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민족성개조
1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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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영구혁명

7장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은 오늘날 동양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 '단계들'이라는 스탈린주의적 (진화적이고 속물적이며 혁명적이지 않은) 개념에서 길을 잃은 라데크는 이제 또한 동양 전체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을 신성시 하기 위해 애쓴다. 레닌이 개별 나라의 발전 경로에 따라서 적응시켰으며, 변화시키고 구체화시켰고, 어떤 국면에서는 버려 두었던 볼셰비키주의라는 '작업 가설'로부터, 라데크는 초역사적 도식을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글들에서 아래 인용문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이 이론과 이 이론으로부터 도출되는 전술 또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정치사회적 형식들이 유산으로서 뒤에 남겨 둔 문제를 부르주아지가 일소하지 못한 초기적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모든 나라들에 적용될 수 있다."

 

이 정식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보라. 이것은 1917년 카메네프의 입장에 대한 경건한 정당화가 아닌가? 2월 혁명 이후에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 혁명의 문제들을 '일소'했는가? 아니다. 민주주의 혁명의 문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농업문제를 포함하여, 민주주의 혁명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어떻게 레닌은 과거의 슬로건이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수 있을까? 왜 그는 이 문제를 거두어 들였을까?

 

라데크는 앞에서 이 문제들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라고 이 점에 관하여 우리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 대답을 조사해왔다. 이것은 전혀 지지받을 수 없으며, 과거의 레닌주의 슬로건의 본질은 권력의 형식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력에 의한 농노제도의 일소에 있는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라데크의 말에 의하면 2배나 더 그러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케렌스키주의가 만들어내지 않았던 것이 이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당시의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중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라데크의 참견이 모두 말도 안된다는 것이 도출된다. 이것은 1905년에 트로츠키기 이해했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것은 조사되어야 한다)이라기 보다는, 1917년 2월-3월에 스탈린, 몰로토프, 그리고 특히 리코프와 카메네프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당시 라데크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민주주의 독재가 이중권력 기간에 중심 슬로건의 즉각적인 변화를 필요로하는 정도로까지 현실화되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중국에서의 '민주주의 독재'는 더욱 완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국민당 정권을 통해서, 즉 담평산을 부가물로 하는 장개석과 왕칭웨이의 지배를 통해서 현실화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장개석은 국민당 우익의 지도자이고, 왕칭웨이는 좌익의 지도자이다. 담평산은 중국에서의 스탈린과 부하린의 노선을 실행하면서 공산주의자 장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슬로건의 변화는 더욱 더 필요했다.

 

그러나결국,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정치사회적 형식들 이라는 유산'이 중국에서는 아직 일소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것은 아직 일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이 '고참 볼셰비키들'의 상층 부위 전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던 1917년 4월 4일 러시아에서는 이것들이 일소되었는가? 라데크는 스스로를 절망적으로 반박하며, 갈피를 못잡고 이러저리 휘청거린다. 이와 관련하여, 라데크가 '형식들이라는 유산'과 같은 복잡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 속에 있는 뜻의 다양함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봉건주의 혹은 농노제도의 잔재'라는 더욱 분명한 용어를 분명하게 회피하고 있음을 언급해두도록 하자. 왜일까? 라데크는 오직 어제에만 이들 잔재들을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했고, 그래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을 위한 모든 기초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 대학에서 그의 보고에서 라데크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중국 혁명의 원천은 1905년 우리 혁명의 원천들 만큼이나 깊었다. 중국은 2개의 계급들에 맞서는 방향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계급,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쪽으로 될 것이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노동계급의 농민과의 동맹은 1905년의 우리 때의 것보다 중국에서 더욱 강력할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프롤레티라아트가 농민과 함께 자신의 투쟁을 하나의 계급,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봉건주의의 잔재들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쪽으로 향하게 할 때, 만약 괜찮다면, 이런 혁명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아마도 민주주의 혁명? 라데크가 이 말을 1905년이 아니라, 심지어 1909년도 아니라, 1927년 3월에 했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매우 간단하다. 1927년 3월에 라데크 역시 올바른 길로부터 이탈했던 것이다. 단지 또 다른 하나의 방향에서. 반대파는 중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테제들에서 당시 라데크의 일면성에 대한 가장 중대한 바로잡음을 가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된 단어들 안에 진실의 핵심이 있었다. 중국에는 지주의 재산이 거의 없다. 지주들은 짜르 러시아에서 보다 훨씬 더 자본가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고, 중국에서의 농업문제의 특정한 비중은 짜르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더 적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족해방의 문제는 굉장히 그 중요성이 컸다. 따라서, 중국의 민주주의적 혁신을 위한 독자적인 혁명적 정치 투쟁을 위한 중국 농민의 능력은 러시아 농민들의 그것보다 더 클 수가 없다. 이러한 것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1925년 이전뿐만 아니라 3년간의 중국 혁명 기간에도 자신의 기치에 농업혁명을 새긴 나로드니크(민중주의적) 정당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이 이미 1925-27년의 경험을 자신의 뒤로 가지고 있는 중국에게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은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보다 훨씬 더 위험한 반동적 올가미를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훨씬 더 지난 먼 과거에 대한 라데크의 또 다른 간섭 역시 잔인하게 그에게 반대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번에는 1850년 맑스가 제기했던 영구혁명 슬로건의 문제이다.

 

"라데크는 '맑스에게는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슬로건이 없었던 반면, 1905년부터 1917년까지의 레닌에게 그것은 정치적 축이었으며, 초기적[?] 자본주의 발전을 이룬 모든[?!] 나라들에서의 혁명이라는 그의 개념의 한 구성부분을 이루었다."라고 쓴다."

 

레닌으로부터의 몇 줄에 자신을 기초하면서, 라데크는 독일혁명의 중심적 과제는 민족 통일이었던 반면, 러시아에서는 농업혁명이었다는 사실로 이러한 입장들의 차이를 설명한다. 만약 이러한 대비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 않고, 비중이라는 의미가 유지된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올바르다. 그러나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반식민지 나라인 중국에서 민족문제의 특정한 비중은 농업문제와 비교하여 심지어 1848-50년 독일에서 보다도 이루헤아릴수 없이 훨씬 더 크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통일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해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독일에서 왕의 모든 권좌가 굳건하게 유지되었고, 융커들이 토지를 보유했으며,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은 단지 정부의 대기실에 있는 것만 묵인되었던 때 그의 영구혁명이라는 전망을 정식화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 이래로 왕조가 없었고, 독립적인 지주 계급이 없으며, 민족부르주아지인 국민당이 권력에 있으며, 농노제라는 관계들은 소위 부르주아지 착취와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라데크가 했던 맑스와 레닌의 입장들 사이의 대비는 중국에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슬로건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라데크는 단지 우연히 일시적으로 맑스가 농민을 여전히 소부르주아지 도시 민주주의의 자연적 동맹으로 간주했던1850년의 순환에 자신을 한정하는 가운데, 맑스의 입장을 진지하게 취하지 않는다. 당시 맑스는 독일에서 독자적인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 즉 농민의 지지를 받는 도시 소부르주아지 급진주의자들에 의한 일시적인 권력 장악을 예상했다. 여기에 문제의 요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으로도 이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난 세기 중반에 이미, 소부르주아지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맑스는 이 교훈에 대하여 고려했다. 1856년 4월 16일, 즉 언급된 시기로부터 6년 후에, 맑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에서 모든 것은 2번째 판의 농민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후위를 보위할 가능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은 대성공일 것입니다."

 

라데크가 완벽하게 잊고 있는 이 놀랄만한 말들이 10월 혁명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를 점령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진정으로 소중한 완전한 열쇠를 제공한다. 맑스는 농업혁명을 건너뛰었는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는 농업혁명을 건너뛰지 않았다. 맑스는 다가오는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렇다. 맑스는 그 혁명에서 농민에 의한 지도적, 혹은 심지어 단지 독립적인 역할의 가능성을 부여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맑스는 독자적인 민주주의 혁명에서 (농민의 잘못이 아니라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의 잘못 때문에)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던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아갔다. '그렇다면 일은 대성공일 것입니다.' 분명히 라데크는 이것이 정확하게 10월에 벌여졌던 일이고, 불행하게도 당시에는 벌어지지 못했던 일이라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으로부터 중국에 관하여 도출되는 결론들은 매우 분명하다. 논쟁은 동맹으로서 농민의 결정적인 역할에 관한 것이 아니며, 농업혁명의 거대한 중요성에 관한 것도 아니며, 독자적인 농업 민주주의 혁명이 중국에서 가능한지 여부 혹은 '2번째 판의 농민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지지할 것인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고 유일한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단지 중국 혁명을 혼란스럽게 하고 중국 혁명을 올바른 길에서 이탈시키는 자이다.

 

동양의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를 향한 길을 열도록 하기 위하여는, '국면들(stages)'과 '단계들(steps)'에 관한 스탈린과 마르티노프의 현학적인 반동적 이론은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하며, 제껴져 있어야만 하며, 박살나야 하고 빗자루로 쓸어버려져야 한다. 볼셰비키주의는 이러한 천박한 진화주의에 맞선 투쟁 속에서 성숙하게 성장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적응시켜야만 하는 것은 선험적으로 그어진 행군 줄이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 경로이다. 다양한 수준의 발전을 이룬 나라들에게 서로 다른 정도의 혁명을 위한 카드를 돌려서 계속되는 순서를 고정하는 사상인 스탈린과 쿠시넨의 사상을 거부해야 한다.

 

1919년 레닌은 특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조직화에 관하여 지난 시기의 결론들을 통합하고 그것들을 어느 때 보다 더 완성된 이론적 정식화를 제공하면서, 케린스키주의와 10월의 경험을 아래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미 고도로 높은 계급 적대를 가지는 부르주아지 사회에는 공개적이건 혹은 위장된 형식으로건 부르주아지 독재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중에 하나만이 있을 수 있다. 중간적인 정권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가장 후진적인 유럽 나라인 러시아의 경험이 자신의 부르주아지 혁명의 시대, 예를 들면 '민주주의 독재'에 가장 우호적인 시대에 보여준 바와 같이, 어떠한 민주주의, 어떠한 '민주주의 독재'(반어적인 인용부호들은 레닌의 것이다)도 오로지 부르주아지 지배를 위한 장막일 뿐이다. 오직 2월과 10월 혁명들의 경험의 총합으로서 만들어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테제들을 위한 기초로서 레닌은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많은 다른 사람들 처럼, 라데크 또한 민주주의의 문제를 민주주의 독재의 문제로부터 기계적으로 분리한다. 이것이 가장 커다란 실수들의 근원이다. '민주주의 독재'는 혁명 동안에 부르주아지의 위장된 지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1917년 '이중권력'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국민당의 경험으로부터도 이것을 배운다.

 

아류들의 절망은 그들이 심지어 지금도 민주주의 독재를 부르주아지 독재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대비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에서 가장 지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 독재가 중간적인 성격의 것임에 틀림없으며, 즉, 소부르주아지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는 다양한 계급 노선들의 산술적인 평균으로서의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 독재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참여로 사태가 바뀌지는 않는다. 만약 그것이 부르주아지의 독재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도 아니라면, 소부르주아지가 단호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3번의 러시아 혁명들과 2번의 중국 혁명들에 의해서 실천으로 대답되었던 바로 그 똑같은 문제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라는 조건 하에서, 오늘날 소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심지어 이것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임무들의 해결에 여전히 직면해 있는 후진국가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지도적인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더 낮은 층의 소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독재를 수립할 수 있었던 시대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가 아직은 소부르주아지로부터 분화되지 않았지만, 발전되지 않은 스스로의 조건에서 반대로 소부르주아지의 투쟁하는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시대들이었다. 오늘날은 확연히 다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스스로를 소부르주아지부터 분리했고, 소부르주아지를 가치가 없는 존재로 운명지으면서 농민으로 하여금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의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에 직면하게 하는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기초에서 대부르주아지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맞서 있는 한, 소부르주아지가 비록 후진적일지라도 오늘날의 부르주아지 사회의 삶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농민은 표면적으로 소부르주아지인 것처럼 보이는 정당에 유리하게 결정할 때는 언제나, 실제로는 금융자본을 위한 버팀목으로서 자신들의 등을 제공한다. 첫번째 러시아 혁명의 기간, 혹은 첫번째 2개의 혁명들 사이의 기간에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농민과 소부르주아지의 독자성의 정도(그러나 단지 정도!)에 관하여 다른 의견들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제 이 문제는 지난 12년의 사태들의 전체 경로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바뀔 수 없게 결정되었다.

 

이것은 10월 이후에 많은 나라들에서, 모든 가능한 형식들과 조합들 속에서 실천적으로 새롭게 제기되었고, 똑같은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케렌스키주의의 경험에 뒤따르는 근본적인 경험이 이미 언급하였듯이 국민당 경험이었다. 그러나 무장한 소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금융과두제에게 권력을 즉각적으로 이양하기 위하여 구 부르주아지 정당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했던 이탈리아 파시즘의 경험도 덜 중요하지 않다. 필수드스키 운동이 반동적 부르주아지 지주 정부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목표로 했고, 소부르주아지 대중들과 심지어 폭넓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희망을 반영했던 폴란드에서 똑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구 폴란드 사민당의 바르스키가 '농민에 대한 과소평가'가 두려워 필수드스키 혁명을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와 동일시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불가리아의 경험, 즉  스탐불리스키의 타일 정당을 향한 콜라로프스와 카바크치에프스의 수치스럽게 혼란스럽던 정책, 혹은 미국의 농민-노동자 당과의 부끄러운 실험, 혹은 라디크에 대한 지노비에프의 로맨스, 혹은 루마니아 공산당의 경험, 그리고 등등 끝도 없이 많은 경험들을 여기서 분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는 너무나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이들 사실들의 일부는 나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 초안 비판에서 본질적으로 분석되어 있다. 이들 모든 경험들의 근본적인 결론은 10월의 교훈들 즉, 농민을 포함하는 소부르주아지가 반동적인 시대들에서 만큼이나 혁명적인 시대들에서 비록 후진적이라 할지라도 현대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완전하게 확증하고 강화한다. 중간적인 형식들은 비틀거리기 시작했거나 혼란 이후에 아직 일어서지 못한 부르주아지의 독재(케렌스키주의, 파시즘, 필수드스키 정권)를 위한 위장일 뿐이다.

 

농민은 부르주아지나 혹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따를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을 따르지 않고 있는 농민과 함께 행진하려고 시도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제로는 금융자본의 뒤를 좇고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1917년 러시아에서 조국을 지키는 자들로서의 노동자들; 중국에서 국민당에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또한 포함하는 노동자들; 폴란드 사회당의 노동자들, 그리고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1926년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등등.

 

이러한 것을 끝까지 생각해내지 못한 사람이나, 자신들이 뒤에 남겨둔 생생한 흔적으로부터 사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혁명적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2월과 10월 혁명들의 교훈들로부터 레닌이 철저하고도 포괄적으로 도출했던 근본적인 결론은 '민주주의 독재'라는 사상을 완전하게 거부한다. 아래의 내용은 1918년 이후 레닌에 의해 한 번보다 더 많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19세기 전반을 관통하는 정치경제 전체, 혁명의 역사 전체, 정치적 발전의 역사 전체로부터 무엇이라도 배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농민은 노동자나 혹은 부르주아지를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만약 이유를 모른다면, 나는 그런 시민들에게 ... 18, 19세기의 위대한 혁명들 중 어떤 것이라도, 19세기의 어떤 나라의 정치적 역사라도 생각하라고 ... 말하겠다. 그것들이 이유를 말해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구조는 그 사회에서 지배세력들은 오로지 자본이 될 수 있거나 혹은 자본을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수 있거나 하는 그런 사회이다. 그런 경제적 구조의 사회에는 다른 어떠한 세력들도 없다."(XVI, 217) 자유와 평등 슬로건에 의한 인민에 대한 사기, 1919년 5월, 4판, XXIX, 338쪽. 영어판은 리틀 레닌 도서관에서 팜플렛의 형식으로 1934년에 출판되었다. 이 팜플렛의 34-35쪽을 보시오.

)

 

현대의 잉글랜드나 독일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라도 18세기 혹은 19세기의 위대한 혁명들의, 즉 후진적인 국가들에서의 부르주아지 혁명들의 교훈들에 기초하여, 레닌은 오로지 부르주아지의 독재 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민주적인' 즉 중간적인 독재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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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듯이 라데크의 이론적, 역사적 간섭은 부르주아지 혁명은 반드시 사회주의 혁명과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다소 얄팍한 경구로 요약된다. 이 '단계'로까지 내려온 라데크는 곧바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자원, 즉 '상식'으로부터 나아가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슬로건이 선진 국가들과 후진 국가들 모두에서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 있을 것 가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쿠시넨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순수함으로 쿠시넨은 트로츠키가 1905년 이후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트로츠키의 유죄를 선언한다. 쿠시넨을 따라서, 라데크 또한 아이러니칼 해진다: 트로츠키에게 '중국과 인도 혁명들의 특수성은 정확하게 중국과 인도 혁명들은 서구 유럽의 혁명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혁명들의 첫번째 단계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라데크는 이와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서유럽 국가에서 현실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후진적인 동유럽 국가에서 현실화되었다는 한 가지 사소한 사항을 잊고 있다. 역사의 진행이 러시아의 '특수성'을 간과했던 것이 트로츠키의 잘못인가? 라데크는 부르주아지, 보다 정확하게는 발전의 정도, 사회 구조, 전통 등등에서 모든 다양성을 지닌, 즉 모든 자신들의 '특수성들'을 지닌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부르주아지, 보다 정확하게는 금융자본이 지배한다는 더 많은 것을 잊고 있다. 여기서 다시, 이러한 특수성에 대한 고려의 부족은 결코 트로츠키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적 발전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선진 국가들과 후진 국가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차이는 크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지배라는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부르주아지의 지배의 형식과 방식들은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매우 다르다. 한 극에서는 그 지배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성격을 가진다: 미국. 다른 한 극에서는, 그것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그것들에 자기 자신의 방책들을 강요함으로써 금융자본이 스스로를 아시아적 봉건주의라는 오래된 제도들에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인도.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부르주아지가 지배한다. 이것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또한 사회적 기초, 정치적 형식들, 즉각적인 임무들, 그리고 다양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활동의 속도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도출된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 봉건주의자들, 그리고 민족 부르주아지의 동맹에 대한 승리로 인민 대중을 지도하는 것은 오로지 권력장악 이후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행시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헤게모니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라데크는 자신이 인류를 사회주의 독재를 하기에 '성숙한' 그룹과 민주주의 독재만을 하기에 '성숙한' 또 다른 그룹,  이렇게 2개의 그룹들로 나누었을 때, 나와는 반대로 이것 하나만으로 자신이 개별 나라들의 '특수성'으로 추정되는 것에 대하여 고려했다고 상상한다. 실제로는, 그는 공산당들이 특정 나라의 특수성에 대한 진정한 연구를, 예를 들면 그 나라의 역사적 발전의 다양한 단계와 국면들에 대한 살아 있는 해석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 밖에는 하지 못하는 생명력 없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자신의 민주주의 혁명을 성취하거나 완수하지 못한 나라의 특수성들은 대단히 중요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강령을 위한 기초로서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들이다. 오로지 이러한 민족적 강령의 기초에서만 공산당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민주주의 대리인들에 대항하는 노동계급과 일반적인 노동인민들의 다수를 위한 자신의 실제적이고 성공적인 투쟁을 발전시킬 수 있다.

 

물론 이 투쟁에서 성공의 가능성은 많은 정도로 그 나라 경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에 의해,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표준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나라에 존재하는 그것의 해결에 나라의 다수가 관심을 가지며, 그것의 해결을 위해서는 가장 단호한 혁명적 방책들이 필요한, '인민들에게' 광범위하고도 긴요한 문제들이 같은 정도로 중요하다. 이러한 종류의 문제들 중에 농업 문제와 민족 문제들이 다양하게 조합된 상태로 있다. 식민지 국가들의 첨예한 농업 문제와 참을수 없는 민족적 억압을 지닌 젊고 상대적으로 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순수하게 사회주의적 기초 위에 있는 선진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먼저 민족 민주주의 혁명의 기초 위에서 권력에 이를 수 있다. 10월 이후에는 이것을 더 이상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 년 동안의 사상적 반동과, 아류들의 이론적인 악행을 통하여, 혁명의 기본적인 개념들이 너무나도 천박해지고, 타락하고, 쿠시넨화되어서 매 번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말했던 것으로부터 오늘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이미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하여 성숙되어 있다는 것이 도출되는가? 아니다. 이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잘못된, 죽은, 학자연하는, 스탈린주의-부하린주의적 방식이다. 전체 세계 경제는 사회주의를 위하여 의문의 여지없이 성숙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특정의 모든 나라가 따로 따로 성숙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 인도 등의 다양한 후진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역사는 순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나라는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해 성숙하기 전에, 또한 심지어 광범위한 사회화 방책들을 위해서 성숙되기 전에 조차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 '성숙'해질 수 있다. 사회 발전의 사전에 예상된 조화로부터 나아가서는 안된다. 스탈린의 융숭한 이론적 환영에도 불구하고, 불균등 발전의 법칙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법칙의 힘은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똑같은 나라 내부에서의 다양한 과정들의 상호작용들에도 작용한다. 경제와 정치의 불균등한 발전들의 조화는 오직 세계적 차원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특히, 이것은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문제는 중국 경제와 중국 정치라는 한계 내에서 배타적으로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영구혁명이라는 국제혁명의 이론과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민족개량주의 이론이라는 2개의 상호 양립할 수 없는 관점들에 직면한다. 후진적인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계 어떤 나라도 자기 자신의 민족적 한계 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생산력들이 국유화에 그렇게 하듯이, '민족적 경계들을 넘어서 성장한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들이 이것에 저항한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실 성격에서는 다르지만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들과 모순들보다 아마도 더 가볍지는 않을  어려움들과 모순들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오로지 국제 혁명이라는 길에 의해서만 양 쪽 모두의 경우에서 이들 모순들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적 이행을 위한 중국의 '성숙'과 '미성숙'의 문제를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여기서 논쟁의 여지가 없게 남아 있는 것은 중국의 후진성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임무들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는 순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며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반복한다.

 

이것은 적어도 대부분의 후진적 식민지 나라를 포함하는 모든 나라가 만약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서는 성숙해 있음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이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식민지들에서 민주주의 혁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또 다른 질문으로 답하겠다. 모든 식민지 국가가 자신의 민족민주주의 임무들의 즉각적이고 온전한 해결을 위하여 성숙해 있다고 어디에 쓰여져 있는가? 다른 측면으로터 문제에 접근해야만 한다. 제국주의 시대라는 조건들 하에서, 민족민주주의 혁명은 오로지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인민 대중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올려놓을 정도로 성숙해 있을 때에만 승리적인 귀결로 수행될 수 있다. 만약 이런 경우가 아직은 아니라면? 그렇다면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단지 전체적으로 노동 대중에 반(反)하는 매우 부분적인 결과들 만을 만들어 낼 것이다. 1905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주변에 농민 대중을 통합시키고 권력을 장악하기에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바로 이 이유로 인하여, 혁명은 중도에서 멈추었고 그리고 나서 더욱 더 낮게 가라 앉았다. 예외적으로 우호적인 정세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도부가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위한 투쟁을 하지 못하게 했던 중국에서는, 민족적 임무들이 국민당 정권 내에서 파괴되고 불안정하며 불충분 채 해결되었다.

 

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들 하에서 식민지 국가가 자신의 농업과 민족 문제들의 진실로 혁명적인 해결을 위하여 성숙하게 될 것인지 미리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지금 우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해서만 오직 진정한 인민의 민주주의, 즉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다. 그 길에는 많은 국면들(stages), 단계들(steps), 그리고 국면들(phases)이 여전히 있을지도 모른다. 인민대중의 압력 하에서, 부르주아지는 여전히 좌익을 향한 행보를 할 것인데, 이것은 나중에 그들이 인민들을 어느 때 보다 더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위해서이다. 이중권력의 기간들이 가능하고,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을 것, 존재할 수 없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이다. '독자적인' 민주주의 독재는 단지 노동자와 농민들에 전적으로 적대하는 쪽으로 이끌렸던 국민당과 같은 형태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것을 이해해야만 하며, 추상적인 정식들의 뒤에 계급 현실들을 감추는 것 없이 대중들에게 이 점을 가르쳐야만 한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제국주의의 멍에 덕분에 중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민족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시도는 되었다.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감독관의 도끼 아래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 독재가 다음에 올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소부르주아지 독재는 자본의 위장된 독재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우연히? 아니다. '농민은 노동자나 혹은 부르주아지를 따른다' 첫번째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등장한다. 다른 경우에는 부르주아지의 독재가 등장한다. 비록 먼 곳으로부터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교훈은 충분히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성공적이지 못한 실험이었다. 우리는 전면적으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고 이번에는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를 세울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어떤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협력이라는 사회적 기초에서.' 이 마지막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라데크이다. 그러나, 만약 허용된다면, 국민당은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지 때문에 불 속에서 밤을 주워내기 위하여 '협력하였던' 바로 그 똑같은 기초에서 등장했다. 이 협력의 정치적 역학이 무엇처럼 보일 것인지 우리에게 말해 달라. 무엇으로 국민당을 대체할 것인가? 어떤 정당들이 권력에 있을 것인가? 적어도 대충은 그것들을 지시해 달라! 적어도 그것들을 설명해 달라! 이에 대하여 라데크는 오직 결딴이 난 사람들만이, 맑스주의의 복잡성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어떤 계급이 말이 되고 어떤 계급이 기수가 될 것인지와 같은 그런 부차적인 기술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볼셰비키는 자신의 관심을 계급 기초에 집중하는 가운데, 정치적 상부구조로부터 스스로를 '추상'해야만 한다고 (1928년에!) 대답했다. 아니다. 말 좀 하자. 당신은 이미 웃음거리가 되는 짓들을 해왔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추상했다'.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중국에서, 당신은 계급 협조가 정당 문제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의 문제로부터 당신 스스로를 '추상했다'. 당신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국민당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당신은 당신의 감각들을 잃는 지점까지 국민당에 혹해 있었다. 당신은 국민당으로부터의 철수에 맹렬하게 반대했다. 당신은 추상적 정식들을 되풀이 하면서 투쟁의 정치적 문제들로부터 꽁무니를 뺐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두개골을 아주 분명하게 박살 낸 이후에, 당신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했다: 완전히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정당들과 혁명적 권력의 문제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다시 한번 더 '추상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아니다! 이것들은 아주 한심한 짓거리들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뒤로 끌려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각한 바와 같은 이들 모든 아슬아슬한 재주부리기들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동맹의 중요성에 표현되어 있다. 라데크는 농민에 대한 과소평가에 대하여 반대파에 경고하며 멘셰비키들에 대한 레닌의 투쟁을 인용한다. 종종, 사람들은 레닌으로부터의 인용이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보면서, 인간의 사유의 존엄에 대한 그런 위배들에 대하여 심하게 분개한다. 그렇다. 레닌은 농민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멘셰비키들의 특징이라고 한 번 보다 더 많이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옳다. 그러나 이들 인용문들에 첨가하여, 멘셰비키들이 사회주의 혁명가 당과의 블럭을 깨지 않으면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분리되었던 8개월을 보냈던 1917년이 또한 있었다. 그 시기에 사회주의 혁명가당(SRs)은 혁명에 의해 각성된 농민의 절대적 다수를 대변했다. SRs와 함께, 멘셰비키들은 스스로를 혁명적 민주주의로 불렀고, 자신들이 노동자들과 농민들(병사들)의 동맹에 스스로를 기초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고 우리를 질책했다. 이렇게 해서, 2월 혁명 이후에 멘셰비키들은 소위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라는 볼셰비키의 정식을 빼앗았다. 볼셰비키들은 농민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를 분리시켜 혁명을 망치려고 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다시 말해서, 멘셰비키들은 레닌이 농민을 무시한다고, 혹은 적어도 과소평가한다고 비난했다.

 

레닌에 반대했던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등등의 비판은 멘셰비키들의 비판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라데크의 현재의 비판이 이번에는 카메네프의 비판의 뒤늦은 메아리일 뿐이다.

 

라데크의 정책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아류들의 정책은 1917년 멘셰비키의 허구를 지속시키고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동맹의 필요성에 대한 똑같은 언급으로 라데크뿐만 아니라 스탈린에 의해서도 방어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부르주아지 정당이라는 것이 '우연히' 폭로되었을 때에는 '좌익' 국민당에서 그 시도가 반복되었다. 결과들은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구분되는 민주주의 독재라는 추상이 높은 희망들을 실현시키지 못했던 이런 유감스러운 현실 위로 올려져 숭배되었다(우리가 이미 했었던 것의 생생한 반복). 1917년에 우리는 체리텔리, 단, 기타 등등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혁명적 민주주의의 독재를 가지고 있지만, 당신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향해, 즉 파멸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는 소리를 100번은 들었다. 진실로 사람들의 기억력은 짧다. 스탈린과 라데크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체리텔리와 단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독재'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정식은 코민테른의 모든 결의안들에 흐르고 있을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강령 속에도 침투했다. 이 보다 더 비열한 허구, 그리고 동시에 1917년 볼셰비키주의가 멘셰비키주의에 퍼부었던 모욕들에 대한 멘셰비키주의의 이 보다 더 통렬한 복수를 상상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동양의 혁명가들은 여전히 선험적인 과거의 인용문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과 정치적 경험에 기초하여 '민주주의 독재'의 성격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독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스탈린은 동양에서 그것은 대략 '1905년 혁명과 관련하여 레닌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라는 정말로 고전적인 대답을 반복해서 해왔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공식적인 정식이 되었다. 중국, 인도, 혹은 폴리네시아를 위한 책들과 결의안들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가들은 미래의, 한편으로는 오래 전에 과거의 일들이 되어버린 사태들에 관련한 레닌의 '개념들'을 찾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레닌의 가설적 '개념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는 해석되지만, 결코 레닌 자신이 사태들 이후에 그것들을 해석했던 방식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좋다, 우리는 당신의 말에 따라서 혁명 이전에 레닌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했던 것과 정확하게 똑같이 그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것이오. 그러나 이 슬로건이 실제에서는 무엇으로 보일 것인지 제발 말해주지 않겠소? 그것이 당신의 나라에서는 어떻게 현실화되었소?'라고 동양의 공산주의자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그것은 이중권력 시기에 케렌스키주의의 형태로 현실화되었소.'

 

'민주주의 독재의 슬로건이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민족의 케렌스키주의라는 형태로 현실화될 것이라고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말할 수 있겠소?'

 

'아니! 아니! 전혀 그렇지 않소! 어떤 노동자도 그런 슬로건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오. 케렌스키주의는 부르주아지에 굴종하고 노동인민을 배신하는 것이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만 하오?' 동양의 공산주의자가 낙담한 채 말한다.

 

책임을 맡고 있는 쿠시넨이 즉각 대답한다. '당신은 그들에게 민주주의 독재는 레닌이 미래의 민주주의 혁명과 관련하여 생각했던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오.'

 

만약 동양의 공산주의자가 제정신이라면, 그는 아래와 같이 대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민주주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했던 10월 혁명에서야 오직 자신의 진짜로 진실되게 현실화되었다고 1918년에 설명하지 않았소? 당과 노동계급을 정확하게 이러한 전망으로 이끄는 것이 더 좋지 않겠소?'

 

'어떠한 환경에서도 안되오. 그런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여-----엉구 혀------억명이기 때문이오! 그것은 ㅌ-------트로츠키주의이란 말이요!

 

이런 호된 질책이 있은 후, 동양의 공산주의자는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눈보다 더 하얗게 질려서 더 이상의 어떠한 지식을 위한 열망도 포기한다. 무엇이 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라, 무엇이건 일아나도록!

 

그리고 결과들은? 우리는 그 결과들을 잘 안다: 장개석 앞에서의 경멸스러운 굴종이거나 영웅적인 모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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