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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노비)들이 다시쓰는조선사

[공지] 조선 노비제 비판. 세종 노비 복지 노비종모법 고찰

2016.10.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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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1. 세종대왕의 노비 출산휴가 ( 노비 복지 )를  대중매체에서 강조
2. 서양의 흑인 노예제도를 통한 물타기 수법 (동시대 서양, 동아시아와 조선의 노비제 비교)
3. 조선 노비제도의 내재적 붕괴는 없었다.
4. 노비들 대한 예외적 우대 사례를 부풀리는 경향에 대하여...
5.세종의 노비종모법이 가져온 생물학적 파급효과



봉건유교제와 노비제 미화작업을 위한 사례들
1. 세종대왕의 노비 출산휴가 ( 노비 복지 )를  대중매체에서 강조 

진실은 고려시대 5~10% 미만이었던 노비비율이 세종의 노비종모법 때문에 조선 백성의 40~70%에 이르는 정도로 육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덕에 조선은 노예제국가로 해외학자들에게 분류 되기도 한다.
(조선을 미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애써 노비와 노예의 차이점을 강조하려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노비도 살기 좋았다'라는 건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이다. 4번 주제에서 반박하겠다. )

"그것은 옳지 않다. 국가가 법을 세우는데 어찌 종으로 하여금 양녀에게 장가들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양민과 천민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일절 금단시키고, 만약 범법하는 자가 있거든 율에 의거하여 처벌하며, 그 범법 행위로 인하여 낳은 자녀는 다 노비가 되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고 유익하지 않겠는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비(私婢)가 천인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민을 만들고자 하여, 양인을 끌어들여 그것이 아이의 친아비라고 일컬으니, 이것으로 인하여 그 아비를 아비로 하지 않아 윤상을 파괴하며 어지럽히게 된다. 이것은 오늘의 큰 폐단이니 바로잡지 않을  없다.” -세종대왕-

".......사삿집의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하고 공에 투탁(投托)하는 자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법을 세운다면 사비(私婢)는 자기의 자녀가 속공되는 것을 기쁘게 여겨, 모두 양민의 남편을 얻어서 그의 자녀로 하여금 다 공천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년을 넘지 않아서 사천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또 범법하는 자가 너무 많아서 그 죄를 다 처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부득이하다면 양인과 천인 사이의 통간을 일절 금지하고, 그 범법 행위로 낳은 자녀는 각각 주인에게 돌려주게 한다면, 사비는 양인 남편이 자기에게 무익(無益)하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양민과 통간을 즐겨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성-

"공·사의 천비(賤婢)가 자주 그 남편을 바꾸어 양민과 천민을 뒤섞기 때문에 어느 남편의 자식인지 분명히 가려 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로 인하여 제 아비를 아비로 하지 아니하는 윤상(倫常)을 패란(敗亂)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하면 위로 태종께서 이루어 놓은 법에 위배되지 아니하고, 아래로 인륜(人倫)의 바른 길을 파괴하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각기 충분히 의논하여 보고하라."
-세종대왕-


사성이 노비종부법을 이용해 노비들이 양인 남자와 결혼하여 노비신분을 벗어나려 하고 있고, 이렇게 되면 100년이 되지 않아 노비들이 없어진다고 우려하자, 세종은 인륜을 파괴하는 행동이라며 동조하는 장면이다.

이것이 유학자들과 일부 양민들만의 대왕인 세종의 본모습이다.

세종은 자기 아버지가 세웠던 노비종부법을 무너뜨려고, 노비가 양인이 될 수 있던 방법을 막아버렸다.  그것을 어길 경우에는 범죄행위로 엄격히 처리할 것 임을 선포한다. 성군 세종이 한 말이었기 때문에,  조선중기까지노비종모법은 계속 부활하게 된다.

최근 조선 후기의 노비가 세종이 창제한 한글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에 흥분한 작자들도 있고, 세종의 보여주기식 노비 복지를 찬양하는 인간들도 많아졌다.   
당신에게 물어보자. 출산휴가와 한글사용법을 취할 수 있게 할테니 너보고 노비가 되어라 한다면 과연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
한글창제와 부국강병, 노비출산휴가제로 칭송받는 세종의 이면에 숨겨져있는 교활한 속내를 들여다보자.

세종이 대한민국 국민 40~70%의 조상들에게 한 패악짓

①노비종모법(사실상 일천즉천) 으로 전국민의 절반을 수 백년간 노비로 갈아버린 것
조선시대 백성의 삶이 좋았다는 연구는 다 거짓이다. 왜냐하면 40~70%에 달했던 노비계층에 초점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노비가 얼마나 잔인한 대우를 받았는지 아래에 설명하겠다.

②노비의 인권을 말살하는 부민고소금지법을 만든 것 
※훗날 완성된 경국대전에서는 종이 주인을 고소하면 교수형에 처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③ 명나라에 처녀를 공물로 진헌하기 위해 세종이 직접 10여 차례 처녀를 간택한 것 
※명나라 사신은 조선왕도 못보는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할 수 있었고, 세종은 명나라 사신에게 직접 4번 절하고, 면복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4번 절하고 향을 피운 후, 만세를 부르며 4번 절한 후, 명황제를 위해 발을 굴러  직접 춤을 추고,  또 4번 절을 한 행동이 1419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제에게 바쳐진 처녀만 태종 40명, 세종 74명이었다.  처녀 조공이 잠시 멈췄던 적도 있으나 20년 도 되지 않아,  다시 부활하여 11대 왕인 중종때까지 조선의 처녀 조공은 게속 되었다.
명나라 사신이 개인적으로 끌고간 처녀의 숫자까지 합치면 수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11대 중종 때 끝난 처녀 조공은 다시 16대 인조부터 청나라에게 진상된다.
※세종은 12년 동안 명나라 바칠 처녀 진상품을 세심하게 골랐는데 1426년 12월 한달 동안은 10 차례를 직접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처녀를 명나라에 바치기 위해 간택하는 업무를 보았다. 처녀 미인을 고르는데 일가견이 있던 세종은 여자를 밝히게 되었을까?
문란한 성생활로 세종 제위 기간에 성병으로 죽어나간 궁녀가 100명을 넘는다는 믿기 힘든 야사도 있다.
※세종이 42세때 걸린 병은 매독이 아니라 임질 이라는 주장도 있다.

④ 명나라에 처녀를 바치기 위해 나라에 결혼금지령은 내렸다.
⑤ 4군 6진을 개척하는 와중에 천민 여자들을 군인들을 위한 성-노-예를 배치한 행위 
⑥ 기생이 없는 지역에서는 민가의 유부녀와 주막업소의 딸을 강제로 지정하여 군인들과 잠자리에 들게 한 행위등은
세종의 일이니 절대로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군인 성-노-예는 세종부터 180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세종이 변진과 주군에 배치한 천민여자들은 군졸들을 접대하였고, 그 딸들까지 신분을 물려 받게 하였으니니 동시대 세계사에 세종처럼 여자 성-노-예를 법으로 강제 세습시킨 사례는 없다. 300년 전 십자군들이 데리고 다니던 창@녀들조차 강제 세습시키진 않았다.

※기생이라고 하는 관기와 수급비가 있었다.
관기가 되면 곱게 차려 입고 지낼 수 있지만 수급비는 물 긷고, 밥하고 빨래하는 각종 잡일에 시달렸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주름살 투성이고, 머리도 헝클어져 보기에도 처량했다. 암행어사 박문수는 거지차림으로 어느 고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홀대한 기생을 수급비로 만들고, 자신을 잘 모신 수급비는 관기의 우두머리인 행수기생으로 만들었다.

※경성부사가 과부가 된 사비 태향을 방비로 배정하여,1년간의 현지처 노릇을 하도록 하였으나 태향이 거부하고 말을 듣지 않자 그 어머니와 오라비를 관아에 불러들여 매를 쳐서 굴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모진 주인은 도망가다 잡힌 종의 손가락이나 귀를 자르기도 하였으며 발 뒤꿈치 힘줄을 끊어 불구를 만들기도 했다. 성동 때, 유호손이라는 자는 도망간 여종을 잡아다가 쇠를 달구어 근육을 지지고 왼쪽 발뒤꿈치를 뚫어 삼끈으로 꿰어 묶어 놓은 일도 있었다
 .- 4군 6진에 부임하던 박취문의 부북일기-

※ 1400년대의 권세가 홍윤성(세종~세조)은 어린 여종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나무에 매달아 놓고 활을 쏘아 죽이려 하였다. 이에 포도부장 전임이 이왕 죽인 셈치고 여종을 달라고 조른 적도 있다.  대유학자로 여겨지는 율곡이이도 노비 111명 거느린 부모의 밑에서 자라났으니, 대놓고 재물을 탐하고  노비수를 늘린 양반가에서 노비 한 두명 정도는 그리 심각한 문제도 아니였을 것이다.

※율곡이이는 노비를 111명이나 가지고 있던 부모 밑에서 자라났고
퇴계이황은 367명의 노비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이이, 이황 분재기-

※조선의 노비는 가축 처럼, 한 구 두 구라는 단위로 세어졌으며, 여자노비를 사고 팔때는 뱃속의 태아까지 값을 쳐서 받았다. 노비의 가격은 조랑말 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세종 덕에 조랑말 반마리 값이면, 전국민의 절반을 노비로 구매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으며, 구매 즉시 노비의 생사를 좌지우지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백성의 절반인 노비들의 역사에서는 진보를 수백년 후퇴시킨 세종이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이고 유학자들에게 괴물 취급받았던 고려의 요승 '신돈'과 광종, 몽골인 코르구즈,  조선의 태종은 재평가 받아야 하는 것이다.


2. 서양의 흑인노예제도를 통한 물타기 수법

사실 당대 동양과 서양에서는 최소한 같은 민족을 노비로 삼아 돈으로 거래하고 세습시키는 행위는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명나라 뿐만아니라 수백 년 전의 송나라시절부터 노비를 세습시키는 것에 대한 인권적 의식상장이 이루어져 전쟁포로나 범죄자인 경우에만 노비로 삼고 그것도 1대로 제한하여 세습은 불가하였다. 세종이 1432년에 노비종모법으로 노비 수를 늘리기 40년 전에, 명나라는  명태조 주원장이 직접 나서서 국법으로 아예 사노비를 완전 폐지 시켜 버렸다.
비록 비공식적으로 사노비를 쓰는 명나라 권세가들도 있었으나공식적으로는 금지하는 것이 나라법의 입장이었고 이는 같은 민족을 노비로 부리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패륜이다!  그리하여 사노비 0명인 사회가 이상적인 세상임에 황제에서 노비까지 전국민적 동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신하들이 정확히 "100년 안에 모든 노비가 양민과 결혼하여 없어질 것"을 우려했던 발언에 동조한다.  세종은 동시대 "명나라, 일본, 유럽인이 가졌던 같은 민족을 노비로 부리는 것이 쪽팔리고 부끄러운 패륜" 임을 철저히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노비가 0명인 나라는 세종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며, 양반들에게 재앙인 사회라는 것이다. 노비들이 양인되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세종에게 있어서는 간악한 범죄에 불과했다.  단지 양반들과 나라의 재산물인 노비가 죽으면 안되니까 적당히 출산휴가 따위를 던져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세종을 오늘날 인권주의자, 복지주의자의 선구자로 수구지식인들이 포장하고 있으니 경악할 일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수구지식인이라 함은 단순히 투표행태만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추가로 살펴본 후 판단한다.)


 일본도 부락민이 있었지만,  돈으로 사고팔아 세습까지 시키는 노비제는 규모가 3% 미만으로 계속 줄어 들고 있었다.  덧붙여 일본은 사무라이들이 각지에서 난동을 일으켜도 책임을 묻지않는 사실들도 있었으나, 조선의 세종처럼 노비가 주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주인을  고소할 수 없도록 부민고소금지법을 법으로 대못질 해둔 나라는 없다.

서양에서는 세종의 노비종모법(1432년)보다 330년 빠른 시기인, 1102년 영국 런던공의회에서 크리스트교도 간의 노예거래를 불법화 시켰다.
(향후 전쟁포로 같은 예외 사례는 있다.)
최소한 같은 기독교인들끼리는 노예로 삼지 않는다는 논리는 계속 진보하였기에 종국에는 흑인같은 타민족에게까지 확대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조선 말기에 들어온 미국과 러시아의 여행객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조선양반들이 같은 민족을 노비로 부리고 있는 참혹한 광경에 아연실색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그리스정교회 신앙을 가졌던 몽골(원나라)인으로서 코르구즈가 정동행성 평장사로 고려에 파견되었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내정간섭을 하기 위해 왔던 코르구즈지만, 동족을 노비로 삼는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코르구즈는 고려에서 一良則良法(일양즉양법) 이라는 선진적인 노비혁파를 시도하여, 당대 고려인들 충격을 줬다.
노비들이 송사를 거니 국가행정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으며, 노비해방의 규모가 예상을 뛰어넘었을때 충렬왕과 기득권의 강렬히 저항했다.
 2년 만에 코르구즈는 고려를 떠나야 했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왕조(세종시절 편찬) 에서는 오로지 충렬왕이 몽골제국 황제에게 직접 올려 애원하는 반대상표와, '코르구즈의 정책이 고려의 화목을 깨뜨린다는' 귀족들 떠들썩한 입장록만 남겨놓고 있으며, 코르구즈 입장에서의 노비정책에 관한 내용은 모조리 삭제하여, 단 한줄로 남겨 두었다.
 ※그리스정교회는 발칸,그리스,러시아,소아시아, 중동 등지에 퍼져있는 동방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 코르쿠즈는 그 가운데 네스토리우스교인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도는 헛되지 않았다.  공민왕, 신돈, 우왕, 공양왕의 고려 후반기와 조선 태종까지 끊임없는 노비해방전문 관청이 흥망을 거듭하며 노비개혁을 실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고려 극후반기의 역사는 사실 노비제도를 둘러싼 피로 얼룩진 처참한 사투의 역사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노비제도가 차츰 축소되면서 진보의 길로 걸어나가고 있었던 점이다.

그런데 이런 진보적 민중노비해방운동을 단번에 수 백년 퇴화시킨 역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세종이다. 
700년 전 한반도를 뒤집어 놓을뻔 했던 노비해방의 선구자 코르구즈(闊里吉思활리길사)가 누군지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세종대왕의 노비출산휴가만 강조할 뿐, 세종의 노비종모법과 일천즉천, 군인성-노-예로 인한  폐해 역시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500년 동안 인구절반이상을 가축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대왕세종 덕에 확고히 해졌는데, 이것 앞에 어떤 업적이 상쇄될 수 있단 말인가?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이런 비겁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태종에 이어 세종이 자국민 노비제 축소를 한번 더 이어갔다면, 노비제는 중국, 일본, 유럽의 경우처럼 궤멸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 우리가 명군이라 하는 왕들은 개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득권의 특권을 분쇄했던 자들을 말한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기득권의 반란을 이겨내고 피튀기는 싸움을 걸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한 걸음씩 발전할 수 있었다. 
 세종이 대면했던 가장 큰 기득권은 노비제도 였으며, 동시대적으로 심하게 낙후되어 있던 악습도 노비제도였다. (양반들의 재산목록부 첫장에는 늘 노비가 토지를 제치고 먼저 등장 )
여기서 세종이 선택한 것은 기득권과 대결이 아닌 양반층에 대한 적극적 동조이다. 한글을 만든 것으로 세종은 암살당하지 않는다. 허나 노비제를 중국이나 유럽수준으로 축소 시켰다면 세종은 피튀기는 정국을 피할 수 없던 것이다. 겁쟁이 세종은 순순히 양반들에게 굴복하였고, 노비 수를 급격하게 늘어나게 만드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하게 된다.
조선 전역에서 어제까지 하더라도 태어날 아기가 양민이 될 거라 희망을 품고있던 임신중인 노비어미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분노가 폭발하던 이들에게 고작 노비출산휴가제가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후 500년 내내 조랑말 반마리 값으로 이웃집 사람을 구매할 수 있게 된 양반들은 태평성대  사이비교주 세종에 대한 칭송으로 조선왕조실록을 가득 채우게 된다.
폭군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독한 짓이 백성 절반을 학살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 절반을 노비로 삼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자를 성군이라고 전국민이 믿고 있으니, 반천년 동안 성리광신교 외에는  한반도에 새로운 학풍과 개혁이 등장할 수 없었다.












3. 조선 노비제도의 내재적 붕괴는 없다.
 3-1 조선의 양반과 노비 비율은?
조선 인구에서 양반비율은 2%에 불과 하였다.
왕실 후반기 300년의 가계도에서 인조를 제외하고 모든 왕이  외동아들, 형제 중 혼자 살아남거나, 후사가 끊기는 사례를 철종대까지 보여준다.
일제 때문에 절명시를 쓰고 자결했던 황현은 흥선대원군이 전주이씨의 세를 불리기 위해 10만명을 받아들이더니 앞으로 조선왕실을 지탱할 100만대군을 얻었다며 감격했던 일을 매천야록에서 적어두었는데, 이를 통해 양반이 오늘날 급격하게 늘어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점, 조사된 인구조사에서
 양반의 비율은 충남, 충북, 경북, 서울, 전북 외의 나머지 모든 지역은  1% 미만으로 조사된다.
(일본인 학자가 철종대 양반 비율을 70%으로 잡고 연구한 것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양반성씨를 모두 합쳐도 평균 2%에 불과한데...
오늘날 김이박 으로 대표되는 양반성씨가 각기 수 백만명의 인구를 거느린 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되는 것이다.

하멜은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나라 사람들의 절반은 노비고 일부 양반들은 노비를 2000~3000명씩 거느린다 노비는 자식을 돌보지 않는데 일할 만한 나이가 되면 주인이 즉시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하멜표류기-

어느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노비가 최대 많았던 시절에는 노비비율이 80%까지 올라갔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제주대 조성륜 교수는 서울인구의 75%가 노비 였다고 분석하였다.


 3-2 노비제도의 붕괴 이유
실제로는 인구의 대다수는 천민, 노비계층 이었다.
낮게 잡아도 조선시대 중기까지 전체 인구의 30%는 사노비, 10%는 공노비 였다.  서울근교는 60% 지방은 40% 이상이 노비계층이라는 조사도 있다. 이런 노비제도는 임진왜란(1592) 이 터지고 나서야 대격변을 맞이 한다. 
조선정부는 노비들이 일본에 협력하는 순왜로 붙는 것을 매우 우려 하였고, 양반들 조차 이대로 가다간 노비와 토지 모두 잃을 것이 분명했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혼란기 동안 노비들에게도 전쟁공로와 군수물자, 정부재정(쌀13석)에 도움을 준 경우 풀어주는 면천종량 정책을 쓰게 된다.
 

연이은 전쟁과 대기근을 맞이하여 세금을 낼 양인들이 급격히 감소해
사람들이 죽고나서야, 현종(경신대기근), 숙종(을해대기근), 영조에 이르러 노비 수를 줄이고 양인 수를 조절하는 정책을 실시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조선후기에 쓰인 노비조절 정책의 이름이 다시 '노비종모법'이라 헷갈릴 사람들도 있겠다. 이 경우에는 간단하게 인구구조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남자노비가 여자양민에게 장가가는 사례가 많아진 경우의 이야기 이다.  이미 조선 중반에 노비숫자가 전국민의 과반을 넘어설 정도로 많아졌다. 그것이 전쟁과 포로, 대기근, 도적떼 등으로 인한 혼란 속에 남자 숫자가 아예 적어졌던 것이다. 벼농사 문화권에서 힘을 쓰는 남자노동력은 귀중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일부다처제 제도가 더 공고해 졌으며,  남자노비들 중 일부는 여자양민과 결혼 하였다.
이렇게 양인이 된 남자노비들은 부족한 세금과, 군역을 담당하였다.


※경신대기근, 을해대기근 동안 조선은 지옥도 였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아이들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당대 권세가 집안에서도 역병과 기근으로  죽어나간 사례가 많다.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영조, 정조, 순조때 공노비가 완화되어 가며 해방되는 과정도 살펴보자면
현종시절의 경신대기근(1670)과 숙종시절(1695)에 일어난 을해대기근으로 전국토는 수습불가 상태였고 공노비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는 일들이 빈번해 지는 와중에 영조가 집권한다.

영조는 공노비들을 탄압하는 강경책을 먼저 사용하였다.  공노비들을 묶어서 한명이 도망갈 시에는 남아있는 노비들에게 연대책임을 지도록 하는 비총제(노비비총제)를 시행하여 서로 감시하게 하였으나, 하지만 이건 공노비들에게 도망을 부채질 하는 것과 다름 없었고, 뒤늦게 신공을 낮춰주는 보완책을 펼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마저도 타이밍이 늦어버려 영조, 정조, 순조로 이어지는 수십년 동안 공노비 장부는 유명무실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순조는 공노비 제도를 해체 시킬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간혹가다 조선 중앙정계의 양반들과 성호이익같은 재야의 실학자들 가운데 노비제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하는 유학자들이 나오긴 하였으나
그들 중 자기 집안 노비를 직접 해방시키며 언행일치는 보인 자는 단 한명도 없다. 혹은 다른 양반들의 비판이 두려워 자신의 발언을 망언이라고 후회한 송시열의 경우도 있다. 송시열도 자기 집안 노비 만큼은 재산물로 취급하여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세종의 비인간적 결단으로 주변국 보다도 수백년을 후퇴된 상태로 시작했던 조선의 노비제도는, 백성의 절반이 돈으로 매매되는 가축상태에 놓여진 가장 시급한 개혁의 대상이였으나(양반들은 재산목록에 토지보다 노비이름을 먼저 쓸 정도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노비해방은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과거 급제자가 수두룩하고, 500년 동안 철학만 연구한 자들이 드글거렸던 조선의 상황이 무색하리 만큼, 남을 설득시킬 정도의 수준을 가진 노비해방이론은 정립 조차 되지 못하고 있었다.








4. 일부 노비들 대한 예외적 우대 사례를 부풀리는 경향에 대하여

노비가 수 백만명이었으니 개중에는 잘생기거나 능력, 행실이 특출나서 주인의 마음에 드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양반들 중에서도 인심이 좋은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일부의 사례를 들어 조선 노비제도에 대한 미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대기업과 전문직종에 취직하여 삶의 질을 올리고 있으나,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젊은이들은 삼포세대, 88만원 세대라 불리우며 열악한 중소기업을 전진하고 있다.
최근 기사에 의하면 임금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월 200만원 미만이라고 하니 작금이 현실이 어떠한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느 신문사에서 직원들 복지에 신경쓰는 미담 중소기업을 매일매일 선정하여 기록으로 남긴다면, 2년 간만 하더라도 수백 개의 사례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지식인에게는 수백개의 사례가 기록물로 남게 되는 것인데, 이를 보고  그가 2016년의 대한민국 노동자들과 그 가족 대다수가 처한 힘겨운 상황을 조금이라도 희석 시키려는  방향으로 글을 쓸 수도 있다. 만약  그런 행동을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무상급식을 신청하려다 또래집단으로부터 거지새끼라고 놀림을 받아 평생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조명된 적이 있다. 조선 노비들도 그에 못지 않게 수백년 동안, 가축처럼 돈으로 매매되는 신분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때 까지 멸시와 천대를 받아 온 것을 상상하는 것이 그리 비약은 아닐 것이다.
밥숟가락 몇 수저 더 먹여 주고, 동네 모임에 몇 차례 더 끼워 줬다는 기록 때문에, 노비와 양인사이의 경계를 최대한 희석시키고자 했던 자들은 정신상태를 심히 의심스럽다.

일부 양반가에서 노비들에 후한 대접을 해줬다고 하여, 그것을 조선후기사를 균형있게 바라본다는 미명하에 선전물로 활용하려는, 어리석은 짓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부끄러운 행동임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집안내력을 포장하는데 연연하는 괴물들일 뿐인가? 


재벌들이 기부를 조금 했다고,  재벌의 관대한 이미지를 선전하는 것만큼 아둔한 행동이다. 그런 교활한 수작이나 패턴 정도는 이미 양반과 재벌들이 저질러왔던 추잡한 역사 덕에 간파 될 수 있다..  재벌해체론자들은 절대 속지 않을 것이니

잔존한 변형 수구세력이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노비 계층과 그 후손들은 역사의 주인으로  반드시 올라설 것이고,   조선의 양반계층과 세종, 한국의 재벌계층과 독재자는 역사의 죄인으로 난도질 당할 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조선의 수백만명의 노비들 중 "몇몇이 제사를 지냈다거나, 주인이 병간호를 해줬다거나, 노비가 땅을 가졌다거나, 해서  일부 노비들은 괜찮은 형편에 있었으니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다" 는 것이야 말로 한심한 언동이다. 
덮어놓고 조선이 노예제국가였다. 같은 자학사관을 나도 싫어한다. 하지만 
조선을 미화하기 위해 굳이 노비제와 노예제의 차이점을 들어,  긍정적인 부분만 비루하게 부풀리는 경향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한다. 그것이 노비민중이 주인인 세상에 방해가 될 것임을  알고있다.
조선노비제 예찬론자들에게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완벽한 고대노예제 국가인 로마에서는 노예출신 아버지를 둔  페르티낙스는 로마황제까지 올라갔으며, 중국 고계흥은 형남의 왕이었다. 이슬람, 인도의 강국들 중에는 노예 출신들은 귀족들 옆에서 부귀를 누리다 출세를 거듭하여 군권을 쥐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으니, 여기서 능력, 인성 좋은 노예들은 고대노예제에서조차 좋은 대접을 받고 출세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어떤 노예들은 아예 학문이 뛰어나 귀족들의 가정교사가 된 자들도 있다.
로마라틴어 최초의 문학작품이 노예출신 안드로니쿠스가 번역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임을 모르는가? 조선에서 노비 출신 문학가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세종 보다 까마득한 수백 천년 전의 과거의 일들이다.

※사육신 후손들 처럼 원래 양반이었던 자들은 제외한다.
반석평처럼 아예 주인의 지원아래 들어 노비문서를 태우고, 신분을 감춰 과거를 본 사례는 있으나, 공개적으로 그런 사람은 단언코 없었다. 반석평이 노비신분을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종2품이 되어 중중과 충분히 안면을 튼 후 이기도 하다.

※세종의 노비장영실을 극찬할 게 아니라 세종보다 100년이나 앞선 시기에
공민왕은 노비(모친이 노비) 매골승(시체처리) 출신의 신돈에게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 (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領都僉議使司事 判重房監察司事 鷲城府院君 提調僧錄司事 兼 判書雲觀事)" 라는 역사에 남을만한 거대한 직책을 맡겨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세종의 노비종모법 시행 전만 하더라도, 백성의 절반인 노비들에게도 나라 권력의 자리가 열려있었던 있었던 것이다.







5.세종의 노비종모법이 가져온 끔찍한 (생물학적) 파급효과
※조선시대 기록물들을 노비여종을 발정난 동네양반과 평민들이 성.폭.행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 인지 나와 있는데, 여기서 추잡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세종의 노비종모법으로 노비들은 양반가 후손들에게 물건처럼 대대손손 상속이 되니,  무려 500년 동안 여자 노비 후손들과 양반의 후손들이 근.친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노비종모법에 의하면 여자노비들은 평민 양반과 교잡혼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외견상으로는 노비들 끼리 결혼을 해야했다. 즉 양반이 겁탈한 여자 노비가 자식을 가져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양반 자손들이 욕정을 참기 힘들 때면, 자기집 노비 여자자손들을 불러다 대대로 근.친을 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족외혼하는 풍습을 가졌던 원시인들도 꺼려하던 일이다.  2번 주제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조선은 세종대왕이 수백년전에 동아시아와 서양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던 자국민 노예 세습제을 오히려 확대 시켰다. 양반가와 노비들 사이의 근.친 번식이, 조선왕조에서 독보적으로 14세기~19세기까지 이어졌다. 
(내 생각을 보태자면 대대적인 근친으로 유전적으로 열화된 노예들이 높은 확률로 태어났으며, 양반들은 이들을 500년 동안 지배하기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덜떨어지게 태어난 노비나 어제 동침한 여자 노비가 자기 혈족 임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반을 위한 도덕론을 내세우는 성리학자들과 세종에게 노비는 양민과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 말하자면 개, 돼지 가축이었다. ) 
The Great Human Diasporas에서 한국인의 유전형질에 대한 묘한 연구결과도 위의 사실을 뒷받침한다. 국내에서는 썩 유쾌하지 않은 연구다. 

※유럽의 합스부르크가 왕가의 유전적 열화는 객관적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노비제와 근.친을 연구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금지 시켜야 할까
 
※양반들이 여종을 성노리개 삼은 무수히 많은 기록들이 있어서, (일종의 유희로 생각했기 때문에 )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유럽에도 초야권이라고 하여  영주가 농노 여자의 첫날밤을 가질 권리가 있었다. 범위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지만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몽골제국의 차카타이 일족이 동유럽을 정복하고 행사한 후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1200년대에 독일프랑스에서도 등장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영국은 문학적 단어 였을 뿐이고, 스페인에서는 퍼포펀스를 진짜로 하려는 영주가 나오자, 1400년 초에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영주의 폭정이라며 초야권을 폐지 시켰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많은 사회적 비판이 가해졌고, 교회는 초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사실상 세금을 더 뜯어 내기위한 상징적인 풍습 이였던 것이지, 초야권을 남용하는 영주는 그 사회에서도 정상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문학 작품이 아닌 이상 초야권이 실제로 행해진 역사적 기록이 극히 희박하다.



1432년 실시한 세종의 노비종모법이 사회, 문화, 경제, 생물학 적으로 얼마나 끔찍한 파급력을 가져왔는지 외면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연구하여 분석하려는 사람조차 없다.
수 백년동안 과거시험을 보고 철학만 공부했던 나라, 조선에서 노비해방운동 조차 없었던  것도 이와 같다.






  • 리아트리스Best
    17.01.25

    추천.

     
    그렇지만 양인이라고 해서 노비보다 딱히 낫지도 않았고, 통치자의 의도에 따라 임의로 군역과 요역에 동원되는 등 거의 유럽의 농노 이상으로 부려졌기에 사실상 노비60% + 양민 30%정도는 다른 국가 기준으로는 부자유신분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극소수의 왕족/양반과 상급 양민들을 제외하면 자유인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제에 의해 해방되기까지 500년간 거대한 노예농장 사회였지요.
  • ghjjbvBest
    17.01.25
    유교탈레반 통치이념과 부민고소금지법 같은것이 횡행하는 국가이니 양민이라고 해도 노비보다 못한 삶이었을 듯 합니다...  오히려 노비처럼 어느 양반가문과의 연줄마저도 없으니 더 핍박받았을 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론 조선을 국가형 가축목장 같은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가축화하여 국가라는 우리 안에서 관리하고 부려먹고 빨아먹는것이 조선이라는 국가일듯......
  • 방문자
    17.01.25
    정말 알찬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R.Strauss
    17.01.25
    요즘 지하철 타보면 정말 못 생긴 수준이 아니라 기형아 수준의 사람들이 많던데, 이게 수백년간의 광범위한 근친의 결과인 듯.
  • 초고등영혼대마초쇼군
    17.01.25
    우주의 진리를 거스르면 안됩니다. 아직 지구인은 지능이 덜발달되어서 미개하더군요
  • 앙망헬 기모띠 앙
    17.01.25
    이 정도면 대왕이 아니라 마왕급인걸~
  • 씹센비
    17.01.25
    베스트로 갑시다!
  • 씹센비
    17.01.25
    이거 말고도 세종마왕에 대한 얘기들 존나 많습니다. 댄싱킹 세종 이라고 한번 찾아 보세요ㅎ
    이게 조선의 한계입니다. 조선에서는 성군이래봤자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지요
  • ghjjbv
    17.01.25
    성군은 성군이죠.....    단지 양반, 기득권, 유교탈레반의 성군일뿐.....    이런 놈을 칭송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노예로 끌어내리는 것밖에 안됩니다.
  • 추천.

     
    그렇지만 양인이라고 해서 노비보다 딱히 낫지도 않았고, 통치자의 의도에 따라 임의로 군역과 요역에 동원되는 등 거의 유럽의 농노 이상으로 부려졌기에 사실상 노비60% + 양민 30%정도는 다른 국가 기준으로는 부자유신분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극소수의 왕족/양반과 상급 양민들을 제외하면 자유인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제에 의해 해방되기까지 500년간 거대한 노예농장 사회였지요.
  • ghjjbv
    17.01.25
    유교탈레반 통치이념과 부민고소금지법 같은것이 횡행하는 국가이니 양민이라고 해도 노비보다 못한 삶이었을 듯 합니다...  오히려 노비처럼 어느 양반가문과의 연줄마저도 없으니 더 핍박받았을 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론 조선을 국가형 가축목장 같은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가축화하여 국가라는 우리 안에서 관리하고 부려먹고 빨아먹는것이 조선이라는 국가일듯......
  • 방문자
    17.01.25
    그렇죠. 조선 몇백년간은 그야말로 지옥도였을듯요. 진짜 지옥보다도 더 지옥같은..
    제가 조선시대 양민 또는 노비였다면 아마 일본으로 무작정 탈출했을 겁니다. 
    근데 그나마 나아진 게 이 꼴이니..
  • 그래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을 두고 인세에 생겨난 요마악귀의 지옥국이라고 했었지요. 

    조선을 식민지로 두고 우리(일본)의 힘으로 개화해야 한다는 주장(정한론)도, 원래는 이런 일본 학자들의 계몽주의 의식에서 나왔기도 하구요.
  • 씹센비
    17.01.26
    그것만 봐도
    중세~근세 서양 >>> 중세~근세 조센 및 똥양
    을 알수 있지요
  • 사실 조센의 사회수준은 20세기 이전에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유럽의 르네상스기를 밑도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 ㅇㅇ
    17.01.25
    광화문 한복판으로 제자리 찾아가기
    세좀마왕 정력왕이순실

    헬조선 표징물이다 제지리로 간것이고

    저자의 죄악이 너무커서 이나라 센징이들이 고통속에 살고있지
    아마도 변하지 못할것이다


  • ghjjbv
    17.01.25

    노비종모법으로 국가가 근친민족 근친사회가 되고 인종이 점점 열화되어가는 것을 조센 기득권층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무관심하였거나... 아님 오히려 잘된일이라고 여겼을 듯..... 그렇게 점점 민중이 개 돼지 소 와같은 열등하고 저지능한 가축이 되어 어리석어지고 윗사람에게 복종, 의존만 하는 것이 유교탈레반 이념에 부합되기도 하니까요.... 오늘날처럼 국민은 미개하다! 민중이 열등하니까 내 방식이 옳다! 아랫것들은 열등하니까 독재가 적합하다! 아랫것들은 나만 따르면 된다! 라고 떠들기 좋은 환경조성이 되고.....

  • ㅇㅇ
    17.01.25
    조심스럽지만 그친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하겠다

    너무 이상하다 이나라 사람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심하게 드는 행동들을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
  • 저도 추천합니다. 진짜 헬조선에서는 학교 내신이건 수능 국사건 공무원 한국사, 한능검 등 헬조선 역사로 시험 보는 것들 공부한답시고 그냥 세종대왕 노비종모법 외우고 다음 중 조선 왕의 업적 중 틀린 것은 하면서 문제 풀기만 급급해서 저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런 게 있었나 싶었는데 새로운 관정메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상당히 늦었긴 하지만 충분히 읽어본 가치가 있었다고 보고 추천 드립니다.
  • Crusades
    17.01.26
    뿌리깊은 나무 국뽕놈들 믿으면 안될 새끼들이네. 앞으로 역사는 거른다.
  • 다프
    17.01.26

    노비 문제 때문에 세종대왕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네요. 노비에 관련해서 세종시대에 기록이 많은 것 같더군요. 신분제도를 정리하고 노비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생산체계를 자리잡도록 해 나라를 오래 가도록 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17세기 이후로 노비계급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양반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돈만 있으면 양반을 살 수 있어 노비가 다시 10퍼센트 미만 정도로 줄어들게 되죠. 이 때 신분이 거의 세탁되서 세종 때 노비였던 집안들도 거의 양반이 되었을 겁니다.

  • 근거도없는 글에 웃고 갑니다
    17.01.27

    아니.. 17세기 이후에 노비계급이 줄어들고 양반이 늘어나고 후에 10%미만으로 줄어들었다고요?  반박을 하실려면 그렇다는 근거와 출처 아니 최소 자료검증후에 반박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표를 보면  노비 매매 가격 표인데 1485432646.jpg

    보시면 가격이 하락 되고 노비들이 매매 되는 수가 증가 되어있는데 이표를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hk&types=r&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hk_014r_0010_0350&position=-1 여기 출처 보시면 실제로 이씨조선은 일제에 의해 신분제가 폐지 될때 까지 노비제도가 선행 했던걸로 나오는데 양반이 늘어났다고요? 허..조선후기 돈만있으면 양반이 될수있었던 계층은 노비가 아니라 당시 돈좀 있는 평민과 상인 뿐이었습니다 노비가 무슨 돈이 있다고 양반이 될수 있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매일 뚜드겨 맞고 죽을때까지 일만하고 제대로 된 돈도 쥐어보지도 못한 천한 노비가 어떻게 양반을 살수 있었을까요?

  • 다프
    17.01.28

    저도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매매 수가 증가했다는 것과 노비 수가 크게 상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자료를 가져오셨나요?

  • ㄱㄱㄱㄱㄱ
    17.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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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비수 증가와 매매수 증가가 일관성이 없는 자료라 이부분은  죄송합니다 일단.추가적인 설명을 드리자면  위에 있는 표들은  미야지마 히로시 책에 인용된 표에 맞춰 데이터 한건데 보시면 아시다시치 노비수가 15세기 부터 17세기 까지 노비수가 점차적으로 증가 했고 평민,중인,상인 은 지속적으로 유지 해오다가 통계상으로 평민, 중인.상인 수가 줄어 들고 가짜 양반 족보를 사서 양반으로 전환 되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17세기에 양반이 증가 한게 아니라 18세기 말 부터 양반수가 증가 됬다는걸 알수 있는 자료 입니다

     당시 양반을 살수 있었던 계층은 돈좀 있는 평민이나 중인 상인 이라는걸 알수 있는 자료 네료

    참고문헌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양반』, 강, 1996

     시카타 히로시(四方博), 『조선사회경제사연구』中ㆍ下, 도서간행회, 1976

     

     

  • 대신 양반의 가치가 하락해서 사실상 그냥 양인 A취급 이상은 절대 못 받았지만요.
  • 비실비실
    17.01.26

    번화가 대학가 등등 사람많은곳을 갈때마다 참 신기한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비슷하더라고요 잘생기면 잘생긴대로 못생기면 못생긴대로 평범한대로... 개성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 힘들어요 몇가지 유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순종개들처럼 거의다 그래요
    처음엔 그저 비슷하게 꾸며서 그러겠지 했는데, 이 글을 보니 수수께끼가 풀린 듯 합니다
  • asdf
    17.01.27
    안녕하세요 저는요 거짓말 하는것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저는 1990년생입니다 저는 서울 사당동에 살고있구요

    저는 아직도 사당동에서 운영을 하고있는 뉴디딤돌학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있는겁니다 저는 그 원장 사업가에대해서

    괴씸합니다 싹수없고 양심이 없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그 학원을 다녔습니다 

    지금은 옆건물로 옮겼지만 저는 그 학원원장이

    교육에는 전혀관심없고 짐승처럼 복종에만 관심이

    있는사람입니다 예전에는 학원이름이 디딤돌학원이었는데

    왜 디딤돌학원이었는줄아십니까 학생들이 돈줄이기때문입니다 

    그 원장은 자녀가 두명있는데 둘다 여자입니다 근데전 그자식들한테는 악감정이 없고 상관없습니다

    우리나란 자본주의고 나 아니면 남입니다 그여자는 공무원이 아니고 

    남인데도 학원 선생들한테 애들을 손발바닥머리때리고 욕하라고 시켰습니다

    죽여버린다고 윽박지르고 

    그리고 집에도 못가게 남으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밥먹고 학생들은  굶겼습니다  초등학교시험때에는 짐승처럼 길들이고

    남으라고 강압적으로 명령했습니다 

    그여자는 소시오패스입니다 그여자는 한국인인척하는 일본인
    니다 

    그여자는 손과발로 노동을 하지않고 남이만든 문제집을 외우는  일개 장사치이고 노동자들을 멸시합니다

    사기꾼들이 조동아리로 거품을 만듭니다

    그여자는 영어밖에모르고 대학나왔는지도 모르고

    상명하복밖에모르고 강압적인걸 좋아합니다 무식하고

    교육학 심리학 물리학도 모릅니다 

    때렸다고 그러면 부인합니다 사악하고 졸렬한 이중인격자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만만하니깐 길들이는것입니다

    이걸 전세계사람들이 알길원합니다 고소하고 싶습니다만

    수치심  죄책감도 없었다는게 문제입니다
  • 아무튼 이조강점기동안 특히 성노비로 강간당한 수백만명의 소녀들을 생각하면 울분이 터지려 하지만.

  • 따지고 보면 이 노비종묘법때문에 개화도 늦어진거다.
    오래전부터 천주교 사제들이 들여온 서구문물은 분명 세계의 발전에 뒷쳐지지 않을
    귀중한 자산이 될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유교탈레반들은 신아래 만민이 평등하다는
    서구의 크리스트교를 도저히 용납할수 없었지. 만민이 평등하면 양반들이 꿀을 빨수 있게 해준
    노비신분제가 무너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을 잡는족족 죽여댔던거다.
    중국, 일본도 귀족계층은 있었지만 조선과 달리 세습되는 노비는 역적집안이 아니고서야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런 사회구조때문에 크리스트교를 절대 용납치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한적으로 포교와 국내활동을 허가하고 대신 서구문물을 받아들여왔던가지.

    하지만 조선에겐 그 조그마한 구멍마저도

    노비 신분제 유지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기 떄문에 유일한 통로를 스스로 없앤것이다..

    이런 신분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화되기 전까지도 유지되던 조선이 스스로 개화를 이뤄낸다?

    시간이 조금더 있었더라면 스스로 개화를 하고 부국강병을 이뤄내? 개가 웃을일이다.

  • 박군
    17.01.27
    센징이의 야만성은 DNA의 열화가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 Ebs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하는 드라마같은거 못보게해라. 예전에 현대인이 조선시대로 가서 종놈으로 사는게 나왔는데, 노비들이 고통을 견디다 들고 일어날려고하는걸 그놈이 오히려 복종과 안위, 보복을 얘기하며 막더라니까. 말잘듣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굴복하는게 당연하다고 어린시절부터 세뇌시키는 수작이 너무도 뚜렷해서 눈살찌푸렸다
  • 서호
    17.01.29
    세종대왕을 미화해서 뛰어난 왕으로 묘사하는 헬조선답네요.
  • vjg
    17.01.30
    풍요로운 세상을 충분히 만들수 있는 기술을 인간이 가지고 있어도, 소수의 지배자들에 의해 고의로 억압된 기술로. 현재 인류 대부분이 기아, 굶주림, 불평등의 과도한 경쟁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이미 인류는 충분히 대다수 풍료로운 세상을 충분히 살수 있는 여건임에도, 지구 환경은 기업, 소수의 지배자의 욕심에 그에 상응하는 부역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권력-법-정부 , 화폐-돈 , 종교라는 허상의 그물에 인류가 집단 최면으로 세뇌 세계 지배자가 원하는 Agenda 21 대로 Transhumanism
  • WoNy
    18.05.10

    역사책에 들어가야할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1. 왜 노비나 양인들은 힘을 모아 봉기할 수 없었을까요? 지배계층의 어떤 전략이 대다수인 그들의 힘을 모이지 못하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2. 왜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역사책에서는 '행복한 노예' 나 '충성심있는 노예' 라는 명목으로 노예제를 미화하려 하는 걸까요? 역사교과서 편찬자들은 과거를 왜곡함으로써 현대인의 자유에 대한 인식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니면 애초에 진실에 관심이 없는건가요..?
     
    *P.S 미국같은 이민국보다 한국은 인종 다양성이 없어서 (피지배계층이나 지배계층이나 생김새가 같아서) 현재까지도 피지배계층이 스스로가 노예임을 인식하기가 힘든 게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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