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괴괴나사
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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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교수 저서 '병자호란'에서 발췌 (책 내용을 다 쓰자면 너무 길어서 중간중간 발췌함)

배경이나 전투보다는 '유교탈레반' 돋는 부분을 주로?강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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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인조 14)?2월16일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조선의 국상(인조의 왕비 사망)에 조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사절단의 구성이 이상했다. 몽골인 지휘관들이 77인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의주부윤 이준(李浚)에게 용골대는 까닭을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몽골의 여러 왕자들이 우리 한(汗)에게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조선과 의논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대원을 획득했다는 것은 후금이 차하르(察哈爾) 몽골을 정복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옥새는 바로 차하르 몽골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릭단 한(林丹汗)의 옥새를 말하는 것이다.

대호를 올린다는 것은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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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를 들은 조정 신료들은 경악했다. 사간 조경(趙絅)은 몽골인들을 국문(國門)으로 들이지 말라고 촉구했다.

장령 홍익한(洪翼漢)은 상소를 통해 인조를 통박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정묘년에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르는 바람에 지금 저들이 우리를 신첩(臣妾)으로 삼으려고 덤비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는 더 나아가 용골대 일행을 처단하여 그 목을 함에 담아 명나라로 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문관 신료들도 서달을,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 붙은 반역자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속히 의주의 감옥에 가둬 상경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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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2일

용골대 일행이 입경하여 문제의 서신들을 내밀었을 때 조선 신료들은 접수를 거부했다.

후금의 버일러나 몽골의 버일러를 막론하고 신하된 자가 다른 나라의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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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6일

용골대는 자신이 가져온 버일러들의 서신을 받아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궁궐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한편 마부대는 같은 날 10시 무렵, 종자들을 이끌고 인열왕후의 빈소에 조문했다.

그들이 막 조문하려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 장막이 걷혀버렸다.

당시 훈련도감 포수들이 궁궐로 모여들었고, 인조를 숙위하는 금군(禁軍)들도 무기를 소지한 채 장막 근처에 있었다.

장막이 걷힐 때 마부대 일행은 무기를 든 병사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마부대 일행도 놀라 허겁지겁 달아났다.?

청나라 기록에는 당시 용골대 일행이 너무 급한 나머지 민가에서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왔다고 적었다.?
그것은 사실상 조선과 후금의?관계가 끝장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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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인조는 팔도의 백성들에게 유시문(諭示文)을 내렸다.

‘정묘호란 때는 부득이하여 임시로 화친을 허락했다. 하지만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强弱)과 존망(存亡)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나자.’는 호소였다.?

대의명분을 위해 국가의 존망까지도 걸 수 있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하지만 3월7일,

단교한다는 사실과 방어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서를 갖고 평안감사에게 가던 전령이 용골대?일행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골대가 가져온 인조의 유시문을 보았을 때 후금의 여러 버일러들은 당장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섬멸하자며 흥분했다.

홍타이지는 차분했다. 그는 버일러들을 만류하며 먼저 조선에 사람을 보내 속내를 떠보라고 지시했다.
4월11일

홍타이지는 백관들을 이끌고 심양성의 천단(天壇)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제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식장에는 조선에서 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도 있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이 진행되는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같이 도열해 있던 청의 신료들이 발끈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을 죽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만류했다.

'나는 한 때의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신료들을 다독였다.?

홍타이지는 두 사신이 귀국할 때 인조에게 선사하는 초피(貂皮)를 비롯하여 은과 인삼 등을 들려 보냈다.

하지만 이확과 나덕헌에게 들려준 국서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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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조선 신료들을 비난하고 조롱한 점이었다.

그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을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들 서생(書生)들이 10년 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왕은 지금 덕과 의리를 닦지 않고 해도(海島)의 험준함만 믿고 있으며 서생들의 말을 듣고 형제의 화호를 깨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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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는 자신이 군대를 움직이는 날짜까지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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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덕헌과 이확이 의주에 도착하자 당장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상소했다.

그는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통곡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덕헌 등이, 참람하고 말도 되지 않는 오랑캐의 서신을 받은 즉시 던져 버렸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빨리 나덕헌과 이확의 목을 베어 그것을 홍타이지에게 보여 주라고 촉구했다.

나덕헌과 이확을 성토하는 조정 신료들의 명분론은 극에 이르렀다.

나덕헌과 이확은 결국 평안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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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가 엄청난 위기 상황이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인조는 여전히 안이했다.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명분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실제로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정온 같은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의 책임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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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7일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글을 의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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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도, 재물도 없는 우리는 오로지 대의와 하늘만을 믿는다.?과거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말로를 보라.

자중지란이 일어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조선을 침략했던 그의 부하들은 다 죽었다. 반면 우리와 우호를 유지한 도쿠가와씨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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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

명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입경했다.

황손무는 조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조선이 지독한 숭문주의(崇文主義)에 빠져 무비(武備)를 갖추는 데 소홀했고, 병농(兵農)이 구별되지 않아 군사력이 약해졌다고 진단한 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힘쓰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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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귀국 길에 보낸 서한이 10월24일 조정에 도착했다. (책에서는 황손무의 편지 부분이 더 뒤에 있는데 여기 붙임)

그는 조선 신료들이 현실을 모른다고 야유했다.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利用)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고 의관(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군현(郡縣)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황손무의 비판은 신랄했고 진단은 냉정했다.‘귀국의 인심과 군비(軍備)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란 결단코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장유(奬諭)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십시오.’

조선을 찬양하고 청과의 싸움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황제의 유시문을 들고 왔던 그였다.

조선을 다독여 청과 싸움을 붙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지만, 황손무가 본 조선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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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8일

비변사는 심양으로 역관 권인록(權仁祿) 등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자고 주청했다.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라.’는 명나라 감군 황손무의 충고도 비변사의 주청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인조는 비변사의 주청을 받아들였다.‘결전’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자 수찬 오달제(吳達濟)와 헌납 이일상(李一相) 등이 들고일어났다.

‘우리는 이미 오랑캐와 절교하여 사자(使者)가 통하지 않으니 간첩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황손무에게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이일상 등은 더 나아가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는 것은 위로는 명을 배반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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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이 보다못해 다시 나섰다. 그는 먼저 연소한 언관들이 군사 기밀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개탄한 뒤,

정묘호란 때 일부 언관들이 ‘야간에 적을 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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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9월27일 사간원의 언관들은, 최명길이 중론을 무시하고 국가 정책을 밀실에서 추진하려 했다며 파직하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언관들을 비난하고 최명길을 두둔했지만 11월6일, 최명길은 판윤(判尹) 자리에서 물러났다.?

인조와 비변사는 논란 끝에 역관들을 심양으로 보냈다. 홍타이지는 조선 역관들을 퇴짜 놓았다.

비변사는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도모하자고 했다. 삼사의 언관들은 저들의 본심이 드러났다며 다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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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12월 초

인조는 다시 사신을 출발시켰다. 사신이 심양으로 가고 있던 도중에도 귀환시킬 것을 요구하는 언관들의 항의는 빗발쳤다.?
그러나 이미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는 11월 25일, 신료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결심을 고하는 제사였다.?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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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져서 여기서부터는 간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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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일 조선 원정에 동참할 몽골 버일러들이 병력을 이끌고 심양에 집합했다.

12월2일 오전 홍타이지는 대군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당자(堂子)에 나아가 삼배구궤두례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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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9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몰려오는 상황을 인지했다.

‘병자록’에 따르면 이미 12월6일부터 청군과 관련된 이상 징후를 알리는 봉화(烽火)가 여러 차례 올랐지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그 상황을 서울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9일 적군이 이미 순안(順安)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장계를 올렸다.

청군이 이미 안주를 지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김자점의 장계가 조정에 들어온 것은 12월1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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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6일

조정은 종친 능봉수의 품계를 군(君)으로 올려 인조의 아우로 칭하고 형조판서 심집에게 대신의 가함(假銜)을 주어 적진으로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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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왕제’ 때문에 격분한 청군 지휘부는 심집 일행을 퇴짜놓았다.

마부대는 ‘이제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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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류는 이어 최명길, 장유(張維) 등과 함께 인조에게 ‘세자를 적진으로 보내고,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청했다.?
소식을 들은 예조판서 김상헌이 비변사에 나타나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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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9일 오후?

청군의 좌익(左翼) 주력군 2만 4000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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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명나라 황제의 생일이었다. 인조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쪽, 북경 황궁을 향해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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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5일

도원수 김자점이 이끄는 5천여 명의 병력,?도르곤이 지휘하는 청군의 기습에 전멸, 김자점은 단기로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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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7일

-강원도 근왕병 패퇴

-조정은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보냈다. 세시(歲時) 인사를 하면서 적정(敵情)을 떠보려는 깜냥이었다.

?대사간 김반(金槃), 승지 최연(崔衍), 교리 윤집(尹集) 등은 격렬히 반발하며 적진에 사람과 선물을 보내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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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산성 북문 아래 골짜기에 있는 적진을 공격했다.

매복한 청군은 처음에는 조선군이 포로와 우마(牛馬)들을 거두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진이 비어 있다고 착각한 조선군 수백 명이 쏟아져 내려오자 청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패전의 진상 파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호는 전사자가 40명 정도라고 축소하여 보고했다.

김류와 유호의 책임이 제일 컸지만, 군사들을 제 때 물리지 못한 과오는 김류의 퇴각 명령을 전한 초관에게 전가되었다. 그는 참수되었다.

또 혼전 중인 조선군을 제 때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성장(北城將) 홍두표(洪斗杓)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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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홍타이지는 탄천(炭川) 주변에 자신이 머물 진영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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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1월1일

인조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마쳤다.

조정은 비변사(備邊司) 낭청(郎廳) 위산보(魏山寶)를 청군 진영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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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료들은 홍타이지가 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최명길은 ‘황제가 왔으니 조선 실정을 알리려 한다.’는 명목으로 청군 진영에 사신을 다시 보내 적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헌은 하루에 두 번씩이나 사신을 보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김신국은?근왕병들이 사신이 적진을 왕래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해이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역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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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국, 이경직, 홍서봉 세 사람이 청군 진영으로 다시 가기로 결정되었다. 인조는 그들에게 실언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臥薪嘗膽)도 할 수 있다며 그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주문했다.?
김상헌은 적정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지레 ‘와신상담’ 운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다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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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대가 나와 누런 종이를 내밀며 황제의 조유(詔諭, 황제가 신료들에게 내리는 조서와 유시문)라고 일컬었다.?

홍타이지가 보낸 편지는 ‘대청관온인성황제(大淸寬溫仁聖皇帝)가 조선 국왕에게 초유(招諭)한다.’는 문구로 시작했다.
김상헌이 나섰다. 지금 사죄해 봤자 저들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군사들에게 적서(賊書)를 보여주어 적개심을 고취시키자고 촉구했다.

그러자 최명길이 막아섰다. 홍타이지가 온 이상 대적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뿐이라고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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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 논란 끝에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답서를 완성했다.

주목되는 것은 호칭이었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조선을 ‘소방’으로, 인조는 ‘조선국왕’이라 했다.

맨 마지막에는 의연히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했다.‘조선 국왕 신(臣) 모(某)’란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칭신’은 일단 거부했다.

또 청의 연호 대신 명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에 대한 충성 또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았다.?

답서를 보낸 다음부터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다시 최명길(崔鳴吉) 등 비변사 당상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에 대해, 적의 세력을 과장하고 화친을 주도하면서 나라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류에 대해, 하는 일 없이 겁만 많아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유백증(兪伯曾)은,‘칭신’한다고 해서 포위가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나라를 그르친 김류와 윤방(尹昉) 등의 목을 베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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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4일

전라도 근왕병이 수원 광교산에서 청군에게 승리(청군 수뇌부급 적장 사살), 보급 문제로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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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9일 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琳)이?청군 진영을 습격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수급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인조는 그가 세운 공을 가상히 여겨 면주(綿紬) 세 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했다. 수급의 살은 얼어 있었고, 피를 흘린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급의 모양이 청군의 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데 출신(出身) 권촉(權促)이 수급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형 권위(權偉)의 수급이라는 것이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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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2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갔다. 앞서 전달한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명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한 부분이었다.

‘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이 곧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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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7일

홍타이지가 답서를 보내다.?조선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공식적인 첫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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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8일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를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는 삭제했던 ‘폐하(陛下)’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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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9일?

홍이포 포탄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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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0일

칭신을 다짐하는 국서를 들고 청군 진영에 갔던 사신들은 날씨만큼이나 음산한 내용의 답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인조가 성에서 나와야만 항복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

나오기 전에 청과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척화신(斥和臣) 두세 명을 먼저 묶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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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1일

인조는 청군 진영에 국서를 다시 보냈다. 이날의 국서에서 조선은 더 작아졌다.

인조가 신(臣)을 칭한 것은 물론 홍타이지를 ‘폐하’라고 부르고, 명의 숭정(崇禎) 연호 대신 청의 숭덕(崇德) 연호를 사용했다.

‘황제국’ 청이 요구했던 것을 사실상 모두 받아들이는 형식의 국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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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조정은 화친을 배척한 신료들에게 자수하라고 권고했다.

-강화도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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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수원(水原) 출신의 장수들이 정원(政院) 문밖에 몰려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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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5일

청군은 사람을 서문으로 보내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덕형(李德泂)과 최명길 등이 청 진영으로 가자 용골대와 마부대는 협박을 늘어 놓았다.

‘황제가 내일 귀국하실 것이니 국왕이 출성하지 않는다면 사신은 다시 오지 말라.’며 그 동안 받았던 국서를 모두 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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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6일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의 장졸들이 행궁으로 몰려와 무력시위를 벌였다.

역시 척화신들을 붙잡아 청군 진영으로 보내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

이 날 저녁 최명길, 김신국, 홍서봉 등이 청군 진영으로 갔다. 왕세자가 출성한다는 사실을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청군 지휘관들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전히 선을 그었다.
이윽고 용골대 등은 최명길 일행에게 충격적인 내용을 통고했다.

그들은 강화도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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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7일

김신국과 이홍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가겠다고 ‘굴복 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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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8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조유문(詔諭文)을 가지고 왔다.

홍타이지는 유시문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인조에 대한 협박을 빼놓지 않았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려 주었다. 짐은 망해가던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까지 신의를 어기지 않도록 한다면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란 조선이 명에 대해 그토록 고마워했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청은 조선의 항복을 코앞에 두고, 자신들이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을 베풀었다고 역공을 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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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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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일

홍타이지가 개선?길에 올랐다.?인조는 홍타이지를 전송하면서 다시 한번 삼배구고두례를 행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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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헬윤회
    16.01.10
    재미있게 읽었음.

    조선의 지배충들이 한다는 정치와 외교의 퍼포먼스는 예나 지금이나 똔똔이지.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해야 했다는 말보다는, 병자호란 때 망해야 했던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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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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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3 갈갈히 찟긴 헬조선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곳... 1 new 양송이스프 354 1 20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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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유교탈레반 (스압주의) 1 new 괴괴나사 551 4 20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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