26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독일공산당에 이렇게 말했다.

1923년 10월에 사태의 템포를 평가하는 데서 범한 오류[어떤 종류의 오류인가?―트로츠키]는 당에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기본적인 평가는 예전 그대로다. (〈프라브다〉지, 1924년 4월 20일자, 트로츠키의 강조)

이 모든 것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

독일공산당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노동자계급을 무장시키는 활동에 온 힘을 다해야한다. …(〈프라브다〉지, 1924년 4월 19일자)

1923년의 커다란 역사적 비극―중요한 혁명의 진지를 싸움 한 번 없이 넘겨준―은 6개월 뒤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평가되었다.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라니! 유럽은 지금까지도 이 ‘에피소드’의 가장 심각한 결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코민테른의 각 당에서 차례로 좌익이 궤멸된 사실과 마찬가지로, 코민테른이 소집해야 할 대회를 4년 동안 소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똑같이 이 1923년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제5차 대회는 독일 노동자계급이 패배하고 나서 8개월 뒤 열렸다. 이 때는 이 파멸의 모든 결과가 이미 명백해진 뒤였다. 이 점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알아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5차 대회의 기본 임무는 첫째로, 이 패배를 분명하고 준엄하게 그 이름대로 부르고, 누구도 객관적 조건이라는 핑계 뒤에 숨지 못하게 하면서 패배의 ‘주체적’ 원인을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었다. 둘째로, 대중이 일시적으로 표류하고, 사회민주주의가 성장하여, 공산당이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을 때를 새로운 단계의 시작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코민테른이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모든 것에 대비하고, 상황의 새로운 변화가 올 때까지 필요한 방어투쟁의 방식과 조직적 통일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서 대회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지노비예프는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독일 사태의 의미를 규정했다 : ‘우리는 독일혁명을 기대했지만,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2일자)

그렇지만 실제로 혁명은 ‘나는 왔는데, 신사 여러분께서 회합 장소에 너무 늦게 왔소’라고 답할 권리가 있었다.

대회의 지도자들은 브란틀러와 함께 우리가 상황을 ‘과대평가’했다고 판단했는데,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경솔하게, 그것도 너무 늦게 평가 했다. 지노비예프는 자신의 이런 소위 ‘과대평가’에 너무 쉽게 만족해했다. 그는 주요한 악이 다른 곳에 있다고 보았다.

‘상황을 과대평가한 것이 최악은 아니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작센(Saxony)의 사례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 당 대오에 아직도 많은 사회민주주의적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지노비예프는 파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와 함께 제5차 대회 전체가 이 세계혁명의 가장 중대한 패배를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독일 사태는 주로 작센 주의회(Landtag)에서 … 공산주의자들의 정책이라는 견지에서 분석되었다. 결의문에서 대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를 칭송했다 : ‘… 독일 중앙위원회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센 주정부라는 실험 중에 공동전선 전술을 왜곡한 행동을 비난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9일자) 

이것은 ‘무엇보다도’ 희생자의 집에 들어가면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자를 비난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지노비예프는 ‘작센의 경험은 새로운 상황을 조성했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전술을 청산하기 시작할 위험을 수반했다’고 주장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작센의 경험’이 비난받았으며, 브란틀러가 실각했기 때문에, 다음 의사일정으로 넘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달리 검토할 것이 전혀 없었다.

지노비예프는 대회의 지지를 받아 이렇게 말했다 : ‘일반적인 정치적 전망은 본질적으로 예전 그대로다. 상황은 혁명을 잉태하고 있다. 이미 새로운 계급투쟁이 다시 전개되고 있다. 거대한 투쟁이 발전하고 있다. …’ 등등. (〈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4일자) 

작은 일에 구애되어 큰일을 소홀히 하는 ‘좌익주의’는 정말로 천박하며 신뢰할 수 없다.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며, 10월 패배의 의미를 두드러지게 강조한 사람들, 불가피하게 뒤따를 장기간에 걸친 혁명적 쇠퇴기와 (그에 뒤이어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결과와 함께) 자본주의의 일시적 강화(‘안정’)를 지적한 사람들을 제5차 대회 지도부는 기회주의자들이며, 혁명을 청산하는 자들로 낙인찍으려고 애썼다.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은 이것을 자신들의 주요한 임무로 설정했다. 이들과 함께 전년도의 패배를 과소평가한 루트 피셔(Ruth Fischer)는 러시아 반대파가 ‘세계혁명의 전망을 상실하고, 독일과 유럽혁명이 가까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며, 절망적인 비관주의에 빠져 유럽혁명이 파산한 것으로 생각한다, 등’으로 이해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5일자) 

패배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청산주의자들’, 즉, 패배를 승리라고 부르기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 가장 큰 소리로 악 쓰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 한 예로, 콜라로프(Kolarov)는 불가리아당의 패배를 낯 두껍게도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라데크(Radek)를 격렬히 비난했다.

‘당의 패배는 6월에도 9월에도 결정적이지 않았다. 불가리아공산당은 굳건하며,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제5차 대회에서 콜라로프 동지가 한 발언) 

패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대신에 도처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무책임한 관료적 허장성세가 판치고 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전략은 잘난 체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콜라로프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제5차 세계대회의 임무 대부분은 올바르고 필요한 것이었다. 머리를 쳐들려고 했던 우익적 경향에 대한 투쟁이 정말로 긴급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상황에 대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평가 때문에 주제에서 벗어났고, 갈팡질팡했으며, 왜곡되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뒤범벅되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사태를 더 분명하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우익 진영으로 분류되었다. 만약당시 좌익이 제3차 대회에서 승리했다면, 동일한 근거에서 레닌은 레비(Levi),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우익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제5차 대회의 잘못된 정치적 태도 때문에 발생한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그에 뒤이은 새로운 거대한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대회가 정치 분야에서 채택한 평가는 마찬가지로 철저히 경제 영역에까지 미쳤다. 이미 나타난 독일 자본가계급의 경제적 통합 조짐이 인정되지 않거나 무시되지는 않았다. 항상 최신의 지배적인 정치적 경향과 일치하는 경제적 사실을 그럴 듯하게 늘어놓는 바르가(Varga)는 이때도 다음과 같은 보고를 제출했다 : ‘… 자본주의가 회복될 가망은 전혀 없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8일자)

그러나 1년 뒤, ‘회복’에 뒤늦게 ‘안정’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기 때문에, 바르가는 전개된 사태를 고생스럽게 뒤쫓았다. 이때쯤에 반대파는 이미 안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반대파는 대담하게도 1년 반 전에 안정의 시작을 입증한 반면에, 1925 년에는 이미 이 안정을 악화시키는 경향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영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제5차 대회는 자신이 잘못된 태도라는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대로 정치적 과정과 이데올로기적 배치를 파악했다. 이것은 또한 러시아 반대파를 ‘소부르주아적 일탈’로 분류하는 결의문을 낳았다. 역사는 이 오류를 제5차 대회의 주임검사인 지노비예프가 2년 뒤에 1923년 반대파의 중핵이 논쟁 중인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옳았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로잡았다.

제5차 대회의 기본적인 전략적 오류로부터 부득이하게 독일과 국제사회민주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인식 부족도 생겼다. 대회에서는 오직 사회민주주의의 쇠퇴, 분해, 붕괴에 대한 연설만 있었다. 지노비예프는 독일공산당이 370만 표를 얻은 최근 제국의회 선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독일의 의회 분야에서 사회민주주의자 100명에 공산주의자 62명의 비율을 가진다면, 이것은 대다수의 독일 노동자계급 획득에 우리가 얼마나 접근해 있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2일자) 

지노비예프는 과정의 역학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1924년과 1925년 동안 독일공산당의 영향은 커진 것이 아니라 약해졌다. 370만 표는 단지 1923년 말 무렵에 당이 독일 노동자계급의 대다수에 끼쳤던 결정적인 영향력의 인상적인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이 숫자는 틀림없이 그 다음 선거에서 줄어들 것이다. 

한편, 1923년에 짚으로 만든 썩은 거적처럼 결딴난 사회민주주의는 1923년 말에 혁명이 패배한 뒤 조직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벌떡 일어나 주로 공산주의를 희생시키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를 예견했기 때문에―어떻게 이를 예견하지 못할 수 있는가?―우리의 예측은 우리의 ‘비관주의’ 탓으로 돌려졌다. 1928년 5월에 치른 최근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900만 표를 넘게 얻었다. 이런데도 1924년 초에 틀림없이 일정 기간 동안 불가피하게 사회민주주의의 부활이 뒤따를 것이라고 쓰고 말했던 우리가 옳았던 반면에, 이미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진혼곡을 노래한 ‘낙관주의자들’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직도 필요한가? 무엇보다도 코민테른 제5차 대회가 크게 잘못되었다.

물론 비실거리는 노쇠화의 특성을 전부 보이고 있기에 사회민주주의의 제2의 청춘은 오래 가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의 사망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얼마나 갈 것인지는 정해진 곳이 어디에도 없다. 이 또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를 더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며, 정세의 전환점을 제때에 알아볼 수 있어야하며, 패배를 패배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며, 앞을 내다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여전히 수백만 세력을 대표한다면, 그것도 노동자계급 안에서라면, 여기에는 두 가지 직접적 원인이 있다. 첫째는 1923년 가을에 항복한 독일당의 패배이며, 둘째는 제5차 대회의 잘못된 전략적 상황 판단이다.

1924년 1월에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유권자들의 비율은 거의 2대 3이었다. 그러나 4개월 뒤, 이 비율은 1대 3을 약간 넘는 정도로 형편없이 떨어졌다. 바꿔 말하면,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기간 중에 우리는 노동자 계급의 대다수 획득에 더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멀어진 것이다. 따라서 지난해에 우리 당이 강화된 것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이것은 올바른 정책으로 대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제5차 대회가 채택한 입장의 정치적 결과를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전체의 기본적 곡선과 그 개별적 부분, 즉 철도의 곡면이 기관사에게 중요한 것처럼, 모든 주어진 순간에 당 지도부에게 똑같이 중요한 개별적 부분 모두를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볼셰비키 전략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명백하지 않은가? 가파르게 경사진 곡면에서 조절판을 크게 열면 기차는 틀림없이 제방 너머로 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전에야 〈프라브다〉지는 우리가 이미 1923년 말에 내린 평가의 올바름을 어느 정도 명백하게 인정해야 했다. 1928년 1월 28일자 〈프라브다〉지는 이렇게 말했다.

‘1923년의 패배 이후 시작되어, 독일 자본에게 그 지위를 강화할 수 있게 해준 일정한[!] 무관심과 침체 국면이 지나기 시작하고 있다.’ 

1923년 가을에 시작된 ‘일정한’ 침체가 1928년에야 처음으로 지나기 시작하고 있다. 4년간의 지체 뒤에 발표된 이런 언질은 제5차 대회에서 정해진 잘못된 방침, 그리고 저지른 실수를 털어놓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혼란의 범위를 확대하는 지도부의 방식 모두에 대한 가차 없는 비난이다.

1923년의 사태나 제5차 대회의 기본적 오류를 평가하지 않고 넘어가는 강령 초안은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자계급 혁명 전략의 실질적 문제들에 간단히 등을 돌린다
.


6. ‘민주적 평화주의 시대‘와 파시즘

1923년 가을, 독일 공산주의의 항복은 최소한의 내전으로 위협적인 노동자의 위험을 제거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공산당뿐만 아니라 파시즘의 입장도 약화시켰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이 승리를 거둔 내전조차도 자본가의 착취 조건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 당시, 즉 1923년 말에 우리는 독일 파시즘의 힘과 위험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맞서 싸웠다. 우리는 전 유럽의 정치 무대가 프랑스의 좌익블록, 영국의 노동당 등 일정 기간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그룹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동안, 파시즘은 무대 뒤로 밀려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 그룹의 세력 보강이 이번에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성장을 위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이런 불가피한 과정을 이해하고, 이에 맞서 새로운 전선을 따라 투쟁을 조직하는 대신에 공식 지도부는 계속해서 파시즘을 사회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임박한 내전에서 이들의 동반몰락을 예단했다.

미국과 유럽 사이의 상호관계 문제는 파시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오직 1923년 독일혁명의 패배만이 미국 자본에게 (일시적으로) 유럽을 ‘평화적으로’ 종속시키려는 미국의 계획 실현에 착수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문제는 최고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제5차 대회의 지도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이것은 장기간에 걸친 유럽혁명의 지연이 국제관계의 축을 유럽에 대한 미국의 공세 쪽으로 즉시 바꾸게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유럽의 내부 상황에서 전적으로 유래했다. 이 공세는 유럽의 경제적 ‘강화’, 그 정상화와 평온화, 그리고 민주주의 원칙의 ‘회복’이라는 외양을 취했다. 몰락한 소부르주아 계급뿐만 아니라 보통의 노동자도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니까, 그럼 아마도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승리는 아니지만(누구도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다) 미국 금의 도움으로 산업을 부활시켜 빵 한 조각이라도 가져다줄 것이다. 달러를 안감으로 댄 미국 평화주의의 졸렬한 거짓말―독일혁명의 패배 뒤에―은 유럽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고, 또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뿐만 아니라 프랑스급진당과 영국노동당도 상당 정도 이 기운 덕분에 다시 일어섰다.

이런 새로운 대적 전선의 효과가 상쇄될수록, 부르주아 유럽은 단지 미국의 재정적 종속자로서만 살며, 스스로를 건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미국의 평화주의는 허기진 유럽을 할당 배급받게 하려는 시도와 같다는 점을 지적해야 했다. 바로 이 관점을 미국주의라는 새로운 종교를 가진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투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에, 코민테른 지도부는 자신의 포화를 정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이들은 전쟁이나 혁명도 없이 미국의 배급량으로 평가되는 정상화된 제국주의라는 어리석은 이론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었다.

무장봉기가 독일당의 일정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시급하게 올랐다’고 선언한 바로 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의―제5차 대회 4개월 전―2월 회기 중에 당시 ‘좌익적’ 의회 선거를 앞두고 있던 프랑스의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도 제출되었다.

이 선거 직전의 흥분도 단지 가장 하찮고 가장 미약한 당, 그리고 생명력 없는 정치 그룹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사회당은 다가오는 선거의 서광을 받고 자극되었으며,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7일자)

프랑스에서 광범위한 노동자 부위를 들뜨게 하고, 노동자계급의 당과 자본의 파시스트 분견대 모두를 약화시키면서 소부르주아 평화주의적 좌익주의의 물결이 아주 명백하게 상승한 시기, 요컨대, ‘좌익블록’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 지도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나아갔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평화주의적 국면이 전개될 가능성을 딱 잘라 부정했다. 또한 1924년 5월 선거 직전에 소부르주아 평화주의의 좌익 기수(旗手)인 프랑스사회당에 대해 이미 ‘생명력 없는 정치 그룹’이라고 평했다. 당시 우리는 소련공산당 대표단 앞으로 보낸 특별 편지에서 사회 애국주의 정당에 대한 이런 경솔한 평가에 항의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런 사실들에 대한 자신의 무시를 ‘좌익주의’로 생각한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에 그랬던 것과 마찬 가지로, 코민테른의 당들을 대단히 혼란시킨 민주적 평화주의에 대한 왜곡되고 추잡한 논쟁이 일어났다. 반대파의 대변인들은 평화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단지 이들이 코민테른 지도부의 편견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독일 노동자계급이 투쟁 한 번 없이 당한 패배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잠시 강화시킨 뒤) 필연적으로 소부르주아 정당들을 전면에 떠오르게 할 것이며, 사회민주주의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제때에 예견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노동당과 프랑스의 좌익블록이 승리하기 3~4개월 전에 국제 적색원조협회 회의에서 지노비예프가 내게 대항하는 노골적인 논쟁을 통해 이렇게 선언한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실질적으로 전 유럽의 상황은 아무리 짧더라도 우리가 현 시기에 대해 외면적인 평화주의나 어떤 소강상태라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 유럽은 사태의 결정적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 독일은 분명히 격렬한 내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프라브다〉지, 1924년 2월 2일자)

지난 1922년 제4차 대회에서 나는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의 꽤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회 결의문에 대한 수정안(상당히 수정되었지만 사실이다)을 위원회에 제출하는데 성공했는데, 지노비예프는 어느 모로 보나 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 수정안은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가 임박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계속적인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적 쇠퇴가 충분히 가능한 단계이자, 공산주의 또는 파시즘의 지배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평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좌익’ 정부가 등장한 뒤에 열린 제5차 대회에서 나의 이 수정안을―아주 적절하게―생각해낸 지노비예프는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선언했다.

현 시기의 국제정세는 파시즘, 계엄령, 노동자계급에 대해 증대하고 있는 백색테러의 물결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가까운 장래에 자본가계급의 공공연한 반동이 가장 중요한 나라들에서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로 대체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지노비예프는 만족스럽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것은 1922년에 주장되었다, 따라서 1년 반 전에 코민테른은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를 확실히 예견했다.(〈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2일자)

사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평화주의적’ 일탈이라고(역사발전 과정의 일탈이 아니라 나의 일탈이라고) 비난받아온 내 예측은 맥도널드(MacDonald)와 에리오(Herriot) 내각의 몇 주 동안의 밀월기에 열린 제5차 대회에서 대단히 편리하게 쓰였다. 불행히도 이것은 일반적으로 예측된 상황이었다.

우리는 지노비예프와 제5차 대회의 다수파가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라는 낡은 전망을 쇠퇴중인 자본주의의 한 단계라고 너무 글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그래서 지노비예프는 제5차 대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는 자본주의 쇠퇴의 징조이다.’

게다가 그는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주장했다 : ‘나는 바로 민주적 평화주의의 시대가 [자본주의의] 쇠퇴와 치유할 수 없는 위기의 징후라는 것을 거듭해서 말한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1일자) 

루르 위기가 없었고, 만약 사태 전개가 이러한 역사적 ‘비약’ 없이 더 부드럽게 진행되었다면, 이것이 옳았을 것이다. 독일 노동자계급이 1923년에 승리를 거뒀다면, 이것이 이중 삼중으로 옳았을 것이다. 이 경우에 맥도널드와 에리오 체제는 단지 영국과 프랑스의 ‘케렌스키 시기’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르 위기가 발생하여 누가 집주인이 될 것인가 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독일 노동자계급은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것도 분명히 독일 자본가계급을 최고로 고무하고 강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은 몇 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산산이 깨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맥도널드와 에리오 정부는 케렌스키 시기나 자본가계급의 일반적 쇠퇴를 결코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 정부는 오직 더 진지하고, 더 견고하며, 더 자신감 있는 부르주아 정부의 덧없는 선구자가 될 것이었고, 또 될 수 있었다. 제5차 대회는 독일 대재앙의 정도를 추정하지 못하고, 이 재앙을 단지 작센주의회의 코미디 문제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이미 모든 전선에서 정치적으로 퇴각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무장봉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에서 새로운 방침의 결정에, 후방의 전투에, 당의 조직적 진지 강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알지 못했다.

‘시대’ 문제와 관련하여 파시즘에 대한 논쟁이, 마찬가지로 왜곡되고 파렴치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반대파는 즉각적인 혁명적 위험이 부르주아 체제의 기초를 위협하고, 부르주아 국가의 정상적 기관들이 부적당하다고 입증될 때에만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파시스트 어깨를 내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적인 파시즘은 반항적인 노동자계급에 맞서 자본가 집단 측에서 벌이는 내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을 속이고, 달래고, 사기를 꺾기 위해 내전이 벌어지기 전 시기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중대하고, 항구적인 승리에 뒤이은 시기, 즉 정상적인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혁명에 실망한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을 의회 체제에 붙들어놓지 않을 수 없을 때에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좌익, 즉 사회민주주의적인 어깨를 내밀지 않을 수 없다. 이론적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으며, 투쟁의 전 과정을 통해 확증된 이런 분석에 반대하여, 코민테른 지도부는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이 동일하다는 어리석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장을 제기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에 대해 사회민주주의는 파시즘 못지않게 맹목적이며, 위험한 순간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스케를 제공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 코민테른 지도부는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정치적 차이를 완전히 없애는 데까지 나아갔다. 여기에 더해 공공연한 내전 시기와 계급투쟁의 ‘정상적’ 시기 사이의 차이도 완전히 없애버렸다. 한마디로, 단지 내전의 직접적 전개에 대한 태도를 계속 가장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고, 뒤얽혔으며, 엉망이 되었다. 1923년 가을에 마치 독일과 유럽에서 평상시와 다른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에피소드였을 뿐이다!

이 논쟁의 과정과 수준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스탈린의 글 ‘국제 정세에 대하여’(〈프라브다〉지, 1924년 9월 20일자)를 인용해야 한다. 

나와 논쟁을 벌이면서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 말하자면, 자청해서 자본가계급이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에 이르게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아주 곤란한 이 기본적인 역사철학적 테제에는 주요한 두 가지 결론이 뒤따른다.

‘첫째, 파시즘이 단지 자본가계급의 전투기관일 뿐이라는 것은 거짓이다. 파시즘은 단순히 군사-기술적 범주[?!]가 아니다.’

왜 부르주아 사회의 전투기관이 정치적 ‘범주’가 아니라 기술적 ‘범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파시즘이 무엇인가? 스탈린의 에두르는 대답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 ‘사회민주주의는 객관적으로 파시즘의 온건파다.’

누군가는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사회의 좌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정의는 이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해석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아직도 자기 뒤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일정한 한도 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주인의 의지뿐만 아니라 현혹된 노동자 유권자의 이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상당히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온건파’라고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몰상식한 것이다. 이 경우에 부르주아 사회 자체는 어떻게 되는가? 정치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안 된다. 그 대신에 부르주아 전선의 두 기둥을 나타내지만―위험한 순간에 결합한다―그렇다 하더라도 두 기둥인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을 구별해야 한다. 파시즘의 쇠퇴와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을 동시에 보여준 1928년 5월 선거가 지난 지금, 이를 아직도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덧붙여 말하자면, 이때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에 노동자계급의 공동전선을 제안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글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둘째로, 결정적 전투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은 거짓이다. 노동자계급이 이 전투들에서 패배를 당했으며, 그 결과 자본가계급이 강화되었다는 것도 거짓이다. 비록 아직까지 진짜 볼셰비키 대중정당들이 없었다는 것 때문일 뿐일지라도[?], 결정적 전투는 아직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아직까지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은 자신을 강화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록’ 볼셰비키당이 아직 없었다는 것 때문일 ‘뿐일지라도’ 전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본가계급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을 가로막은 것은 … 볼셰비키당의 부재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본가계급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을 도운 것은 바로 이 부재―당의 부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볼셰비키 지도부의 부재―였다. 

만약 군대가 결정적 상황에서 전투 한번 없이 적에게 항복한다면, 이 항복은 완전히 ‘결정적 전투’를 대신할 것이다. 이는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그렇다. 18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엥겔스는 혁명적 상황을 놓친 당은 오랫동안 무대 에서 사라진다고 가르쳤다. ‘제국주의 이전에’ 살았던 엥겔스가 오늘날에는 진부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러한 [볼셰비키] 당이 없다면, 제국주의의 조건 아래에서는 독재를 위한 투쟁이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투쟁이 불균등 발전법칙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엥겔스의 시대에는 상당히 가능성이 있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련의 사고 전체는 꽤 적절하게 다음과 같은 정치적 예언으로 덮여있다.

‘결국, 이 ‘평화주의’에서 자본가계급의 권력 강화와 혁명의 무기한 연기가 비롯된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연기는 사실 스탈린이 아니라 엥겔스 나름의 결과였다. 1년 뒤, 자본가계급의 입장이 더 강경해졌으며, 혁명이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것이 눈먼 사람들에게도 분명해졌을 때, 스탈린은 우리에게 안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비난은 ‘안정’에 벌써 새로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영국과 중국에서 새로운 혁명 물결이 다가왔을 때, 특히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런 완전히 가망 없는 혼란이 지도노선의 역할을 다했다! (과거에 옭아매기 위해)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끌어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초안(2장)에 포함된 파시즘의 정의, 그리고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제5차 대회의 도식인 앞에서 인용한 스탈린의 도식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이고 올바르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진전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지난 10년의 경험에 비추어, 코민테른의 강령이 혁명적 상황, 그 근원과 소멸을 설명하지 않은 채, 이러한 상황을 평가하면서 저지른 전형적인 잘못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으며, 기관사가 곡선 길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은 채, 세계혁명의 결과가 2~3일의 투쟁에 달려 있는 이러한 상황이 있다는 진실을 각국 당들에게 되풀이해서 가르치지 않을 수는 없다.


7. 극좌 정책의 우익적 효모

1923년에 최고조에 이른 격동기가 지나자, 장기간에 걸친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전략적 용어로 이것은 질서정연한 퇴각, 방어적 전투, 대중 조직들 안에서 우리의 진지를 강화하는 것, 우리 대오의 재점검, 우리의 이론적, 정치적 무기를 닦고 날카롭게 다듬는 것을 의미했다. 이 입장은 청산주의라는 낙인이 찍혔다. 최근에 볼셰비키 어록의 다른 개념들뿐만 아니라 청산주의라는 개념도 아주 지독하게 오용되었다. 더 이상 어떤 것을 가르치거나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혼란과 오류를 홑뿌리는 것뿐이었다. 청산주의는 혁명의 포기이며, 개량주의적 길과 방법으로 혁명적 길과 방법을 대신하려는 기도다. 레닌주의 정책은 청산주의와 전혀 공통점이 없다. 마찬가지로 객관적 상황의 변화를 무시하는 것과도 거의 관계가 없다. 또한 혁명이 이미 우리에게 등을 돌린 뒤에, 그래서 새로운 혁명을 앞당기려고 당을 준비시키기 위해 대중들 사이에서 장기간에 걸친 완강하고 체계적이며, 힘겨운 활동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을 때, 무장봉기 방침을 구두로 옹호하는 것과도 거의 관계가 없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는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필요한 것과는 다른 유형의 운동이 요구된다. 불이 나간 경우, 내려가는 계단 앞에선 어떤 사람이 올라서려 할 때의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 이때 추락, 부상, 탈구가 일어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1924년에 코민테른 지도부는 독일의 10월 경험에 대한 비판과 일반적 비판 모두를 억누르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계속 이렇게 반복했다 : 노동자들은 혁명을 향해 곧장 나아가고 있다―계단은 위로 통해 있다. 혁명의 퇴조기 중에 적용된 제5차 대회의 지침들이 참혹한 정치적 몰락과 혼란에 이르게 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27년 3월 1일자〈독일 반대파 통보(通報)〉 5~6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당 대회 [이들이 지도부를 장악한 1924년 봄의 프랑크푸르트 대회]에서 좌익의 가장 큰 실수는 이들이 당에게 1923년 패배의 중대함을 냉혹할 정도로 말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또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당에게 진지하게, 그리고 꾸밈없이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화 경향을 설명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게다가 곧 다가올 시기에 적합한 강령을 그 투쟁형태, 슬로건들과 함께 정식화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올바르고 절대로 필요했던 만큼, 이렇게 하는 것, 그리고 강령의 테제들을 선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했다.(트로츠키의 강조)

이런 방침은 제5차 대회 중에 우리의 ‘청산주의’ 혐의에 맞선 투쟁에 참가한 당시 독일 좌익의 한 분파가 1924~25년의 교훈을 진지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 뒤에 우리를 원칙에 기초하여 좀 더 가까워지게 했다.

급격한 정세 전환의 기조가 된 해는 1924년이었다. 그러나 이런 급격한 전환이 일어났음(‘안정’)을 인정한 것은 1년 반이나 지나서였다. 따라서 1924~25년이 좌익적 오류와 폭동주의 실험의 해였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24년 12월의 에스토니아 무장봉기의 비극적 역사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의 폭력적 모험은 잘못된 정세 판단에서 비롯된 절망감의 폭발이었다. 역사적 과정을 폭동으로 능욕하려는 이런 시도들이 비판적 검토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1927년 말 무렵 광동(廣東)에서 재발하게 되었다. 정치에서는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묵과 되지 않는다. 하물며 큰 실수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가장 큰 실수는 실수에 대한 비판과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적 평가를 기계적으로 억누르려 하면서 실수를 감추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 5년 동안의 코민테른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이 시기의 기본적 단계에서 두 가지 전략적 방침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예를 제시할 뿐이다. 동시에 이 모든 문제들이 나타나 있지도 않은 강령 초안의 생기 없음을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개괄적이라고 하더라도 코민테른의 당들을 강타한, 한편으로 제5차 대회 지침들과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현실 사이에 놓인 해결할 수 없는 모순들을 묘사할 수 없다. 물론 모든 곳에서 모순들이 1924년 불가리아나 에스토니아의 경우와 같은 파멸적인 격변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리고 모든 곳에서 당들은 자신들이 속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으며, 눈가리개를 한 채로 돌아다녔으며 발부리가 걸렸다. 순전히 당의 선전선동에서, 노동조합 안의 활동에서, 의회 연단에서, 즉 모든 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제5차 대회의 잘못된 입장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끌고 다녀야 했다. 크고 작은 정도로 당은 제각기 잘못된 출발점의 희생양이 되었다. 제각기 허깨비를 뒤쫓았으며, 실제 과정을 무시했으며, 혁명적 슬로건을 요란한 공문구로 둔갑시켰으며, 대중의 눈앞에서 자기 체면을 구기고, 지지기반 모두를 잃어버렸다.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코민테른의 출판물은 지금처럼 이때에도 최근 공산당들의 활동에 대한 사실과 수치를 모으고, 정리하고, 발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박탈해버렸다. 패배, 오류, 태만의 결과, 아류 지도부는 후퇴하기를 더 좋아하고, 모든 불빛을 차단한 채 적들과 타협하는 것을 선호한다.

실제 요인들과의 모순이 무자비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게 된 지도부는 더욱 더 허구적 요인에 매달려야 했다. 지지기반을 잃고 있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아무런 흔적도 없는 곳에서 혁명세력과 징후를 발견하려고 억지를 부렸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썩은 밧줄을 꽉 붙잡아야 했다.

노동자계급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명하고도 증가하는 우경향에 비례하여, 코민테른에서는 농민을 이상화하는 국면이 시작되었다. 코민테른은 부르주아 사회와 ‘단절’하려는 농민의 모든 징후를 완전히 무비판적으로 과장하고, 단명한 모든 농민조직을 미화하고, ‘농민’ 선동가들에게 노골적으로 아첨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빼앗긴 층인 빈농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본가계급과 사이비 농민선동가에 대항하는 노동자 전위의 장기간에 걸친 완강한 투쟁 임무는 점점 더 농민이 국제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일국적 차원에서도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1924년 내내, 즉 ‘안정’의 기준연도 중에, 공산당출판물은 최근에 조직된 농민인터내셔널의 힘에 대해 완전히 터무니없는 자료들로 채워졌다. 대표인 돔발(Dombal)은 결성 6개월 뒤, 농민인터내셔널이 벌써 수백만 회원을 끌어들였다고 보고했다.

이 무렵 라디치[스테판 라디치(Stjepan Radic, 1871~1928):크로아티아농민당의 창립자] 때문에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지도자인 라디치는 녹색 자그레브(Zagreb)에서 오는 도중에, 마침 자신이 백색 베오그라드(Belgrade)의 장관이 될 가능성을 굳히기 위해 적색 모스크바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1924년 7월 9일, 지노비예프는 레닌그라드 노동자 당원들에게 제5차 대회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의 새로운 ‘승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로 지금, 농민 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러분 모두는 아마 라디치의 크로아티아농민당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라디치는 지금 모스크바에 있다. 그는 인민의 진정한 지도자다. … 라디치 뒤에는 크로아티아의 빈농과 중농 전부가 결집해 있다. … 라디치는 지금 자기 당을 대표하여 농민인터내셔널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 농민인터내셔널의 결성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어떤 동지들은 이로부터 거대조직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믿지 않았다. … 지금 우리는 다수의 보조적 대중인 농민을 획득하고 있다. …(〈프라브다〉지, 1924년 7월 22일자)

기타 등등이며, 게다가 더 나아갔다.

바다 건너편의 지도자 라폴레트[로버트 라폴레트(Robert LaFollette, 1855~1925):1924년 미국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 1906-25년 공화당의 위스콘신주 상원의원]는 ‘진정한 인민의 지도자’ 라디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보조적 대중’―미국 농민들―을 가속도로 움직이게 할 목적으로 코민테른의 대표인 페퍼[존 페퍼(John Pepper, 1886-1937):본명은 요제프 포가니(Joseph Pogany).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1919년,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일원. 정권 붕괴 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코민테른에서 활동.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에 참여했다.]는 미국 자본주의를 신속히 타도하기 위해 라폴레트 중심으로 ‘농민-노동자당’을 창설하는 어리석고 악명 높은 모험에 젊고 미약한 미국공산당을 끌어들였다.

농민들에 기초한 미국의 혁명이 목전에 있다는 기쁜 소식이 당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공식 지도자들의 연설과 글을 가득 채웠다. 제5차 대회의 한 회의에서 콜라로프는 이렇게 보고했다.

‘미국에서 소농들은 농민-노동자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더욱 급진적으로 되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가까이 끌리고 있다. 더욱이 미국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부건설이라는 생각으로 속속들이 물들고 있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6일자)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네브래스카 출신의 그린(Green)―라폴레트 조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농민대회에 참석했다. 그린도 어딘가에 ‘끼었으며’, 그 다음에는 관례에 따라 나중에 세인트폴 협의회에서 공산당이 페퍼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무기력한 시도에 나서자, 공산당이 패배하는 것을 도왔다. 페퍼는 제3차 대회에서 극좌파의 일원이자, 마르크스주의를 개량하려고 했으며, 헝가리혁명의 목을 벤 사람 가운데 하나인 카롤리(Karolyi) 백작의 상담역이기도 했다.

1924년 8월 29일자에서〈프라브다〉지는 이렇게 불평했다.

‘미국의 모든 노동자계급은 심지어 영국노동당만큼 협조주의적인 당에 필요한 의식 수준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약 한달 반전에 지노비예프는 레닌그라드 노동자 당원들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수백만 농민들은 농업 위기에 의해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일시에(!) 노동자계급 쪽으로 내몰리고 있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22일자)

콜라로프는 곧바로 ‘그리고 노동자 농민 정부를 위하여!’라고 덧붙였다.

출판물은 농민-노동자당이 미국에서 곧 결성될 것이라고 계속 반복했다. 이 당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순수한 노동자당은 아니지만 계급적인’ 농민-노동자당이라고 한다. ‘노동자당은 아니지만 계급적인’이라는 특성이 무슨 뜻인지, 아마 바다 양쪽에 있는 어느 점성술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것은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라는 생각의 페퍼화 된 판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중국혁명의 교훈과 관련하여 다시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여기서는 비(非)노동자적이지만 계급적인 당이라는 이런 반동적인 생각은 코민테른이 지지기반을 잃으면서 라디치, 라폴레트, 그리고 농민인터내셔널의 우쭐해진 인물들을 부여잡은 1924년의 사이비 ‘좌익’ 정책에서 전적으로 비롯되었다고만 말해두자.

진부한 문구를 존중하는 밀류틴(Miliutin)은 이런 말을 퍼뜨렸다. ‘우리는 지금 엄청나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농민 대중의 분리 과정, 농민이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전진하고 있는 과정,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에서 자본주의 나라들의 농민과 노동자계급 사이에 공동전선이 더욱 강화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7월 27일자)

1924년 한 해 동안, 코민테른의 출판물은 지친 기색 없이 전반적인 ‘농민 대중의 급진화’에 대해 얘기했다. 마치 이로부터 뭔가 독자적인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이 분명히 우경화하고 있고, 사회민주주의가 세력을 키웠으며, 자본가계급의 지위가 강화된 시기에 농민의 급진화는 단지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1927년 말과 1928년 초 무렵에 중국에 관해 동일한 정치적 비전의 부재에 직면한다. 모든 중대하고, 근본적인 혁명적 위기 이후에, 노동자계급이 결정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패배를 당한 가운데서도 반(半)노동자계급적인 도시와 농촌의 대중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소요가 계속해서 분출한다. 마치 돌이 떨어진 다음 수면에 파문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지도부가 이런 파문에 독자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노동자계급 내의 변화와는 달리 이를 다가오는 혁명의 징후로 해석할 때마다, 이것은 1924년의 에스토니아나 불가리아, 또는 1927년의 광동에서와 비슷하게 지도부가 모험주의로 가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임을 명심해야 한다.

같은 극좌주의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몇 년 동안 국민당에 박혀 있었다. 제5차 대회는 국민당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없이 국민당을 ‘동조적인 당’(〈프라브다〉지, 1924년 6월 25일자)으로 간주했다. 더 나아가면, 우리는 ‘혁명적 민족자본가계급’에 대한 이상화가 점점 더 현저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좌익 노선은 동양의 사정도 모르면서 초조함에 안달을 내다 뒤이어 기회주의의 발판을 놓았던 것이다. 기회주의 노선을 정식화할 것을 요구한 것은 바로 마르티노프(Martinov)였다. 마르티노프는 스스로 세 번의 러시아혁명 중에 소부르주아 계급을 뒤따라 다녔기 때문에 그만큼 더 중국 노동자계급의 믿을 만한 상담자였다.

라디치, 라폴레트, 돔발의 수많은 농민대중, 심지어 페퍼도 시대를 인위적으로 촉진시킬 기회를 잡으려 들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망이 수립되었다. 영국공산당의 허약함은 당시에 가능한 한 빨리 더 당당한 요인으로 대체할 필요성의 원인이 되었다. 바로 이때, 영국 노동조합주의 내 여러 경향들에 대한 잘못된 평가가 제시되었다. 지노비예프는 영국공산당이라는 좁은 문이 아니라 노동조합이라는 널따란 정문을 통해서 혁명이 출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중을 공산당을 통해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혁명을 위해 기존의 노동조합 기구를 가능한 한 가장 발 빠르게 이용하려는 바람으로 대체되었다. 이 잘못된 입장으로부터 나중에 영-러위원회라는 정책이 튀어나왔다. 이 영-러위원회는 영국의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연방에도 타격을 주었다. 이 타격을 능가한 것은 오직 중국의 패배뿐이었다.

이미 1924년 여름에 작성된〈10월의 교훈〉에서 가속화된 수단이라는 생각―이 생각이 더욱 발전하여 보여준 것처럼, 퍼셀[알버트 퍼셀(Albert Purcell, 1872-1935):영국의 노동조합 활동가, 영국 총평의회의 지도자. 영-러위원회의 중심적 인물로 1926년 총파업을 배반했다.], 쿡(Cook)과 친선을 통해 가속화된―은 다음과 같이 반박되었다.

‘당 없이, 당으로부터 독립하여, 당을 뛰어넘어, 당의 대용품으로는 노동자 혁명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 이것이 지난 10년의 주요한 교훈이다. 물론 영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자혁명의 강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정한 상황에서, 그리고 특정한 기간 동안 노동조합은 심지어 노동자 소비에트를 대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공산당이 없는 경우는 물론이고, 공산당에 대항해서는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없다. 단, 노동조합 속에서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이 결정적이라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자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 우리는 당을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심지어 약화시키는 대단히 큰 대가를 치른 것이다.’ (트로츠키, 《전집》, 제3권 제1부, 9쪽)

나는 똑같은 문제를 《영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is Britain Going?라는 책에서 더 폭넓게 제기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증명하는 데 열중해 있다 : 영국혁명 역시 공산주의의 입구를 거치지 않을 수 없으며, 우회로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갖지 않는 올바르고, 대담하며, 비타협적 정책을 가진다면 영국공산당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으며, 몇 년 사이에 자기 앞에 놓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할 것이다.

1924년의 좌익적 환상은 우익적 효모로 인해 생겨났다. 1923년 실수와 패배의 의미를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추기 위하여, 노동자계급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우경화 과정은 부정하고, 다른 계급 내의 혁명적 과정을 낙관적으로 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노동자 노선으로부터 중도주의, 즉 소부르주아 노선으로. 퇴보하는 것의 시작이었다. 자본주의의 안정성이 증대하는 과정에서 이 소부르주아 노선은 그 극좌적 껍데기를 스스로 벗어던졌으며, 소련, 중국, 영국, 독일과 다른 모든 곳에서 노골적인 타협주의 노선을 드러냈다.


8. 우익 중도주의적 퇴보의 시기

제5차 대회에 맞춘 가장 중요한 공산당들의 정책은 곧 그 완전한 비효율성을 드러냈다. 공산당들의 발전을 저해한 사이비 ‘좌익주의’의 오류는 나중에 새로운 경험적 우왕좌왕, 즉 가속화된 우익적 퇴보를 촉진했다. 뜨거운 우유에 덴 고양이는 차가운 물을 꺼린다. 많은 당들의 ‘좌익적’ 중앙위원회는 자신들이 제5차 대회 전에 급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몹시 급하게 축출되었다. 모험적 좌익주의는 우익 중도주의 유형의 공공연한 기회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조직적인 우향우의 성격과 속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전환의 지휘자인 스탈린이 이미 1924년 9월에 마슬로프[아르카디 마슬로프(Arkady Maslow, 1891~1941):1924년 이후, 브란틀러파를 대신해 독일공산당을 지도한 그룹(마슬로프, 피셔, 우르반스)의 한 사람. 당초, 지노비예프를 추종해 트로츠키에 반대했지만, 1926년에 통합반대파를 지지해 제명당했다. 1928년에 지노비예프와 함께 굴복했으며. 피셔, 우르반스와 함께 레닌분트를 결성했다.], 루트 피셔, 트렝[트랭(A. Treint, 1889~1972) : 프랑스공산당의 지도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반대파를 지지했으며, 1927년 제명되었다.], 수잔 지로[수잔 지로(Suzanne Girault, 1882~1973):트렝과 함께 프랑스공산당을 이끌었다.] 등에게 당 지도부를 넘기는 것을 당의 볼셰비키화의 표현이자, 혁명을 향해 진군하고 있으며, ‘혁명적 지도자를 원하는’ 볼셰비키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 6개월은 서구 공산당들의 일생에서 근본적인 전환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잔재가 단호하게 청산되고, 당 중핵들이 볼셰비키화되고, 기회주의적 분자들이 고립되었다는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프라브다>지, 1924년 9월 20일자)

그러나 10개월 뒤 진정한 ‘볼셰비키’이자 ‘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이자 배신자들로 선언되었고, 지도부에서 쫓겨났으며, 당에서 추방되었다.

흔히 당 기구의 투박하고 불성실한 기계적 조치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이런 지도자들의 변화는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 그러나 극좌 정책 시기와 그 뒤를 잇는 기회주의적 퇴보 시기 사이에 어떤 엄밀한 이데올로기적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에서 공업과 농민의 문제,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문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농민’당의 문제, 일국사회주의의 문제, 노동자혁명에서 당의 역할 문제들에서 수정주의 경향들은 이미 1924~25년에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이라는 기치를 두르고 만개하여 나타났다. 그리고 1925년 4월에 열린 소련공산당 협의회의 결의문에서 자신의 가장 뚜렷한 기회주의적 표현을 발견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경화는 1923년의 패배로 야기된 혁명적 발전의 좌절에 반쯤 분별력을 잃어, 순전히 경험적으로, 그것도 뒤늦게 적응하려는 시도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부하린의 첫 번째 정식은 글자그대로, 그리고 용어의 기계적 의미에서 혁명의 ‘연속적’ 발전에 기초하고 있었다. 부하린은 ‘숨 쉴 공간’, 중단, 어떤 종류의 퇴각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공격’을 계속하는 것이 혁명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인용한 스탈린의 글, ‘국제정세에 대하여’는 일종의 강령이며, 국제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데뷔작이다. 이 글은 강령 초안의 두 번째 기초자도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 초기에 똑같은 순전히 기계적인 ‘좌익적’ 구상을 표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구상은 상존했으며, 사회민주주의는 영구불변으로 ‘붕괴하고’ 있었을 뿐이며, 노동자들은 ‘급진화’되고 있었고, 공산당들은 ‘성장하고’ 있었으며, 혁명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사태를 분간하려고 애쓴 사람들은 누구든지 ‘청산인’이다.

이 ‘경향’이 1923년에 유럽의 상황이 급변한 뒤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를 정반대로 바꾸기 위해 뭔가 새로운 것의 필요성을 감지하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지도부는 우리 시대와 그 내적 경향에 대한 어떤 종합적인 이해도 없이, 단지 손으로 더듬기만 하거나(스탈린), 결과적으로 이미 획득한 단편적인 결론을 각각의 경우에 맞게 손본 현학적 도식으로 보충하면서(부하린) 사태를 파악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지도부의 정치 노선은 지그재그의 연속을 나타낸다. 또 이데올로기적 노선은 스탈린주의적 지그재그의 모든 조각을 불합리한 것으로 몰고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도식들의 만화경 같다.

제6차 대회가 만약 부하린이 만들어낸, 그것도 말하자면, 영-러위원회의 모든 단계에서 논거로 쓸 요량으로 만들어낸 이론을 전부 수집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바른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 이론들은 그 안에 담긴 생각의 체온표(a fever chart)를 얻기 위해, 연대순으로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배열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교훈적인 전략적 도표였을 것이다. 중국혁명, 소련의 경제 발전, 그리고 덜 중요한 다른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도표가 준비되어 있다. 스콜라주의로 배가된 맹목적 경험주의―이것이 여전히 무자비한 비난을 기다리고 있는 노선이다. 소련의 국내 문제에 관한 퇴보 정책에 대해서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의 강령》Platform of the Bolshevik-Leninists(Opposition)에서 대단히 철저하게 평가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단지 다음을 언급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강령》은 지금 외관상으로는 아주 예상 밖의 승인을 얻고 있다. 1923~28년 정책의 결과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련공산당 현 지도부의 모든 시도가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강령》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강령》의 기초자와 지지자들은 감옥이나 유형지로 쫓겨나 있다. 그렇지만 현 지도자들이 《강령》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단지 편파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좌선회를 극도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진짜 레닌주의 노선의 일반화된 표현으로서 《강령》에 전에 없이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강령》에서 중국혁명의 문제는 아주 불충분하게, 불완전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노비예프에 의해 절대적으로 부당하게 취급되어 있다. 코민테른에서 이 문제가 지닌 결정적 중요성 때문에 우리는 별도의 장(이 책 3장을 보시오)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코민테른의 전략적 경험에서 나온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영-러위원회에 대해 반대파는 일련의 글, 연설, 테제를 통해 이미 말 했지만 아직도 짧게 요약할 것이 남아 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영-러위원회의 출발점은 미숙하고, 발전이 너무 더딘 공산당을 건너뛰려는 조급한 충동이었다. 이것은 심지어 총파업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체 경험에 잘못된 특징을 부여했다.

영-러위원회는 총평의회와 타협하기 위해 맨 먼저 진지한 검증을 차단시켜야 했으며, 불가피하게, 그리고 여봐란듯이 차단시킨 상층의 일시적 블록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아니, 그렀기는커녕 스탈린, 부하린, 톰스키(Tomsky) 등은 물론이고 지노비예프도 거기에서 장기간에 걸친 ‘협력 관계’―영국 노동자 대중을 체계적으로 혁명화시킬 도구, 영국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발전시킬 관문이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관문으로 통하는 진입로―를 보았다. 한층 더 나아간 영-러위원회는 일시적 동맹에서 실제 계급투쟁을 초월하는 신성한 방침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총파업이 일어날 즈음 판명되었다.


대중운동의 공공연한 혁명적 단계로의 전환은 약간 좌경화된 자유주의적 노동자 정치인들을 부르주아 반동진영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들은 공공연하게, 그리고 계획적으로 총파업을 배신했다. 그 다음에 이들은 광부들의 파업을 와해시키고 배신했다. 개량주의는 항상 배신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량주의와 배신이 언제나 같은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개량주의자들이 일보 전진할 때는 언제나 그들과 일시적인 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운동의 발전에 겁을 집어먹고 배신할 때, 그들과의 블록을 유지하는 것은 배신자에게 범죄적 관용을 베풀고, 배신을 감추는 것과 같다.

총파업은 500만 노동자들의 힘으로 고용주와 국가에 대해 일치된 압력을 가하는 것이 임무였다. 왜냐하면 탄광업의 문제는 국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도부의 배신 때문에 총파업은 초기 단계에서 파괴되었다. 광부들의 고립된 경제파업이 홀로 총파업이 쟁취하지 못한 것을 획득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크나큰 환상이었다. 총평의회의 힘이 겨눈 곳이 바로 이것이다. 총평의회는 냉정하게 계산하여 광부들의 패배를 겨냥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총평의회의 배신적 지침을 ‘올바르며, 합리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총평의회와 우호적인 블록을 유지하는 것, 동시에 총평의회가 반대하고 나선 광부들의 장기적이고 고립된 경제파업을 지지하는 것은 말하자면, 노동조합 우두머리들이 이런 가혹한 시험에서 가능한 한 가장 적은손실을 입고 빠져나오도록 미리 계산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혁명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러시아노동조합들의 역할은 아주 유해하고 단연코 한심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틀림없이 고립된 파업일지라도 경제파업에 대한 지지는 무조건 필요했다. 혁명가들에게 이에 대한 두 가지 견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지지는 재정뿐만 아니라 혁명적-정치적 성격도 띠어야만 했다. 전러시아노동조합 중앙평의회는 영국광부노동조합과 전체 영국 노동자계급에게 광부들의 파업은 그 완강함, 끈기, 범위를 통해 새로운 총파업을 일으킬 토대를 닦을 수 있을 경우에만, 진지하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했다. 이것은 정부와 광산 소유자들의 대리인인 총평의회에 대항하는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경제파업을 정치파업으로 전환하려는 투쟁은 총평의회에 대항하는 맹렬한 정치적, 조직적 전쟁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을 위한 첫걸음은 이미 반동적 장애물이자 노동자계급의 족쇄가 된 영-러위원회와 단절하는 것이어야 했다. 

신중하게 말하는 혁명가라면 그 누구도 이 노선을 따라 나아가면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이 길을 따를 때만가능했다. 이 길을 가는 도중의 패배는 나중에 승리에 이를 수 있는 길에서의 패배였다. 이러한 패배는 노동자계급에게 혁명적 사상을 가르친다, 즉 견고히 한다. 한편, 우물쭈물하고 희망을 잃은 노동조합의 파업(그 방법에서는 노동조합의 파업이고, 그 목표에서는 혁명적-정치적인)에 대한 단순한 재정 지원은 단지 파업이 굶주림 때문에 와해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림으로써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한 총평의회의 이익을 의미했을 것이다. 물론 총평의회가 공공연한 파업파괴자의 역할을 위해 몇 달 동안 기회를 엿보기는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총평의회는 대중들로부터 가릴 자신의 정치적 차단막으로 영-러위원회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영국 자본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총평의회와 광부들 사이의 사활적인 계급투쟁의 문제는 영국 총평의회와 전러시아노동조합 중앙평의회라는 말하자면, 같은 블록 안의 동맹자들 사이의 우호적인 토론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 토론의 주제는 이때 두 가지 길―타협의 길, 아니면 고립된 경제파업의 길―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았는가였다. 파업의 불가피한 결과는 협정으로 이어졌다. 즉, 총평의 회를 지지하는 우호적인 ‘토론’은 비극적으로 매듭지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러위원회의 모든 정책은 잘못된 방침 때문에 총평의회에게만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자기희생 때문에 재정적으로 파업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조차도 광부들이나 영국공산당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총평의회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티즘시대이래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혁명운동의 결과 때문에, 총평의회가 총파업 이전보다 훨씬 더 확고하게 권력에 앉아 있던 반면에, 영국공산당은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런 비길 바 없는 ‘전략적 술책’의 결과이다. 

1927년 4월의 수치스러운 베를린회의에서 철저히 비굴하게 군총평의회와의 블록 유지를 밝힌 완고함은 똑같은 ‘안정’에 대한 언급을 줄곧 되풀이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만약 혁명의 발전이 퇴보한다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퍼셀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의 관료 또는 멜니찬스키[그레고리 멜니찬스키(Gregory Melnichansky, 1886~1937):1917년 5월에 트로츠키 등과 함께 혁명러시아로 귀국한 이후 노동조합 분야에서 활동. 1918~21년, 전러시아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위원, 프로핀테른 임원. 1925~30년, 중앙위원 후보. 1929~31년, 국가경제최고회의 임원. 1931~34년,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1937년에 총살되었다.] 같은 유형의 노동조합주의자에게나 매우 심오하게 보였을 이런 주장은 실제로 맹목적 경험주의―스콜라주의 때문에 그 정도로 더욱 심해진―의 완벽한 본보기다. 특히 1926~27년에 영국의 정치, 경제와 관련하여 ‘안정’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생산력의 발전을 의미했는가? 경제 상황의 개선이었는가? 미래에 대한 더 나은 바람이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국자본주의의 이른바 안정 전체는 영국공산당의 미약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모든 경향과 색조를 지닌 낡은 노동자 조직의 보수적 세력에 의존해서만 유지되었다. 영국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 분야에서 혁명은 이미 충분히 성숙해 있다.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에 있다. 안정의 기본적인 버팀목은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우두머리들이다. 이들은 영국에서 한 개의 단위를 이루지만 분업을 통해 움직인다.

총파업과 같은 상황이라면, 자본주의의 안정화 메커니즘에서 최고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더 이상 맥도널드나 토머스(Thomas)가 아니라 퓨(Pugh), 퍼셀, 쿡 일당이다. 이들이 일을 하고, 토머스가 마지막 손질을 덧붙인다. 퍼셀이 없다면, 토머스는 공중에 매달려 있을 것이며, 토머스와 함께 볼드윈[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 1867~1947) : 1923년에 총리가 되어 탄광파업을 분쇄한 보수당 정치인]도 그럴 것이다. 영국혁명을 억제하는 주요한 제동장치는 기만적이며, 외교적인 체하는 퍼셀의 ‘좌익주의’다. 때로는 돌아가며, 때로는 동시에 목사나 볼셰비키들과 친하게 사귀며, 항상 퇴각뿐만 아니라 배신할 준비도 되어 있는 것이 바로 퍼셀의 좌익주의다. 안정은 퍼셀주의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퍼셀과의 정치적 블록을 정당화하기 위해 ‘안정’의 실재와 관련하여 이론적 모순과 맹목적 기회주의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안정’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퍼셀주의가 맨 먼저 파괴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평의회와 연대한 흔적조차도 노동자 대중에 대한 가장 큰 범죄이자 파렴치한 행위였다.

가장 올바른 전략도, 그것만으로는 매번 승리로 이끌 수 없다. 전략적 계획의 올바름은 전략적 계획이 계급역관계의 실제 발전 방향을 따르는지, 그리고 이런 발전의 요소들을 현실적으로 평가하는지에 따라 검증된다. 운동에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는 계급에 대한 잘못된 평가, 혁명적 요인에 대한 과소평가, 적의 힘에 대한 이상화 탓에 당한 전형적으로 멘셰비키적인 패배다. 우리가 중국과 영국에서 당한 패배가 이러한 것이었다.

소련은 영-러위원회에 무엇을 기대했는가?

1926년 7월에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합동총회에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연했다.

이 블록[영-러위원회]의 임무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또한 대체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열강들, 특히 영국 측의 (주로) 우리나라에 대한 간섭에 맞서 광범한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있다.

우리 반대파에게 ‘간섭에 맞서 세계 최초의 노동자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로 지시했다고는 하나 (물론 우리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스탈린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영국의 반동적 노동조합들이 자국의 반(反)혁명적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기꺼이 우리나라의 혁명적 노동조합들과 블록을 맺으려 한다면, 우리가 왜 이러한 블록을 환호해서는 안 되는가?

만약 ‘반동적 노동조합들’이 자국의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었다면, 이들은 반동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은 반동적이란 개념과혁명적이란 개념을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 그는 관례에 따라 영국의 노동조합들을 반동적이라고 규정하지만, 실제로 그는 이들의 ‘혁명적 정신‘에 대해 가엾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에 뒤이어, 우리 당의 모스크바위원회가 모스크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영-러위원회는 소련을 겨냥한 있을 수 있는 모든 개입에 맞선 투쟁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며, 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려는 국제 자본가계급의 모든 시도에 맞선 투쟁에서 국제 노동자계급 세력의 조직적 중심이 될 것이다.(모스크바위원회의 테제)

반대파는 어떻게 응답했는가?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국제 정세가 더욱 첨예해질수록, 영-러위원회는 영국과 세계 제국주의의 무기로 바뀔 것이다.

퍼셀을 노동자 국가의 수호천사로 믿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은 스탈린에 의해 바로 그 합동총회에서 ‘레닌주의로부터 트로츠키주의로의’ 일탈로 규정되었다.

보로실로프: ‘옳소.’
어떤 목소리: ‘보로실로프가 그것을 보증했다,’
트로츠키: ‘다행히 이 모든 것이 회의록에 남을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맹목적이고, 투박하며, 불성실한 기회주의자들이 감히 반대파를 ‘패배주의’라고 비난한 7월 총회 회의록에서 발견될 것이다.

내가 예전에 작성한 글, 〈우리가 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What We Gave and What We Got에서 짧게 인용하지 않으면 안 된 이 대화는 강령 초안의 전략에 관해 완전 미숙한 장보다 전략적 교훈으로서 훨씬 더 유용하다. 우리가 준 것은 무엇이고(그리고 기대했으며), 얻은 것은 무엇인가?―이 질문은 일반적으로 전략에서 원칙적인 기준이다. 제6차 대회에서는 최근의 의제였던 모든 문제들에 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면 특히 1926년 이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전략이 가상적인 판단, 잘못된 예측, 적에 대한 환상, 가장 믿음직하고 동요하지 않는 투사들에 대한 박해의 전략이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한마디로, 우익 중도주의의 타락한 전략이었다.


9. 혁명 전략의 책략적 성격

첫눈에도 왜 볼셰비키 전략의 ‘책략‘과 ‘유연성‘이 강령 초안에서 완전한 침묵으로 불문에 부쳐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엄청난 문제 전체로부터 단 한 가지 쟁점만을 뽑아내자면, 그것은 바로 식민지 자본가계급과의 협정 문제다.

그러나 훨씬 더 깊숙이 오른쪽으로 지그재그하고 있는 최근의 기회주의는 주로 책략(maneuver) 전술의 기치 아래 나아가고 있다.

실천적으로 해롭다는 이런 사실 자체 때문에 무원칙한 타협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유연성’의 부족으로 간주되었다. 다수파는 자신의 근본 원칙이 책략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노비예프는 이미 1925년에 라디치, 라폴레트와 책략을 꾸몄다. 그 후 스탈린과 부하린이 장개석[장개석(雜介石 Chlang Kai-shek, 1887~1975):중국의 군벌, 국민당의 우익 지도자. 1920년대에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의 국민당 입당을 지시, 국민당을 중국혁명의 지도적 당으로 간주했다. 1926년 3월 20일, 광동쿠데타로 지도권을 잡고, 7월에 북벌을 개시했다. 코민테른은 이 쿠데타를 은폐하며, 장개석을 옹호했다. 1927년4월 12일, 장개석은 상해에서 국민당내 공산주의자탄압에 나서 많은 공산주의자를 살육했다(4.12 상해쿠데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원조 아래 공산당과 내전을 수행했다.], 퍼셀 그리고 쿨락과 책략을 꾸몄다. 당 기구는 끊임없이 당과 책략을 꾸몄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지금 당 기구와 책략을 꾸미고 있다. 

책략을 전문으로 다루는 부대는 모두 다 관료적 요구를 위해 생겨났다. 이 부대는 혁명적 투사가 결코 아닌 사람들, 이미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지금은 혁명 앞에 그만큼 더 열렬히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로딘[미하일 보로딘(Mikhail Borodin, 1884~1951) : 본명은 미하일 그루젠베르크, 1923~27년 코민테른의 중국국민당 정부의 고문]은 광동에서, 라페스[모이셰 라페스(Moishe Rafes, 1883~1942):러시아의 분트 활동가. 1917~18년, 우크라이나의 페트룰라 반(反)혁명 정부에 참가했다. 1919년 볼셰비키당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도에도 참여했다.]는 북경에서, 페트롭스키[페트롭스키(D. Petrovsky):러시아의 고참 사회민주주의자, 분트 활동가. 10월혁명 후에 볼셰비키당에 입당. 1920년대에 코민테른에서 영국 문제를 담당했다.]는 영국 해협을 중심으로 책략을 꾸민다. 페퍼는 미국에서 책략을 꾸미지만, 폴리네시아에서도 책략을 꾸밀 수 있다. 마르티노프는 먼 곳에서 책략을 꾸미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 지구 구석구석에서 책략을 꾸민다. 책략에 종사하는 일단의 학생 무리가 키워졌는데, 이들은 주로 각자 자기 근성의 적응성에 따라 볼셰비키의 유연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전략연구소의 임무는 오직 혁명적 계급의 힘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을 책략을 통해 얻는데 있다. 중세시대의 모든 연금술사가 다른 사람들은 실패했지만 자신은 금을 만들기를 바란 것처럼, 오늘날의 책략 전술가들도 각자 자기 지역에서 역사를 현혹시키고 싶어 한다. 물론 본질적으로 이들은 전술가가 아니며, 거물을 제외하면 단지 온갖 수준의 관료적 혼합주의자들일 뿐이다. 선생이 사소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관찰하고 나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전술의 비밀을 통달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아류주의의 본질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혼합주의의 비밀을 여러 과정을 거쳐 획득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사소한 일에서 때때로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런 방법이 중요한 일에 그만큼 더 잘 들어맞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적 투쟁에 견주어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하고 관료적 혼합의 방법을 적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늘 굴욕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게다가 당과 국가 기구로 무장한 혼합주의는 매번 혈기왕성한 당과 혁명의 등뼈를 부러뜨렸다. 장개석, 왕정위[왕정위(在精衛, WangChing-wei, 1884~1944) : 본명은 왕조명. 국민당좌파 지도자. 무한정부의 수반. 코민테른은 장개석의 1927년 3월 쿠데타 이후, 왕정위의 무한정부를 지지했으나 왕정위는 불과 6주 뒤에 노동자 탄압을 개시했다. 1940년 일본의 괴뢰정권을 난징에 수립, 그 주석이 된다.], 퍼셀, 쿨락―‘책략’을 통해 이들을 다루려는 시도에서 이들 모두가 지금까지 승리자로 판명되었다.

물론 이것은 책략이 일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즉 노동자계급의 혁명 전략과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혁명투쟁의 기본적 방식과 관련하여 책략은 단지 종속적이고, 보조적이며, 편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책략은 중요한 일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혼합주의가 사소한 일들에서 뭔가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항상 중요한 일을 희생한 것이다. 올바른 책략은 시간을 벌거나 더 적은 힘으로 더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으로써 문제 해결을 촉진할 수 있을 뿐이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은 근본적인 모순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자본가계급을 조직적, 개인적 책략으로 제어하여, 억지로 혼합주의자의 계획에 따르게 하려는 시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 할지라도 책략이 아니라 한심한 자기기만인 것이다. 계급은 현혹되지 않는다. 역사를 고찰해보면, 이것은 모든 계급들에 적용된다. 특히 지배하고, 소유하며, 착취하고 교육받은 계급들에게 즉시 적용된다. 교육받은 계급의 세계적 경험은 매우 의의 깊고, 이들의 계급적 본능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이들의 첩보기관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인 체해서 이들을 속이려는 시도는 실제로 반드시 적이 아니라 자기 동료들을 계략에 걸려들게 한다.

소련과 자본주의 세계 사이의 모순은 근본적인 모순이다. 책략을 통해 이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명백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본에 대한 양보를 통해, 그리고 그 다양한 분파들 사이의 모순을 이용함으로써 생각할 기회가 늘어날 수 있으며,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나 가능할 뿐, 모든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회주의를 건설할 때까지 국제 자본가계급이 ‘중립화‘될 수 있다고, 즉 근본적 모순이 책략의 도움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자기기만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소비에트공화국의 지도적 지위를 잃게 할지도 모른다. 오직 국제 노동자혁명만이 우리를 근본적 모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책략은 적에 대한 양보나 일시적인, 따라서 항상 미심쩍은 동맹세력과의 협정이나, 적 진영을 분열시키기 위해 의도된 시기적절한 퇴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들이 책략의 주요 변종이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언급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책략은 그 본질상 투쟁의 근본적인 전략 노선과 비교하면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당이나 영-러위원회와 꾸민 책략들은 볼셰비키적 책략이 아니라 전형적인 멘셰비키적 책략의 본보기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일어난 일은 정반대였다. 단지 전술적 에피소드였을 것이 전략적 노선으로 발전했으며, 진짜 전략적 임무(자본가계급과 개량주의자들에 맞선 투쟁)는 일련의 평범하고 사소한, 게다가 장식적 성격이었을 뿐인 전술적 에피소드로 개별화되었다.

책략에서는 양보할 상대나, 협정을 맺을 믿을 수 없는 동맹세력에 관해서는 항상 최선의 가정이 아니라 최악의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동맹세력이 내일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심지어 농민 같은 동맹세력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농민에 대해 쉽게 의심을 거둬서는 안 된다. 항상 우리 자신을 농민과는 따로 조직해야 한다. 농민이 반동적이거나 반(反)노동자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 그들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레닌, 《전집》, 제6권, 113쪽) 

이것은 레닌이 천부적일 정도의 심오함으로 실천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처음으로 제기한 노동자계급의 커다란 전략적 임무, 즉 피착취 계층인 빈농을 자본가계급의 영향으로부터 떼어내 우리를 뒤따르게 하는 임무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은 결코 역사에 의해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매끄러운 책략, 감언이설로 꾀려는 비열한 시도, 감상적인 장광설을 통해서는 수립될 수 없다.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은 정치적 역관계의 문제다. 따라서 다른 모든 계급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독자성의 문제다. 동맹세력은 먼저 교육받아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모든 진보적, 역사적 요구에 커다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동맹세력에 대해 조직화된 불신을 보여주고, 모든 반(反)노동자적 경향과 관습에 맞서 끊임없이, 그리고 가차 없이 싸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책략의 의미와 한계는 항상 명확하게 고려해서 구별해야 한다. 양보는 양보라고 부르고, 퇴각은 퇴각이라고 불러야 한다. 자신의 양보와 퇴각을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과소평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다. 계급의 경계심과 우리 당의 체계화된 불신은 반드시 유지해야 하며, 멈춰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 일반의 모든 역사적 행동에서처럼, 책략의 필수적 도구는 당이다. 그러나 당은 단지 책략에 ‘능통한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순종적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의 자주적 행동 일반을 최고로 표현하는 의식적이고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도구다. 따라서 모든 책략은 그것을 적용하는 내내 당 스스로 명백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외교적, 군사적 또는 음모적 비밀, 즉 노동자국가 또는 자본주의 상황에서 노동자당의 투쟁 기술이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책략의 정치적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쿨락에 대한 1924년에서 1928년까지의 방침이 거대한 책략이었다는 취지의 속닥거리는 설명이 불합리하고 범죄적이라는 것이다. 쿨락을 속일 수는 없다. 쿨락은 말이 아니라 행동, 세금, 가격, 순이익으로 판단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당―노동자계급과 빈농―은 확실히 속여 넘길 수 있다. 무원칙한 책략과 그 배후의 혼합주의만큼 노동자당의 혁명적 정신을 쇠약하게 하는 것은 없다.

모든 책략에 꼭 들어맞도록 가장 잘 수립된 제일 중요하고, 변경할 수 없는 규칙을 읽어보면 이렇다 : 여러분 자신의 당 조직을 이질적인 조직과 절대로 통합시키거나, 섞거나, 결합시켜서는 안 된다. 비록 이질적인 조직이 오늘날 가장 ‘동조적‘일지라도 말이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공개적으로나 은폐된 채로 여러분의 당을 다른 당들 또는 다른 계급의 조직들로 이끄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말라.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다른 당들의 정치노선에 대한 자유나 여러분 자신의 선동을 제한하고, 여러분의 책임을 위축시키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말라. 여러분은 다른 기치에 무릎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치를 혼동해서도 안 된다.

만약 책략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조직과 분자들을 병합과 속임수를 통해 표면적으로, 기만적으로, 외교적으로 묶고, 결합시키며, 일체가 되게 함으로써 자기 당의 발전을 앞지르려 하고, 그 발전에 필요한 단계들을 뛰어넘으려는(바로 이 점에서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성급한 기회주의적 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가장 해롭고 가장 위험한 것이다.

전투에서처럼 책략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전략적인 지혜만이 아니라 (혼합주의자들의 잔꾀는 더욱 아니다) 역관계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혁명정당이 적, 동맹세력, 준(準)동맹세력에 비해 더 미숙하고 더 약할수록, 올바로 꾀한 책략조차도 혁명정당에 그만큼 더 위험하다. 이런 이유로―우리는 여기에서 코민테른에 가장 중요한 지점에 이른다―볼셰비키당은 결국 그렇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책략을 만병통치약으로 쓰면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노동자계급에 깊숙이 그 뿌리를 내려 정치적으로 강해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성숙해지는 조치로 성장한 것이다. 

볼셰비키 전략의 아류들은 미숙한 공산당들에게 책략과 유연성을 볼셰비키 전략의 정수라고 격찬함으로써 이들을 그 역사적 주축과 원칙적 기초로부터 떼어내 무원칙한 혼합으로 돌려세운다. 이것은 유감스럽지만 흔히 우리 안에서 쳇바퀴 도는 다람쥐를 닮아 있다. 볼셰비키주의의 기본적 특성 역할을 한 것은 유연성이 아니라(오늘날에도 그런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돌 같은 단단함이었다. 적과 반대자들이 이를 비난하는 동안, 볼셰비키주의가 늘 정당하게 자랑스러워한 것이 바로 이 자질이었다. 더없이 행복한 ‘낙관주의’가아니라 비타협성, 경계심, 혁명적 의심, 모든 노동자의 독자성을 키우기 위한투쟁―이것들이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동방과 서방의 모든 공산당들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들은 우선 진짜 책략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물질적 가능성, 즉 자기조직의 힘, 충실함, 견고함을 준비함으로써 책략을 실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한다.

국민당과 총평의회에 대한 멘셰비키적 책략은 10배나 범죄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책략이 아직 연약한 중국과 영국 공산당들의 어깨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책략은 혁명과 노동자계급에게 패배를 안겼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투쟁을 위한 근본적 도구가 될 미숙한 공산당들을 오랫동안 짜부라뜨리고, 약화시켰으며, 그 토대를 침식시키기까지 했다. 동시에 이런 책략은 코민테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인 소련공산당의 대오로 정치적 타락의 요소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전략을 다루고 있는 강령 초안의 장은―최근의 장기인―책략에 대해 완고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치 입에 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관대한 비평가는 ‘침묵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화는 큰 오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수많은 사례들에서 보았고, 또 나중에 볼 것처럼, 강령 초안 자체가 나쁜 뜻, 즉 혼합주의라는 뜻에서 책략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불행이 존재한다. 초안은 자기 당에 대해 책략을 꾸민다. 몇몇 약한 지점에서 초안은 ‘레닌에 따르면’이라는 정식으로 가장한다. 다른 지점들에서는 침묵으로 회피한다. 이것이 오늘날 초안이 책략 전술을 다루는 방식이다. 중국과 영국의 새로운 경험을 언급하지 않은 채, 이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책략에 대한 언급 자체는 장개석과 퍼셀이라는 인물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은 이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인기 있는 주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더 좋아하고, 코민테른 지도부를 자유재량에 맡겨두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혼합주의자와 그 지원자들의 손을 묶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강령이 이바지해야 할 목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강령은 불필요할 것이다.

전략에 관한 장에는 사활이 걸린 투쟁일 수밖에 없는 계급의 적에 대한 혁명적 투쟁 중 책략을 보조적 방법으로 한정하고 그 한계를 정하는 근본적 규칙에 대한 부분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앞에서 지적했으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에 입각한 규칙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더 간결하고 정확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반드시 코민테른 강령에 나타나야 한다.


10. 내전의 전략

무장봉기 문제와 관련하여 강령 초안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한다.

‘이 투쟁은 전술규칙에 따른다. 이것은 군사계획, 전투작전의 공격적 성격, 노동자계급의 무한한 희생과 영웅주의를 전제로 한다.‘

이 점에서 강령 초안은 일찍이 마르크스가 한 몇 마디 통상적인 발언을 짧게 반복하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한편으로 10월 혁명을 경험했고, 다른 한편으로 헝가리와 바바리아혁명의 패배, 1920년 이탈리아 투쟁, 1923년 9월의 불가리아 봉기, 1923년 독일의 사태 전개, 1924년 에스토니아, 1926년 영국총파업, 1927년 빈 노동자계급의 봉기, 1925~27년 제2차 중국혁명을 경험했다. 코민테른의 강령은 승리를 보장 할 수 있는 무장봉기의 군사적, 전략적 조건과 방법뿐만 아니라 무장봉기의 사회적, 정치적 전제조건 모두에 대한 훨씬 더 명쾌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담아야 한다. 혁명 전략을 다룬 장이 코르넬리센과 길드 사회주의자들[오라쥬(Orage), 홉슨(Hobson), 콜(G.D.H. Cole) 둥의 이름이 전부 열거된]로 채워져 있을 뿐,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전략에 대한 일반적 설명도, 생생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결정적인 권력 장악 투쟁의 방법을 설명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만큼 이 문서의 피상성과 현학성을 드러내는 것은 없다. 

독일에서 비극적 경험을 겪고 난 1924년에 우리는 코민테른에 무장 봉기와 내전 일반의 전략과 전술 문제를 의제로 삼아 충분히 논의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문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무장봉기의 기간 문제는 흔히 오늘날 혁명의 근본적 임무에 대해서 스스로 수동적이고 숙명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매우 많은 서유럽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의식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터놓고 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접근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가장 심오하고 재능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주로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들의 관료적 기구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성격 형성기를 보냈다. 그녀는 쉼 없이 이 기구들이 대중의 창의력을 질식시킨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모든 사회민주주의적 장애물과 장벽을 전복시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운동에서 탈출구와 해결책을 찾아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둑을 넘쳐흐르는 혁명적 총파업은 룩셈부르크에게 노동자혁명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중적 힘에 의해 구별될지라도 총파업은 아직 권력 문제를 제기할 뿐 결정하지 못한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총파업을 기반으로 무장봉기를 조직해야 한다. 물론 로자룩셈부르크의 전체적 발전은 이런 방향으로 향해 있다 : 그녀는 마지막 말, 또는 끝에서 두 번째 음절도 끝맺지 못하고 무대를 떠났다. 그렇지만 아주 최근까지 독일공산당 내에서는 매우 강한 혁명적 숙명주의 경향이 퍼져 있었다.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 혁명이 가까이에 있다. 무장봉기를 불러일으킬 혁명은 우리에게 권력과 당을 가져다줄 것이다 … 그동안 혁명적 선동을 계속하고 결과를 기다릴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봉기의 날짜라는 단도직입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을 숙명적 수동성에서 깨워 기본적인 혁명적 임무 즉, 적의 수중에서 권력을 낚아채기 위해 무장봉기의 의식적 조직화로 돌려세우는 것이다.(1924년 7월 29일 군사학회 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트로츠키의 연설-〈프라브다〉지, 1924년 9월 6일자)

우리는 1871년 빠리꼬뮌에 상당한 시간과 이론적 노력을 쏟았지만 이미 내전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은 독일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완전히 무시했다. 예컨대, 우리는 작년 9월 불가리아의 봉기 경험에 거의 전념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결국 10월혁명의 경험을 기록보관소에 완전히 맡겨버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둔 유일한 노동자혁명인 10월혁명의 경험을 정성들여 연구해야 한다. 10월의 전략적, 전술적 일람표를 만들어야 한다. 사태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당,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군사조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물결 흐르는 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당내의 동요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사태의 전반적 흐름 속에서 그 특정한 영향력은 무엇이었는가? 군사조직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는 무한히 중요한 연구일 것이다. 이를 더 뒤로 미루는 것은 단연코 범죄일 것이다.(위의 글)

그렇다면 정확히 말해 임무는 무엇인가? 임무는 내전 문제, 따라서 무엇보다도 혁명의 최고점인 무장봉기에 관한 일반적인 참고서, 지침서, 편람, 법령집을 만드는 것이다. 여러 경험과 예비조건을 철저히 분석하고, 오류를 검토하고, 가장 올바른 작전을 골라내고, 도출해낸 필요한 결론으로부터 대차 대조표가 작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과학, 즉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경험에서 도출한 행동규칙의 총체인 기예를 풍부하게 할 것인가? 나는 전자와 후자 모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확실히 실천적인 것, 즉 혁명의 군사적 기예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글)

이러한 ‘규칙’은 불가피하게 구조적으로 매우 복잡할 것이다. 첫째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근본전제가 설명되어야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직 혁명 정치의 현장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봉기는 정치의 연속―단지 특별한 수단에 의한―이기 때문이다. 무장봉기의 전제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유형의 나라들에 적합하게 해야 한다. 노동자가 인구의 다수인 나라도 있고, 노동자계급은 미미한 소수이며, 농민이 절대 다수인 나라들도 있다. 이 양극단사이에는 과도적 유형의 나라들이 있다. 따라서 적어도 ‘상징적인’ 세 나라, 즉 공업국, 농업국, 그리고 중간에 있는 국가를 분석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서문(혁명의 전제와 조건들을 다루는)은 내전의 관점에서 이 세 유형 각각의 특수성에 대한 설명을 담아야 한다. 우리는 봉기를 이중의 각도, 즉 한편으로 역사발전 과정의 명확한 단계이자, 계급투쟁의 객관적 법칙의 명확한 반영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주체적 또는 능동적 관점 : 봉기의 승리를 가장 잘 보장하기 위해 봉기를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위의 글)

1924년에 내전 지침, 즉 계급의 공공연한 충돌과 독재를 위한 무장투쟁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지침을 정교화하려는 집단적 연구가 군사학회를 중심으로 모인 개인들의 큰 써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곧 코민테른 측의 반대에 부딪혔다―이 반대는 이른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이라는 총체적 시스템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는 나중에 완전히 청산되었다. 이보다 더 경솔하고 범죄적인 조치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 급격한 전환의 시대에, 앞서 제시한 의미에서 내전의 규칙은 당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혁명적 중핵 전체의 확고한 자산 목록의 일부여야 한다. 이런 ‘규칙’은 끊임없이 연구되어야하며, 자국의 새로운 경험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구만이 최고의 용기와 결단력이 요구되는 순간에 공포나 투항에 반하여, 마찬가지로 신중함과 참을성이 필요한 시기에 모험주의적 도약에 반하여 확실한 보증을 해줄 수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근본 사상을 이해한 모든 공산주의자의 의무만큼이나 진지한 연구인 이러한 규칙을 많은 책 속에 담았더라면, 우리는 당연히 최근에 당한 것과 같은 패배는 피할 수 있었다. 이 패배는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어리석을 정도의 경솔함으로 초래한 광동봉기는 특히 더 그렇다. 강령 초안은 이런 문제들을 거의 인도의 간디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이나 아까운 듯이 단 몇 줄로 처리한다. 물론 강령이 세부적인 것에 몰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령은 가장 중요한 성과와 오류들을 예로 들면서 문제를 충분한 범위에서 제출해야 하며, 그 기본 정식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과 전혀 무관하게 제6차 대회는 특별 결의로 지난 승리와 패배의 경험들에 기초하여 내전의 규칙을 편람으로 작성할 것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명령해야 한다.


11. 당내 제도의 문제

볼셰비키주의의 조직적 문제들은 강령, 전술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없이 관련되어 있다. 강령 초안은 이 문제를 ‘민주집중제의 가장 엄격한 혁명적 규율을 유지’할 필요성을 언급함으로써 단지 스치듯 다룰 뿐이다. 이것이 당내 제도를 규정하는 유일한 정식이다. 게다가 꽤 새로운 정식이다. 우리는 당 체제가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론상으로(그리고 실제로도 실행되었다) 다음을 전제로 삼는다 : 민주집중제는 선출 해임할 수 있는 지도기관의 전권을 위임받은 지도부 아래 행동에서 철의 규율을 지키는 것처럼, 당에 대해 토론하고, 비판하고, 불만을 표출하고, 선출하고, 해임할 충분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모든 기관들에 대한 당의 통치권으로 이해되었다면, 집중주의는 당의 투쟁능력을 보증한 의식적 규율의 올바른 확립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이제 과거의 모든 시련을 견뎌낸 당내 제도에 대한 이 정식에 ‘가장 엄격한 혁명적 규율’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기준이 덧붙여졌다. 단순한 민주집중제는 더 이상 당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이제 당은 민주집중제의 확실한 혁명적 규율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정식은 ‘혁명적 규율’이라는 아직 익숙지 않은 자기만족적 개념을 민주집중제, 즉 당 위에 간단히 올려놓는다.

민주주의와 집중주의라는 개념 위에 세운 혁명적 규율―그것도 ‘가장 엄격한’ 규율―이라는 이 개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당 기구가 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 또는 이러한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의미한다. 즉, 당원 대중과 관계없이 ‘규율’을 지키기로 되어 있으며, 당의 의지를 유예하거나 교란시킬 수 있는 자기만족적인 관료집단이 당규를 깔아뭉개고, 당 대회를 연기하거나 ‘규율’이 필요할 때마다 이 규율을 단순한 날조로 바꿔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기구는 민주주의와 집중주의 위에 올려진 ‘혁명적 규율’과 같은 정식을 오랫동안, 그것도 우회로를 통해 목표로 삼아왔다. 지난 2년 동안, 당 지도부의 가장 책임 있는 대표자들은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일련의 규정을 제시해왔다. 이런 규정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집중주의가 단지 상급기관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시켰을 뿐이다. 실제로 처리된 모든 일이 이런 방향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공동화시키는 집중주의는 관료적 집중주의다. 물론 이러한 ‘규율’은 당연히 민주주의의 형식과 관례에 따라 위장되어야 했다. 앞에서 나온 회람장을 통해 격려하고, 형법 제58조를 위협 삼아 ‘자기비판’할 것을 명령해야 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은 지도 중앙이 아니라 이른바 ‘집행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집행자들을 기소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집행자’가 다 자기 부하들의 지도자로 판명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정식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합리하다. 이 정식의 생소함과 불합리는 이것이 단지 농익은 특정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정식은 이를 만든 관료기구를 신성화한다.

이 문제는 분파나 집단화 문제와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다. 모든 논쟁적 문제와 모든 견해 차이에서 소련공산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과 그 전 지부의 지도부와 공식 기관지는 논쟁의 방향을 곧바로 분파나 집단화 문제로 돌렸다. 일시적인 이데올로기적 집단화가 없다면, 당의 이데올로기적 생명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다른 어떤 조치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를 알아보려고 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처방이 당의 이데올로기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과 같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견해 차이뿐만 아니라 집단화도 ‘악’이다. 그러나 이 악은 독소가 인간과 같은 유기체의 생명에 끼치는 것만큼이나 변증법적인 당 발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부분을 이룬다.

집단화의 조직화로의 변모, 게다가 폐쇄적인 분파로의 변모는 훨씬 더 큰 악이다. 당 지도부의 기예는 바로 이러한 발전을 막는 데에 있다. 단순한 금지로는 이를 성취할 수 없다. 소련공산당의 경험은 이를 가장 잘 증명하고 있다.

크론슈타트 봉기와 쿨락의 반란 여운 속에서 치른 제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분파와 집단화를 금지하는 결의문을 가결시켰다. 제10차 당 대회에서 집단화는 당이 존재하는 동안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일시적 경향이 아니라, 스스로 집단으로 행세한 분파와 똑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원 대중은 이때의 치명적인 위험을 명확히 이해했으며, 그 형태에서 분파와 분파주의를 금지시키는 엄격하고 단호한 결의문을 채택함으로써 당 지도자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당은 이 처방이 레닌이 지도하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해석될 것이라는 사실, 따라서 어설프거나 불성실한 해석은 없을 것이며, 더욱이 어떠한 권력 남용도 없을 것(레닌의 ‘유언장’을 보시오)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은 정확히 1년 뒤에, 또는 한 달 뒤에라도 당의 3분의 1이 요구한다면, 새로운 당 대회에서 그간의 경험을 검토하고, 필요한 유보조건을 달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은 전시공산주의로부터 신경제정책(NEP)으로의 매우 위태로운 전환에서 지배정당의 어려운 처지를 환기시킨 아주 가혹한 조치였다. 이 가혹한 조치는 단지 올바르고 현명한 정책을 보완하고, 신경제정책으로 이행하기 전에 나타난 집단화의 의표를 찔렀을 뿐이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에도 사려 깊은 해석과 적용이 요구된 분파와 집단화에 관한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은 결코 나라, 상황, 시대와 관계없이 당 발전의 다른 모든 요구들에 앞서는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다.

레닌의 사망 이후, 당 지도부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파와 집단화에 관한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에 의례적으로 입각한 것은 당 민주주의를 더욱 억압하기 위해서였지만, 동시에 그 실제 목적, 즉 분파주의의 제거를 달성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분파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에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레닌의 지도부 이탈 이후, 분파가 그렇게 당을 황폐화시키고, 당의 단결을 붕괴시킨 경우는 결코 없었다. 동시에 완전히 기만적이며, 결국 당의 명을 죄는 방법을 감추는 데 기여할 뿐인 100% 획일주의가 전에는 당을 지배한 적이 없었다.

당으로부터 비밀을 지킨 당 기구 분파가 제12차 당 대회 이전에도 소련공산당 안에서 생겨났다. 나중에 이 분파는 자체적인 통문, 요원, 암호 등을 포함하여 자신의 비합법 중앙위원회[7인조‘(the Septumvirate)]를 거느린 음모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당 기구는 당 대오 가운데에서 폐쇄적 집단을 엄선하는데, 이 집단은 통제받지 않으며, 당뿐만 아니라 국가기구의 엄청난 자원을 먹어치운다. 

또한 당원 대중을 자신의 혼합적 책략을 위한 단순한 구실이나 보조적 도구로 바꿔버린다.

그러나 이 폐쇄적인 당 기구 안의 분파가 더 대담하게 당원 대중의 통제―온갖 ‘동기’에 의해 더욱 희석된―에서 벗어날수록, 분파의 분열 과정은 아래쪽에서뿐만 아니라 당 기구 자체 안에서도 더 뿌리 깊고, 더 급격하게 진행된다. 제13차 당 대회에 즈음하여 이미 완료된 당에 대한 당 기구의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지배 속에서, 기구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견해 차이는 타개책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 결정을 위해 당에 호소하는 것은 기구를 다시 당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전에 다수파임을 확신한 당 기구만이 기구 민주주의의 방식, 즉 비밀 분파 성원들의 투표에 의지함으로써 논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 결과는 지배적인 기구 분파 안에서 적대적인 분파가 생겨나, 공통의 분파 안에서 다수파를 장악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국가 기구의 제도 속에서 지지를 구하려는 것이다. 당 대회의 다수파에 대해 말하면, 당 대회 자체가 자동적으로 보증한다. 왜냐하면 당 대회는 가장 형편이 좋고 적합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언제든 소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당과 노동자계급 독재 모두에 가장 끔찍한 위험이 되는 기구의 권력 찬탈이 전개되는 것이다.

1923~24년의 첫 번째 ‘반(反)트로츠키주의’ 캠페인이 이 기구분파의 도움으로 수행된 뒤, 7인조가 이끈 비밀 분파 안에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의 근본적 원인은 국제 정책뿐만 아니라 국내 문제에서도 시작된 퇴보에 대하여 레닌그라드 노동자 전위가 가진 계급적 불만이었다. 1923년에 모스크바의 선진 노동자들이 시작한 활동을 레닌그라드의 선진 노동자들은 1925년에도 계속했다. 그러나 이런 뿌리 깊은 계급적 경향은 당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런 경향은 기구 분파 내부의 소리를 죽인 투쟁에 반영되었다.

1925년 4월에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주의자’(!!)가 퍼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레닌주의자들’의 중핵 즉, 7인조 분파 안에 농민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는 소문을 부정하는 회람장을 당 전체에 돌렸다. 더 광범위한 당 중핵들이 이러한 견해 차이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안 것은 이 회람장을 통해서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지도적 중핵이 ‘반대파’가 ‘레닌주의 호위대’의 일체감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으로 당원들을 계속 속이는 것을 결코 막지 못했다. 이 선전은 지배적인 분파에 속하는 두 부위 사이의 애매하고 혼란한 차이, 그러나 그 계급적 기원에서 뿌리 깊은 차이가 돌연 당을 당황케 한 제14차 당 대회에서 본격적으로 퍼부어졌다. 당 대회 직전에 당의 주요한 두 요새인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조직은 지구협의회에서 정반대 성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둘 다 만장일치로 채택 되었다고 들었다. 모스크바는 레닌그라드 당 기구의 실력 행사를 비난함으로써 이런 ‘혁명적 규율’의 기적을 설명 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모스크바를 비난하는 것으로 답했다. 마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조직 사이에 뭔가 꿰뚫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 것처럼 말이다! 두 경우 모두, 당 활동의 모든 근본적 문제에서 당이 없음을 완전 획일적으로 증명하면서 당 기구가 어김없이 결정했다. 

제14차 당 대회는 여러 기본적 문제들에 관한 새로운 견해 차이를 해결하고, 무시당한 당의 등 뒤에서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회는 이 결정을 용의주도하게 엄선된 당 서기 계층에 즉시 위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제14차 당 대회는 ‘규율’의 방식 즉, 가면을 쓴 기구 분파의 독단적 권력에 따라 당내 민주주의의 청산을 향해 가고 있는 새로운 이정표였다. 투쟁의 다음 단계는 조금 전에야 시작되었다. 지배 분파의 기교는 항상 이미 채택된 결정,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기정사실을 당 앞에 들이대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이 ‘혁명적 규율’의 새롭고 더 높은 단계는 결코 분파나 집단의 해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은 당 기구 안에서뿐만 아니라 당원 대중 안에서도 과도하고 뚜렷한 발전을 이뤘다. 당에 관한 한, ‘집단화’에 대한 관료적 응징은 브란겔(Wrangel) 장교의 파렴치한 행위 때문에 형법 제58조로 경사되면서 훨씬 더 격렬해졌으며, 이 점에서 그 무능을 드러냈다. 동시에, 지배 분파자체 내에서 새로운 분열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도 최상층의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증하는 회람장과 부정직한 일체감의 과시가 많다. 실제로 그 극복 불가능성 때문에 격렬한 폐쇄적인 기구 분파 내부의 소리 죽인 투쟁을 암시하는 것은 모두 매우 긴장된 성격을 띠고 있으며, 당을 어떤 새로운 폭발로 몰고 가고 있다.

이것이 불가피하게 권력 찬탈의 이론과 실천으로 바뀌어버린 ‘혁명적 규율’의 이론과 실천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소련에 국한되지 않았다. 1923년에 분파주의에 대한 캠페인은 주로 분파들이 새로운 당의 맹아를 의미한다는 주장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농민이 압도적 다수이고 자본주의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당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도 유래했다. 이 가정은 그 자체로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올바른 정책과 올바른 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 정식화가 지배적인 소련공산당의 제10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을 부르주아 국가의 공산당들로 일체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관료적 체제는 나름의 게걸스러운 논리를 가지고 있다. 만약 소련 당내에서 민주적 통제를 허용할 수 없다면, 공식적으로 소련공산당 위에 있는 코민테른 내에서는 더욱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도부가 제10차 당 대회의 결정―이것은 당시에 소련의 특수한 요구를 충족시켰다―을 조잡하고 불성실하게 해석 적용하여 보편적 원칙을 만들고, 이를 전 세계의 모든 공산주의 조직에게로 확대시킨 이유다.

볼셰비키주의는 조직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역사적으로 구체적이었기에 항상 강했다. 무미건조한 계획은 없었다. 볼셰비키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가는 모든 이행기에 그 조직 구조를 철저하게 바꾸었다. 그러나 오늘날 ‘혁명적 규율’이라는 똑같은 원리가 중요한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독일공산당, 곧바로 혁명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미숙한 중국공산당, 소규모 선전집단일 뿐인 미국의 당은 물론이고, 강력한 노동자 독재의 당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미국의 당에서는 당시 지도를 맡은 페퍼가 당에 들이댄 방식의 올바름에 대해 의구심이 일자마자, ‘의심하는 자들’은 분파주의로 징계를 받았다. 대중과 어떤 실질적인 접촉도 없고, 혁명적 지도의 경험도 없으며, 이론적인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완전히 맹아 단계의 정치적 조직체를 의미하는 미숙한 당이 이미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혁명적 규율’의 모든 속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는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그 아버지의 옷을 입히고 꼭 맞는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데올로기와 혁명의 분야에서 소련공산당은 가장 거대한 경험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5년에 입증된 것처럼, 소련공산당조차 할 수 없이 자산을 보충하고, 끊임없이 늘리는 것 외에 그 자산의 이자만으로는 단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일은 당의 의지를 집단적으로 움직임으로써만 가능했다. 그렇다면 몇 년 전에 수립되었으며,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능력을 축적하는 초기 단계를 막 통과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공산당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당 생활의 진정한 자유, 토론의 자유, 자신의 방침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집단화를 통해 수립할 자유가 없다면, 이 당들은 결코 결정적인 혁명세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분파 결성을 금지한 제10차 당 대회 이전에, 소련공산당은 이러한 금지 없이 20년 동안 존재했다. 그리고 바로 이 20년 동안 훈련되고 준비했기에 소련공산당은 매우 힘든 전환에 즈음하여 제10차 당 대회의 엄격한 결정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서구의 공산당들은 처음부터 이 지점에서 시작했다.

레닌과 함께 우리는 국가의 강력한 자원으로 무장한 소련공산당이 이제 막 조직되고 있는 서구의 미숙한 당들에게 과도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엇보다도 우려했다. 레닌은 중앙집중주의의 길을 따라 조급한 발걸음을 성큼 내딛는 것에 대해, 이 방향으로 지나치게 경도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상임간부회의의 경향에 대해, 특히 의견을 묻지도 않고 직접 지휘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지원 형식과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했다.

1924년에 ‘볼셰비키화’라는 이름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만약 볼셰비키화를 이질적인 요소와 습관, 자리에 집착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관료, 프리메이슨, 평화주의적 민주주의자, 관념적 바보 등을 당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이 임무는 코민테른이 존재한 첫날부터 이미 수행되고 있었다. 제4차 대회에서 프랑스 당과 관련한 이 임무는 매우 과격한 전투 형태를 띠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전에 진정한 볼셰비키화는 코민테른 각국 지부의 개별적 경험들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이런 경험들로부터 생겨났다. 이것은 국제적 임무가 될 정도로 커진 국내정책의 문제들을 자신의 시금석으로 갖고 있었다. 1924년의 ‘볼셰비키화’는 완전히 희화적인 성격을 띠었다. 공산당의 지도기관들은 관자놀이에 권총이 겨눠진 채 어떤 정보나 토론도 없이 소련공산당의 내부 논쟁에 근거한 최종적 입장을 즉시 채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게다가 공산당들은 코민테른에 머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자신들이 취하는 입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공산당들은 1924년에는 러시아에서 논의 중인 문제들에 대해 재빠르게 결정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바로 이때,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독재의 새로운 단계로부터 생겨난 두 가지 원칙적 경향이 형성 단계에 있었다. 물론 숙청작업은 1924년 이후에도 필요했으며, 이질적 요소들은 많은 지부들에서 꽤 올바르게 제거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볼셰비키화’는 이것에 있었다 : 국가기구를 강타하면서 위로부터 추진된 러시아의 논쟁이라는 쐐기로 인해 바로 이때 서유럽의 공산당들에서 구성되고 있던 지도부는 거푸 와해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반(反)분파주의 투쟁의 기치 아래 진행되었다. 

만약 오랫동안 투쟁능력을 마비시킬 위험이 있는 분파가 노동자 전위당 안에서 형성된다면, 물론 당은 어느 경우나 추가적 재검토에 더 많은 시간을 배분할 것인지 아니면 곧바로 분열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할 것인지 결정할 필요성에 직면할 것이다. 전투정당은 결코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분파들의 총합일 수 없다.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더라도,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열을 견해 차이에 대한 예방책으로 쓰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모든 그룹과 집단화를 잘라내는 것은 당내 활동을 일련의 조직적 낙태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종(種)의 존속과 발전을 촉진하지 못하며, 단지 모체인 당을 지치게 만들 뿐이다. 반(反)분파주의 투쟁은 분파 결성 자체보다 훨씬 더 위험하게 된다. 

현재 우리는 세계의 거의 모든 공산당들의 실제 창시자와 설립자들 이 인터내셔널과 분리된 상황에 있다. 코민테른의 전 의장도 예외가 아니다. 당 발전에서 연속적인 두 단계의 지도적 그룹은 거의 모든 당에서 제명되거나 지도부에서 쫓겨난 상태다. 독일의 브란틀러 그룹은 오늘날 까지 준(準)당원 상태에 있다. 마슬로프 그룹은 당 밖에 있다. 프랑스에서는 로스메르(Roamer), 모나트(Monatte), 로리오(Loriot), 수바린(Souvarine)의 고참 그룹은 물론이고 뒤이은 시기의 지도그룹인 지로-트렘 그룹도 제명되었다. 벨기에에서는 판 오버스트라에텐[바르 판 오버스트라에텐(War Van Overstraeten):벨기에공산당의 지도자]의 기본 그룹이 제명되었다. 만약 이탈리아공산당의 창립자인 보르디가(Bordiga) 그룹이 반쯤 제명되었다면, 이는 파시스트 체제라는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노르웨이, 미국에서, 한마디로 세계의 거의 모든 당에서 우리는 탈(脫)레닌주의 시기에 일어난 것과 다소 비슷한 현상을 보고 있다.

제명당한 많은 사람들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을 지적하는데서 뒤늦은 적이 없다. 제명당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코민테른으로부터 버림받은 뒤, 자신의 이전 출발점, 즉 좌익 사회민주주의 또는 조합주의로 되돌아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코민테른 지도부의 임무가 각국 공산당의 미숙한 지도부들을 매번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결과적으로 그 개별 대표자들에게 이데올로기적 타락을 선고하는 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관료적 지도부의 ‘혁명적 규율’은 코민테른의 모든 당들의 발전 도상에서 끔찍한 장애물이다.

조직적인 문제는 강령, 전술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코민테른에서 기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는 지도정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자체에서도 기구의 관료적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1923~28년의 경험을 겪고 나서, 소련에서 관료주의는 비(非)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가한 압력의 표현이자 수단이라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코민테른의 강령 초안이 관료적 왜곡은 ‘대중의 불충분한 문화적 수준과 노동자계급에게 이질적인 계급적 영향력이라는 토양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다’고 말하는 경우라면, 이 점 에서는 올바른 정식을 담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관료주의 일반은 물론이고 최근 5년 사이의 그 놀랄만한 성장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불충분하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문화적 수준은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관료주의의 성장 원인은 노동자계급에게 이질적인 계급적 영향력의 증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유럽의 공산당들, 즉 주로 그 지도기관들이 소련공산당 기구 내의 변화와 재편에 조직적으로 동조함에 따라, 해외 공산당들의 관료주의는 대부분 소련공산당 내 관료주의를 반영하거나 보충했을 뿐이다.

공산당에서 지도적 분자의 선발은 주로 이들이 가장 최근에 일어난 소련공산당내 기구의 [개별]집단화를 수용하거나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에서 진행되어왔으며,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순전히 행정적인 태도로 조직을 개편하거나 재편성하는 것에 따르지 않으려고 한 해외 공산당 지도부 안의 더 자주적이고 책임 있는 분자들은 당에서 완전히 제명되거나, 우익(대개 사이비 우익)으로 쫓겨 가거나, 아니면 결국 좌익반대파 대오에 가담했다. 이런 식으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 투쟁에 기초하여 혁명적 중핵을 선발하고 접합시키는 유기적 과정은 중단되고, 변경되었으며, 왜곡되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행정적이고 관료적인 위로부터의 선별로 직접 대체되기도 했다. 당연히 이미 난 결정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결의도 승인할 최선의 준비가 된 이런 지도적 공산주의자들은 흔히 혁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고취된 당원들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검증받고 동요하지 않는 혁명가를 선발하는 대신에, 흔히 가장 잘 순응한 관료들이 선발되었다.

국내와 국제 정책의 모든 문제들은 늘 우리를 당내 제도의 문제로 돌아오게 한다. 확실히 중국혁명과 영국노동운동의 문제, 소련의 경제, 임금, 세금 등의 문제에서 계급 노선으로부터의 일탈은 중대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은 관료체제가 당의 손발을 묶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당의 최상층 지도부의 노선을 교정할 기회를 일체 박탈하기 때문에 10배로 높아진다. 동일한 것이 코민테른에도 적용된다. 더 민주적이고, 더 집단적인 코민테른 지도부의 필요성에 대한 소련공산당 제14차 당 대회의 결의는 실제로 그 안티테제로 바뀌어버렸다. 코민테른의 내부 체제상의 변화는 국제 혁명운동에 사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변화는 두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소련공산당의 내부 체제상의 변화와 나란히 하거나, 코민테른에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그것이다. 첫째 방식의 채택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소련공산당의 내부 체제상의 변화를 위한 투쟁은 코민테른의 체제를 혁신하려는 투쟁이며, 코민테른에서 우리 당의 지도적인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유지하려는 투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살아 있는 당, 활기 있는 당이 종신통치적 당 관료집단의 ‘혁명적 규율’이라는 통제에 종속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강령에서 가차 없이 삭제할 필요가 있다. 당 자신은 자기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당은 다시 한 번 당이 되어야한다. 이것은 강령에서 관료주의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나 권력 찬탈 경향에 여지를 주지 않을 그런 말로 지지되어야 한다.


12. 반대파 패배의 원인과 그 전망

많은 문서―그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의 강령》이다―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낸 당의 좌익 노동자는 1923년 가을부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멸 캠페인을 겪었다. 당내 제도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 탄압 방식은 비(非)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에 가한 압력이 더 강해진 정도만큼 더 관료적으로 되었다. 이러한 방식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은 공산당 내에서 중도주의적 기회주의 경향이 더 강해지고, 게다가 최근 몇 달까지 중도주의가 체계적으로 우경화한 사이에, 노동자계급이 가장 큰 패배를 겪고, 사회민주주의가 다시 소생한 시기의 일반적인 정치적 성격 때문이었다. 반대파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독일혁명의 패배 직후에 자행되었다. 말하자면, 이 패배를 벌충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공격은 독일 노동자계급이 승리했다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독일 노동자계급의 승리는 소련 노동자계급의 자신감을 엄청나게 드높이고, 따라서 내외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압력과 이 압력을 전달하는 당 관료집단에 대한 저항력도 증대시켰을 것이다. 

1923년 말부터 코민테른에서 일어난 재편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도그룹이 반대파가 퇴보한 여러 단계에서 반대파를 상대로 거둔 조직적인 ‘승리’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차근차근 검토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강령 조안을 비판하는 틀 내에서는 이렇게 할 처지가 못 된다. 그러나 1924년 9월에 반대파에 대한 첫 번째 ‘승리’가 어떻게 생각되고 설명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부합한다. 국제 정책 문제에 관한 데뷔 글에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 내에서 혁명적 분파의 결정적 승리는 지금 노동자계급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심원한 혁명적 발전 과정의 가장 확실한 징후다.…’

같은 글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이것에 소련공산당 내 기회주의적 경향의 완전한 고립이라는 사실을 덧붙인다면, 그림은 완벽할 것이다. 제5차 대회는 단지 코민테른의 기초를 이루는 지부들에서 혁명적 분파의 승리를 공고히 했을 뿐이다.’(〈프라브다〉지, 1924년 9월 20일자. 트로츠키의 강조) 

따라서 소련공산당 내 반대파의 패배는 왼쪽으로 나아가고 있던 유럽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향해 곧장 행진하고,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들에서 혁명파가 기회주의자들보다 우세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의 결과라고 선언되었다. 국제 노동자계급이 1923년 가을에 가장 큰 패배를 겪은 뒤로 대략 5년이 지난 지금, 〈프라브다〉지는 ‘1923년의 패배 뒤에 시작되어, 독일 자본이 그 지위를 공고히 하도록 내버려둔 일정한 무관심과 실의의 물결’(〈프라브다〉지, 1928년 1월 28일자)이 이제야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 우리에게는 새롭지 않지만 코민테른의 현 지도부에게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 그렇다면 1923년과 뒤이은 수년 동안의 반대파의 패배는 노동자계급의 좌선회가 아니라 우선회를 통해 설명 되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결정적이다.

1924년의 제5차 대회와 그 뒤 여러 글과 연설에서 제시된 대답은 분명하고 단정적이었다 : 유럽의 노동운동 내에서 혁명적 요소들의 강화, 새로운 상승 물결, 다가오는 노동자혁명―이 모든 것이 반대파의 ‘완패’를 낳았다.

그렇지만 이제, 1923년 이후 정치적 국면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을 향해 뚜렷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전환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일반적으로 인정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다른 사실, 즉 반대파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어 격화되고, 이 투쟁이 반대파를 제명하고 유형에 처할 정도로까지 고조된 것은 유럽에서 진행된 부르주아적 안정의 정치적 과정과 아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똑같이 부정할 수 없다. 확실히 최근 4년 동안의 주요한 혁명적 사태는 이 과정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1923년 독일에서 범한 오류보다 더 쓰라린 지도부의 새로운 오류는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에게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 매번 적에게 승리를 가져다줌으로써 부르주아적 안정의 지속을 위한 새로운 원천을 만들어냈다. 국제 혁명운동은 패배를 겪었으며, 이와 함께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좌익적, 노동자적, 레닌주의 분파는 패배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세계정세에서 기인하는 소련의 경제, 정치생활상의 내적 변화과정을 간과한 것은 이런 설명을 불완전하게 한다 : 즉, 신경제정책(NEP)에 근거한 모순이 증대하고 있었는데, 불균형과 산업화의 임무를 과소평가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경제적 ‘노농동맹’(smychka)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지도부는 계획경제 등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유럽과 아시아 노동자혁명의 패배에 기초하여 국내에서 관료와 소부르주아 계층의 경제적, 정치적 압력이 증대했다―이것이 이 4년 동안 반대파의 목을 죈 역사적 굴레였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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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석에서 우리는 중요한 거의 모든 각각의 단계에서 트로츠키주의라는 명목으로 거부된 노선을 실제로 관철된 노선에 대비시켜야 했다. 일반적 측면에서 이 투쟁의 의미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아주 명확하다. 만약 지난 25년 동안의 실제적이거나 가공적인 수많은 인용문 제시로 보강된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비난이 일시적으로 혼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이 점에서 지난 5년의 이데올로기 투쟁에 대한 응집력 있고 일반화된 평가는 두 노선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일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식적이고 일관된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소련의 내부 문제와 세계혁명의 문제들에 대한 적용에서 레닌의 이론적, 전략적 원칙을 확대 발전시킨 것이었고, 반대파의 노선이었다. 두 번째 노선은 무의식적이고, 모순적이며 동요하는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국제 정치의 퇴조기에 적대적인 계급역관계의 압력을 받아 레닌주의로부터 갈지자로 퇴보한 공식 지도부의 노선이었다. 거대한 전환점에서 인간은 흔히 습관적인 말투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특히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바란 사람들의 일반적 법칙이다. 본질적인 점에서 거의 전부 레닌을 수정함과 동시에, 지도부는 이 수정주의를 레닌주의의 발전인 체하는 한편, 레닌주의의 국제혁명적 본질을 트로츠키주의로 간주했다. 이들은 표면상으로나 내면적으로 모두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자신의 퇴보 과정에 더 쉽게 적응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했다.

이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을 트로츠키주의의 전설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했다는 저속한 비난을 퍼 붓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강령 초안은 이 전설로 속속들이 물든 이데올로기적 시기의 산물이다.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은 이 전설의 대부분을 키운 사람들이다. 늘 이 전설로부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측정하는 요술지팡이로 이 전설을 이용했다. 초안 전체는 바로 이 시기를 반영한 것이다.

정치사는 새롭고 이례적으로 교훈적인 한 장(章) 때문에 풍부해졌다. 이 장에는 신화의 힘, 아니면 더 간단하게 정치적 무기로서의 이데올로기적 비방에 대한 장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은 이 무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의 도약’을 이루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는 여전히 반(反)계몽주의, 편견, 미신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 특정한 이해관계나 전통적 관습에 부합하는 신화는 항상 계급사회에서 거대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신화가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국가권력의 모든 자원을 임의로 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 신화에만 기초해서는 특히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우리 시대에는 탁월한 정책, 무엇보다도 혁명적 정책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 신화는 불가피하게 자기모순이라는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모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이미 작은 부분을 언급했다. 외부 환경이 우리의 분석을 끝까지 수행하게 내버려둘 것인지 여부와 완전 무관하게, 우리는 우리의 주체적 분석이 역사적 사태가 제공할 객관적 분석에 의해 지지될 것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최근 의회 선거에서 나타난 유럽 노동자 대중의 급진화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급진화는 이제 막 초기 단계를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혁명의 최근 패배와 같은 요소는 급진화를 방해하며,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 경로로 몰아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과정이 가까운 장래에 어느 정도의 템포로 진행될 것인지 예측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어쨌든 이 급진화는 공산당 쪽으로 끌리는 경향이 사회민주주의의 거대한 예비군을 희생시키면서 증대하기 시작하는 순간에만 새로운 혁명적 상황의 전조가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직까지는 이러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강철 같은 필연성으로 반드시 일어 날것이다.

체제 전체를 바꾸지도 않고,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혁명적 분자들에 대한 조직적 투쟁을 그만두지도 않은 채, 키를 왼쪽으로 돌리려는 내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는 코민테른 지도부의 애매한 현재태도―이 모순적 태도는 반대파의 예측을 완전히 확증해준, 소련 내부의 경제적 어려움에 타격을 받아서만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유럽 노동자 대중의 급진화의  단계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민테른 지도부 정책의 절충주의, 강령 초안의 절충주의는 말하자면, 국제 노동자계급의 현재 상황을 찍은 스냅사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제 노동자계급은 사태발전 과정에 의해 왼쪽으로 내몰렸지만 독일 사회민주의의에 9백만 표 이상을 투표하면서 아직까지 자기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 이상의 진짜 혁명적 고양은 노동자계급 내에서, 코민테른을 포함하여 모든 노동자계급 조직들 속에서 일어날 어마어마한 재편을 의미할 것이다. 이 과정의 속도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어느 노선을 따라 구체화가 일어날지는 확실히 분간할 수 있다. 노동자 대중은 사회민주주의로부터 공산당으로 한 부위씩 옮겨갈 것이다. 공산주의 정책의 축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더욱 이동할 것이다. 동시에, 1923년 말 독일 노동자계급의 패배 이후 쏟아지는 비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시류를 거스를 수 있는 그룹에 대해 견실히 볼셰비키 노선을 지키라는 요구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조작되지 않은 진짜 레닌주의 사상으로 코민테른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 결과 전 세계 노동자계급 속에서 승리를 거둘 조직적 방식은 대부분 코민테른의 현 지도부, 따라서 직접적으로는 제6차 대회에 달려 있다.
그렇지만 이 대회의 결정이 어떠한 것이 되던―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있다―현 시대와 그 내적 경향들에 대한 전반적 평가, 특히 지난 5년간의 경험에 대한 평가는 반대파에게는 다름 아닌 코민테른이라는 수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도 우리를 코민테른으로부터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방어하는 사상이 코민테른의 사상이 될 것이다. 이 사상은 코민테른의 강령에서 그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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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 원리

    수바린(Souvarine)처럼 썩을 대로 썩은 회의론자들은 변증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맑스주의자들"이 있다. 이런 맑스주의자들은 [월간 현대](Modern Monthly)의 지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소수파 내부에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악성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청년 동지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

    변증법은 소설같은 허구도 아니며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고 형식의 과학으로서 일상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좀더 복잡하고 과정이 장기화된 사물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사이의 관계는 고등수학과 하등수학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여기서 아주 간략하게 문제의 핵심을 제시해 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 삼단논법은 "갑"은 "갑"과 같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가정은 수많은 인간의 실제 행동과 초보적인 일반화 작업의 공리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갑"은 "갑"과 같지 않다. 이 두 글자를 렌즈로 비추어 보면 이 점은 쉽게 증명된다. 이 두 글자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글자의 크기나 형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 글자들은 설탕 1파운드와 같이 같은 양을 나타내는 상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등등. 그러나 이 반대 의견은 논점을 벗어나고 있다. 실제로 설탕 1파운드는 설탕 1파운드와 결코 같지 않다. 좀더 세밀하게 측정하는 저울은 언제나 이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여기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설탕 1파운드는 자기 스스로와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의견도 사실과는 다르다. 모든 물체의 크기, 무게, 색깔 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물체들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여기에 대해서 궤변가는 이렇게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는 "특정 순간에"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있다. 이 "공리"의 지극히 의심스러운 실제적 가치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 공리는 이론적인 비판에 견딜 수 없다. "순간"이란 말을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만약 이 순간이 극미한 시차라면 설탕 1파운드는 이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혹시 이 "순간"이란 것이 0시와 같이 순전히 수학적인 추상적 개념은 아닌가?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존재 자체가 곧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시간은 존재의 기본 요소이다. 따라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사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즉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이러한 "세세한 논리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논리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금까지 얘기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모든 지식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오류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공리는 특정 한도 내에서만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의 양적인 변화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에서 무시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공리는 인정될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를 거래할 때가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태양의 온도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주 최근까지 달러화의 구매력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특정 한도를 넘어선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바뀐다. 물이나 등유에 담긴 설탕 1파운드는 더 이상 설탕 1파운드가 될 수 없다. 회사 사장이 가지고 있는 1달러는 단순한 1달러가 아니라 이윤추구의 도구가 된다. 양이 질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점을 제때에 파악하는 것은 사회학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 분야가 해결해야할 중요하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다. 원추형 베어링을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는 인정된다. 그러나 이 오차는 정해진 한도를 넘어서면 안된다. 이 오차 허용치 안에 들어오는 원추형 베어링은 모두 같은 것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이 오차 허용치를 넘어서면 양은 질로 나아간다. 즉 원추형 베어링은 품질이 떨어지거나 아주 못쓰게 된다. 과학적 사고는 기술 분야 등과 같은 실제 활동에서 사용되는 사고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형식 논리의 출발점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한다는 공리는 변증법적 논리의 출발점이다. 이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서 정해지는 "오차 허용치"가 개념들을 규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상식"은 변증법적 "오차 허용치"를 체계적으로 초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 사고 즉 상식은 자본주의, 도덕, 자유 , 노동자국가 등과 같은 개념들을 고정된 추상적 개념으로 보면서 논리를 전개한다. 이 결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와 같으며 도덕은 도덕과 같다는 식으로 가정한다. 반면에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갑"은 더 이상 "갑"이 아니며 노동자국가는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되지 않는 결정적인 시점이나 한도를 결정한다.

    일반적 사고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실이 남긴 고정된 흔적에 만족하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일반적 사고방식이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좀더 면밀한 파악, 교정, 구체화 등을 통해 개념들에게 풍부한 내용과 신축성을 부여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현상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개념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즉 일반적인 의미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 발전단계의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일반적인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포위된 후진국 러시아의 노동자국가를 제시한다.

    변증법적 사고와 일반적 사고의 관계는 움직이는 화상과 정지된 사진의 관계와 같다. 움직이는 화상은 정지된 사진의 법칙을 넘어서지 않는다. 다만 정지된 사진들을 운동의 법칙들에 따라 결합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법은 삼단논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삼단논법들을 결합시킨다. 헤겔은 [논리학](Logic)에서 일련의 법칙들을 수립했다. 양의 질로의 전화, 모순을 통한 발전, 가능성의 불가피성으로의 전화 등등. 단순 삼단논법이 좀더 기초적인 작업들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만큼 변증법적 법칙들은 이론적인 사고를 위해 중요하다.

    헤겔은 다아윈과 맑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이 사상에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한 덕분에 헤겔은 과학의 일반적 발전과정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비록 천재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첫걸음이었기 때문에 이 첫걸음은 헤겔에 의해서 관념적인 성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관념의 그림자들을 궁극적 현실로 잘못 바라보았다. 그러나 맑스는 이 관념적 그림자들의 운동이 물질세계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변증법 앞에 유물론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이유는 이 사고 방식의 뿌리가 하늘나라나 "자유의지"라는 심오한 영역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 즉 자연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의식에서, 심리학은 생리학에서, 유기 세계는 무기 세계에서, 태양계는 성운으로부터 나왔다. 물질의 모든 발전단계에서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탈바꿈했다. 변증법적 사고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사고는 변화하는 물질의 표현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물질환경 내에서는 신 , 악마, 불멸의 영혼, 법과 도덕의 영원한 기준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의 변증법은 자연의 변증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철저하게 물질적 성격을 띤다.

    다아윈은 종의 진화를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함으로써 유기체 분야 전체에서 변증법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구가했다.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모한다는 사실과 원소 주기율표가 발견된 것도 역시 변증법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했다.

    사회과학에서와 같이 자연과학에서도 분류의 문제는 종과 원소 등의 변모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8세기에 창안된 린네(Linn )식 체계는 종의 불변성에 기초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외형적 특징에 따라 식물들을 묘사하고 분류하는 데에 머물렀다. 식물학의 유아기는 논리학의 유아기와 흡사하다. 왜냐하면 사고 형태들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처럼 변화 발전하기 때문이다. 종이 불변한다는 사고가 결정적으로 반박되고 식물 진화의 역사와 식물 해부학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진정한 과학적 분류법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다아윈에 비해 맑스는 의식적으로 변증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생산력의 발전과 소유관계의 구조를 통해 인간사회를 과학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의 기초를 발견하였다. 그는 현재까지도 대학사회에서 풍미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대개의 분류법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분류법을 창안하였다. 노동자국가의 개념과 이 국가의 붕괴 순간은 맑스의 방법론을 통해서만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에는 "형이상학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자만에 가득 찬 무식한 인물들은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적 논리는 현대의 과학 사상을 통해 운동의 법칙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투쟁은 까마득한 과거, 쁘띠부르조아의 보수주의, 대학교 분위기에 물든 인물들의 자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희망의 깜빡거림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 진화와 변증법

    버넘 동지는 자신이 진화론자이며 우리 변증법 옹호자들만큼 사회와 국가형태의 발전 과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아윈 이래 모든 교육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진화론자"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진정한 진화론자라면 진화론을 자신의 사고 형식에 적용시켜야 한다. 진화론 자체가 아직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창시된 초보 논리학은 진화 과정들을 분석하는 데 확실히 불충분하다. 헤겔의 논리학은 진화의 논리학이다. "진화"의 개념 자체가 대학 교수들과 자유주의 저술가들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하고 근본 정신이 희석되어 이제는 평화적인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진화는 적대적 세력들의 투쟁을 통해 진행되며 일정 시점에서 변화의 완만한 축적은 사물의 껍질을 깨뜨리고 파국과 혁명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진화의 일반법칙들을 사고 자체에 적용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은 속류 진화론자와 구별되는 변증법 옹호자이다. 피아노 연주자가 손가락 운동을 하듯이 혁명 투사에게는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문제들을 움직이지 않는 범주들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속류 진화론자들은 특정 영역에 대해서만 진화를 인정하는 선에서 머문다. 그리고 이외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식"이라는 뻔한 말들만 늘어놓는 것에 만족한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는 소련의 존재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소련 관료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최소한 독소불가침조약이 있기 전까지는 소련 체제가 대체로 "진보적인 것"이며 관료집단의 혐오스러운 특징들은 ("이것들은 원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점차 탈각되어 평화적이며 고통이 없는 "진보"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소련의 내부 모순들과 동력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소련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점에서 속류 쁘띠부르조아 급진주의자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와 비슷하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점령한 후 이제 핀란드를 점령하자 속류 급진주의자들은 승리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방법론이 그 올바름을 증명받았다! 그러나 점령군 당국이 점령지 인민들에게 지주와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권유했을 때 이들은 이 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관료적-군사적 방식으로 수행된 사회의 혁명적 조치들은 우리의 변증법과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한 우리의 규정을 반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규정의 올바름을 논란의 여지없이 입증시켰다. 이러한 맑스주의 분석의 승리를 참을성 있는 선동으로 활용하는 대신에 이들은 범죄행위에 속하는 경박함을 드러내며 사건들이 우리의 예상을 거부했으며 우리의 분석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으며 새로운 용어들이 필요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무슨 용어들이 필요한 것일까?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소련의 방어

    우리는 철학에서 시작하여 이제 사회학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겼다. 그런데 이 두 영역에서 소수파의 두 지도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은 반(反) 맑스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또 한 명은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음이 명백해졌다. 이제 정치 특히 소련 방어의 문제를 다룰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정도의 커다른 놀라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소수파는 우리 강령의 입장인 "무조건적 소련 방어"가 "애매하고 추상적이며 시대에 뒤진(!?)" 것임을 발견했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미래의 어떤 "조건들" 속에서 혁명의 성과들을 기꺼이 방어할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의 새로운 입장에 최소한 약간의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 결과 적군(赤軍) 과 비밀경찰을 도구로 하여 소련 관료집단이 추구한 국제정책을 그동안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혔다! 사실 이미 오랫동안 우리는 소련 관료집단을 봉기를 통해 타도할 필요성을 특히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후 조건적으로라도 관료집단의 국제정책을 방어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소수파의 잘못된 노선은 지금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임무들을 갈갈이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노선마저 거짓으로 윤색하고 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실렸으며 이미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버넘과 섁트먼은 환멸을 느낀 지식인 집단을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The League of Abandoned Hopes)"이라고 재치있게 표현한 후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이 군사적으로 대결할 때 이 한심한 동맹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집요하게 물었다. 이들은 이렇게 썼다: "따라서 히틀러나 일본 또는 영국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소련을 방어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훅(Hook), 이스트먼, 리용(Lyons) 등이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선언할 것을 이 기회를 빌어 요구한다 등등 " 버넘과 섁트먼은 어떠한 "조건"도 내걸지 않았고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들을 명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이 동맹 역시 입장을 취하기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중립을 선언할 것인가? 한마디로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 없이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할 것인가?" (강조는 인용자) 놀라자빠질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강령이 선언하는 바이다. 1939년 1월 버넘과 섁트먼은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입장을 지지했으며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인 방어를 한다고 완벽하게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 글은 스페인 혁명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에 작성되었다. 스페인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보여준 범죄적 정치행동은 폴란드나 핀란드에서의 경우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 했다고 캐넌 동지는 아주 올바르게 표현했다. 전자의 경우 소련 관료집단은 교수형 집행인이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목을 매달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관료적 방식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시키고 있다.

    그런데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이 선언한 입장으로 왜 갑자기 돌아섰는가? 왜? "사건들의 구체성" 때문이라고 섁트먼은 지극히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설명다운 설명이 아니다. 그러나 설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스페인 공화군 진영에 참여함으로써 소련은 전세계 부르조아민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스탈린의 행동은 똑같은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미친듯한 비난을 받았다. 버넘과 섁트먼은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의 여론에 동조했을 뿐이다. 이것이 진짜 설명이다. 온갖 시끄러운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소수파의 입장은 당내에서 "좌파" 쁘띠부르조아들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사실은 불행하게도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뭔가 `참신한' 것을 통해 운동에 공헌하고 있으며 `새로운 경험들에 비추어 자신들을 다시 평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전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거부하는 `교조주의자'(`보수주의자'? - 필자)는 아니라는 것 등을 믿으며 이 점에 대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자기기만인가! 이들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사실들을 드러내거나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첨가하지 않았다." 이 두 동지들은 참으로 멋지게 글을 인용하고 있다!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 우리가 새로운 장(章 )을 하나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섁트먼 동지의 이러한 노력에 협력할 것을 나는 제안하는 바이다

    노동계급의 대의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버넘과 섁트먼 과 같은 뛰어난 동지들이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의 별로 무섭지도 않는 신사분들에게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버넘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으며 섁트먼이 방법론 자체를 경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올바른 방법론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든다. 또한 모든 새로운 결론들을 이전의 결론들과 연속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에 이 결론들은 쉽게 기억에 남는다. 정치적 결론들이 경험적으로 도출되거나 일관되지 못한 결론들이 일종의 장점으로 선언된다면 맑스주의의 정치 체계는 반드시 인상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너무나 많은 측면에서 인상주의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특징이다. 사태의 급격한 전환은 경험주의자-인상주의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전에 새로운 표현을 구사하려는 불타는 열망을 드러낸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

    소수파는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에 대해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아마 약간 수정만 하면 보르디가(Bordiga), 베레컨(Vereecken), 스니블릿(Sneevliet), 페너 브락크웨이(Fenner Brockway), 마르쏘 삐베르(Marceau Pivert) 등과 같은 기회주의자들도 이 문서에 서명할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결코 이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 소련 관료집단의 특징들과 소련군이 "침략"했다는 사실들만을 담고 있는 이 문서는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글은 핀란드와 소련을 같은 수준에 놓으면서 한치의 여지도 없이 "양국 정부와 군대들을 모두 비난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의 필자들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알아채리고서는 글 내용과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없이 느닷없이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 전망을 적용(!)시킬 경우 당연히(이 "당연히"란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제4인터내셔널은 핀란드와 소련의 각기 다른 경제관계들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진주처럼 빛난다. "구체적인" 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상황이란 군사적 상황, 대중의 정서, 양국의 서로 반대되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구체적인" 상황들이 어떻게 "고려될 " 것인지에 대해서 이 결의문은 조금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소수파가 전쟁과 관련하여 "양국 정부와 군대들 모두"를 똑같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군사적 상황과 사회체제의 차이들을 "고려할 "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의심할 여지없는 죄악을 벌주기 위해 이 결의문은 모든 색조의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과 같이 핀란드에 진주한 적군이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통제를 도입하면서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내일이면 스탈린 일당은 핀란드 노동자운동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가장 날카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을 대대적으로 촉진시키고 있으며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소수파 지도자들은 현재 핀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개념들과 고상한 감정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전쟁은 내전에 의해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군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들과 같은 편이 되어 있다. 한편 핀란드 군대는 유산계급, 보수적 노동 관료층,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의 빈곤층에게 적군이 일깨우고 있는 희망은 국제혁명이 개입되지 않는 한 환상으로 끝날 것이다. 이들과 적군 사이의 협력관계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탈린 일당은 곧 핀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릴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핀란드 인민에게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핀란드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구체적인" 내전에서 제4인터내셔널의 "구체적인" 투사들은 어떤 "구체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가? 스탈린주의자들이 스페인 사회주의혁명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제4인터내셔널 투사들은 이들과 똑같이 공화국 진영에서 싸웠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행위를 더욱더 지지하면서 이들과 같은 진영을 형성해야 한다.

    소수파의 발명가들은 과격한 어조로 자기 입장의 결함을 은폐한다. 이들은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딱지 붙인다. 과학에 대단한 공헌을 하고 있다! 지금부터 금융자본의 대외정책과 대대적인 파괴적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의미를 명확히 하고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교육을 시키는 일도 크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매우 성급한 스탠리 동지는 스탈린 관료집단이 동시에 독일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고함지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 문제를 다른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대체할 때에나 나올 수 있다.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들은 모두 제국주의자들인가? 이러한 사고는 변증법이 아니라 상식에 의존하는 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다.

    만약 내일 영국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인도인들에게 히틀러가 무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면 독일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태업 등으로 이 구체적인 히틀러의 행동에 반대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독일 노동자들은 인도인들이 가능하면 빨리 무기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이 점이 스탠리 동지에게 아주 명확하게 이해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가상적인 예가 될 뿐이다. 다만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파시스트 정부가 특정 상황 속에서는 (바로 다음 순간에 목을 졸라 죽이기 위해) 일국의 혁명운동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예를 사용했을 뿐이다. 가령 어떤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프랑스의 노동자혁명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소련의 관료집단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핀란드의 혁명운동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물론 내일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목졸라 죽이기 위해 지금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스탈린 지배집단에 의해 촉진되고 파괴되고 목졸려 죽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특정 사회혁명운동을 제국주의라는 잡동사니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것은 이론적 정치적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제국주의" 개념을 고무줄 늘이듯이 늘이는 것은 참신한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현재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들의 민주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부르조아들도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자본가 계급의 목적은 너무도 명확하다. 즉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소련의 팽창정책 사이의 사회적 모순을 지워버린다. 소유의 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진짜 제국주의를 돕는 것이다. 그러면 섁트먼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새로운 용어 사용법은 객관적으로 제4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적 용어로부터 이들을 멀어지게 하면서 "민주주의자들"의 용어 사용법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한다. 슬프게도 이러한 상황은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 여론의 압력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 이론에 대한 회의와 절충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1939년 1월호에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공동으로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Intellectuals in Retreat) 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는 올바른 사고와 정확한 정치분석들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결함까지는 안가더라도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들이 드러나고 있어서 글의 가치가 손상을 입고 있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충분한 이유도 없이 "이론 "의 옹호자로 자처하는 인사들을 겨냥하여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의도적으로 이 글은 이론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스프링이 빠진 벽시계처럼 미국의 "급진"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맑스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는 변증법을 기각한 이유가 전혀 실려있지 않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하다. "무제한의 기회"가 보장되는 이 나라에서 지식인들은 계급투쟁 원리를 다른 어느 나라 지식인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사회 모순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론 영역에서 모순의 논리인 변증법을 거부하였다. 정치 영역에서는 영특한 삼단논법을 통해 "공정한" 정치강령의 올바름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회는 "합리적인" 조치들을 통해 재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론 영역에서도 "상식" 수준으로 낮추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데 충분하다고 이들은 생각하였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짬뽕인 실용주의는 미국의 국가철학이 되었다.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의 이론적 방법론은 헨리 포드(Henry Ford)의 방법론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사람 모두 살아 움직이는 사회를 "공돌이(engineer)"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다만 이스트먼은 플라톤처럼 관념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맥스 이스트먼의 할아버지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토를 차지하고 재산을 쌓아 올리는 일에 변증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변증법에 대해서 미국 지식인들이 경멸을 나타내는 이유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해서 미국 자본주의처럼 실용주의 철학은 파산지경에 처해 있다.

    사회의 물질적 발전과정과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관계를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의 필자들은 보여주지 않았고 보여줄 수도 없었으며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버넘과 섁트먼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글의 두 저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반이론에 대해서 평가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한 명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나머지 한 명은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과 관계있지만 이 관계는 언제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인간은 종종 일관성이 없이 행동한다. 본 저자들은 모두 상대방이 `철학 이론 '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이견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반드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증명한 적은 아직은 없다. 사실 정당, 강령, 투쟁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안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같이 일하면서 좀더 여유가 있으면 좀더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두 저자는 희망하고 있다. 한편 파시즘, 전쟁, 실업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이 대단히 놀라운 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엉터리 방법론으로 가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론으로 정말이지 빈번하게 올바르지 못한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방법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느 때이든 좀더 여유가 있으면 방법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할 일들이 있다는 식이다. 연장이 나쁘다고 조장에게 불평하는 노동자가 조장의 다음과 같은 답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상해 보자: 나쁜 연장으로도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으며 좋은 연장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은 재료만 낭비할 뿐이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 노동자는 특히 도급제로 삯을 받을 경우 전혀 황당하지 않은 올바른 말로 조장에게 대꾸할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대상을 다루기 어렵기 때문에 좋은 연장의 가치를 인정한다. 반면에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은 쉽게 바뀌는 말과 피상적인 일반화를 자신의 "연장"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주요한 사건들이 그의 머리를 강타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당원이 변증법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할 경우 이것은 당연히 무기력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이라는 학교를 졸업한 노동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변증법적 사고에 도달한다.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몰라도 그는 그 방법론과 결론을 즉시 받아들인다. 그런데 쁘띠부르조아에게는 설상가상의 일이 벌어진다. 물론 노동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내적인 혁명이 없이도 노동계급의 견해로 넘어가는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분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훈련받은 쁘띠부르조아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이들의 이론적인 편견들은 이미 학교 걸상에서 완성되었다. 변증법의 도움이 없이도 온갖 지식들을 많이 얻는다면 이들은 변증법이 없이도 세상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이들은 이론의 도구들을 확인하고 닦고 벼리는 일에 실패하고 협소한 일상적 관계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정도만큼 이들은 변증법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건들에 의해서 내동댕이 처질 경우 이들은 쉽게 방향을 잃고 다시 쁘띠부르조아적 사고방식에 빠져든다.

    "비일관성"에 기대어 원칙에 위배되는 이론적 동맹을 정당화하는 것은 맑스주의자 답지 못한 행위이다. 비일관성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정치에서는 개개의 증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비일관성은 보통의 경우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관성을 가질 수 없는 사회 세력들이 존재한다. 오래된 쁘띠부르조아 경향을 벗어 던지지 못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노동자 정당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론적인 타협을 강요당한다.

    위에서 인용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한 섁트먼 동지의 태도는 절충적 회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지는 맑스주의 학교에서 이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모든 종류의 회의에 빠지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 몹쓸 병을 전염받았다.  

     

    경고와 확인

    이 글은 너무도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즉시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지와 버넘 동지가 지식인들에 대해 쓴 글을 지금 바로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들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변증법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자인 동지 개인이 맑스주의 이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타격입니다. 버넘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은 아주 명확하며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될 게 전혀 없다. 이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동지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새로운 인터내셔널] 독자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이스트먼 같은 작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현재의 논쟁이 진행되기 몇 달 전인 1월 20일에 나는 이 편지를 썼다. 그런데 3월 5일이 되어서야 답장이 왔다. 내가 왜 이 문제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답장이었다. 3월 9일 나는 섁트먼 동지에게 다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변증법을 거부하는 동지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증법이 아주 중요한 쟁점이 되는 그리고 될 수밖에 없는 글을 이런 동지와 공동으로 작성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확인했을 뿐입니다. 논쟁은 정치와 이론의 두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동지의 정치적 비판은 좋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이론적 비판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적극적으로 비판해야할 지점에서 비판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즉 변증법을 거부하는 인사들의 오류는 적어도 이론의 측면에서 보면 변증법을 통해 사물의 논리를 끝까지 전개할 수 없는 무능력과 무의욕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이 임무는 교육적 측면에서 아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변증법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변증법적 논리가 없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에 반대하는 버넘동지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서 그는 이스트먼, 쿡(Cook)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변증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더니 결국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을 하는 이유들을 보여줄 가능성을 스스로 박탈했다.

    현재 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선 논쟁은 내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내가 우려할 수 있었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로운 형태로 나의 우려와 경고를 확인해 주었다. 섁트먼 동지의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에서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꽤 오래 전부터 버넘 동지는 자신의 직관적인 인상을 통해 비노동계급적 비부르조아적 국가를 순전히 경험적으로 이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결과 응그슬쩍 국가가 계급지배의 기관이라는 맑스주의적 국가론을 청산해 버렸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좀더 고려해 보아야 한다." 더욱이 그와 버넘 동지는 우리의 "정치적 임무"에 대해서 완전히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 일치는 소련의 사회성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 독자들은 다시 한번 이 동지들이 변증법에 대해 쓴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버넘은 변증법을 거부한다. 섁트먼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일관성"이라는 하늘이 내린 선물은 이들이 공통된 정치적 결론을 갖는 것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동지들 모두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은 변증법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조목 조목 반복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이 주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실용주의라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섁트먼에게는 방법론이 없다. 그는 버넘의 입장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다. 버넘의 반맑스주의적 개념들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섁트먼은 사회학뿐만 아니라 철학 영역에서도 버넘과 함께 반맑스주의적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은 실용주의자로 섁트먼은 절충주의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 현상은 아주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고 영역과 가장 중요한 두 문제에 있어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완벽히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고를 해본 적이 없는 동지들마저 놀라게 하는 장점이 있다. 사고 방법은 변증법적이거나 속류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있다.

    지난 1월 우리는 이 두 저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견해 차이를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런데 현재로는 이러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견해 일치나 견해 차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증명한 적이 없다. "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증명한 적이 없다니! 바로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두 동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추상적 이론 "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에 정확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바 있었다.

    물론 이 두 예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론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두 경우 모두 두 동지는 변증법에 대한 거부와 반(半) 거부를 기초로 동맹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노동자 정당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자기 정당의 맑스주의 분파에 대항하였다. 말하자면 군사작전의 전선은 바뀌었으나 무기는 그대로인 셈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자주 일관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어떤 일관성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논리는 비일관성이 아니라 일관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버넘은 변증법을 알아보지 못하나 변증법은 그를 알아보아서 그에게 지배력을 넓히고 있다.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이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신의 정치적 결론을 통해 변증법에 대한 그의 경시가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본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루는 교과서에 섁트먼의 예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작년 제4인터내셔널의 동조자인 영국의 어느 젊은 정치경제학 교수가 나를 방문했다.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는 방도들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는 갑자기 케인즈와 그 밖의 인물들의 정신에 입각한 공리주의 경향을 보였다: "명확한 경제적 목적을 결정하고 이것의 실현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들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등등.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변증법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겠소." 그는 어느 정도 놀라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변증법이 어느 짝에 쓸모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대해서 귀하가 말한 것을 가지고 귀하가 어떤 철학 조류에 속하고 있는지를 변증법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하더라도 변증법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후 이 교수로부터 아무 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비변증법적 교수는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며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는 "시대에 뒤진" 견해이며 우리의 조직 운영 방법들이 나쁘다 등등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들을 기초로 그가 어떤 일반적 사고 유형에 속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가 다른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도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사고 방법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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