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John
2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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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년에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고, 고종이 사망함으로써 몽골의 속국이 된다. 고종의 왕명조차도 그러한 승자들이 막되먹게 쳐 지은 것이라서 고려가 만약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고종의 호칭이 어떻게 되었을지 당시의 양식은 알 도리가 없다.

 

고종은 고려국충헌왕으로 봉해진다.

 

그러나 최의를 제거하기 전의 고종의 호칭은  천자(天子)[6], 만년천자(萬年天子)[7], 지존(至尊), 성황(聖皇)[8], 아황(我皇), 제(帝)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 특정 한자어를 피한 느낌이 강하고 천황이라는 단어가 조합어가 된다.

한국에 근대적 역사기법을 가져왔다고 하는 일본 새끼덜이나 친일파 새끼덜은 그러한 지점은 차마 비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이 어째서 나중에 고려말기의 왜구의 준동이라는 것이 정작 한국인들의 준동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려말기에 이성계가 진압했다는 집단이 일본 남조의 잔당이라는 시각은 정작 한반도 본연의 정치 체제는 일본의 원조라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일인 것이다.

 

이성계의 시기에 한반도는 몽골-여진계들과 그들에 따르면 왜색이 강한 고려삼한계로 나뉘어 있었으며, 전자가 후자를 학살하고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확정지은 것이다.

 

그러한 위계질서가 오늘날에도 서울과 지방으로 잔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21세기의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수도 서울이 닥치고 서울인 이유는 관습법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한 집단 새끼덜은 실상 소싯적에 지배계단으로 자리잡은 몽골-여진계 혈통집단 새끼덜의 앙시앵레짐적인 반동인 것이다.

 

조선왕조의 체제라는 것은 1264년에 쿠빌라이칸이 자신의 동생을 꺾고 수립한 왕중심의 절대주의왕조를 답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신정변이라고 하는 비정은 완전히 엉터리로써 당시에 종법적으로 지배되던 조선에서 그 이전의 국가내에서도 응당 전제주의가 당연했을 것이라고 종법적 위계를 강요하기 위해서 엉터리로 끼워맞추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1264년 이전에 그러한 체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 이전의 시대의 전제주의를 무신새끼덜이 갈아엎어서 몽골과 한국의 조우당시에 무신들이 집권하고 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체제가 일본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애초에 한국의 체제는 사무라이들의 수장이 국정을 담당하고, 천황은 대표자가 되는 바로 그 체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최씨 정권이라는 것은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과감하게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뛰어넘자면 부시도의 창시자는 신라의 이사부로 보여진다. 그러한 이사부를 바로 소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소종이라는 뜻은 일대종사라는 뜻이다. 이키의 종인 것이다. 종이라는 것은 종주라는 뜻이다. 

 

화랑과 사무라이는 따라서 같은 뜻인 것이다. 화랑체제를 일본이 수입해가서 사무라이가 된 것이고, 다시 그 원조는 태국의 계율불교에 기인하는 것이다. 태국의 계율불교에 기인하는 전사계급을 낙무아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불교가 허황후라는 존재로 상징되는 존재로써 한국에 수출되었고, 곧 원효의 계율불교인 법상종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법상종은 그 자체로 후일의 몽골계 지배집단에 의해서는 체계적으로 제거되었고, 모든 승려들은 금나라계 유불도 집단으로 대체되었는데, 그게 바로 교종, 선종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교체는 절대로 1258년 이전에는 불가한 것이므로 고려전기사회가 교종과 선종의 사회였다는 것오 여진족 정권인 조선왕조 새끼덜의 날조인 것이다.

 

특히 어쩌면 최후의 한국의 마지막 사무라이인 아지발도의 난의 진압으로부터 여진족계 훈구집단은 거진 이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 체계적으로 은폐했을 것이다.

 

 

-몽골에 먹히기 직전의 고려의 정치상황.

 

가마쿠라 막부는 1333년에 가마쿠라에 웅거하며 싯켄(집권)직을 독점하던 호조씨가 아시카가 다카우지구스노키 마사시게닛타 요시사다의 연합군에 멸망하면서 그 막을 내렸다. 그 이전의 약 150년간을 가마쿠라 시대라고 부른다. 막부라고 하는 무사 정권의 형태는, 후에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로 계승되었다.

 

호조씨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의 연합군에 멸망하듯이 강릉군에 의해서 옹립된 의종(실제호칭 천황 철)의 시대에 강릉의 사택에 근거한 집단인 강릉군의 세력이 전주의 사택지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이의방과 정중부, 이고의 무리가 갈아엎었다. 그 뒤에 의종의 사택을 이의방과 정중부와 이고가 나눠가졌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이의방은 전주의 사택의 장원에 근거하는 명문 사무라이 가문이었을 것이다.

 

우선 1180년에 가마쿠라의 대창향(大倉郷)에 요리토모의 저택이 되는 오쿠라 고쇼(大倉御所)가 건설되었고, 또 막부 통치 기구의 원형이라고도 해야 할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시소)가 설치되어 무사 정권의 확립이 형성되었다.

 

가마쿠라의 대창향에 요리모토의 저택이 되는 오쿠라 고쇼가 건설되고 가마쿠라 무사 정권이 확립되듯이 전주의 사택의 이의방으로부터 전주의 무사 정권의 확립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한 그 이전에 강릉군이라고 하는 놈이 강릉의 사택(폐허로 문만 남아 있음) 중심의 집단이 그 이전에 통치함이 고고학적으로는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이라는 정권은 존재하지 않고, 되려 이의방이 갈아엎은 정권 역시도 사택지에 근거하는 가문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주나 강릉의 그 것은 모두 오쿠라 고쇼와 동격인 것이다.

 

 

중요한 지점은 고려가 몽골과 조우했을 때에는 이러한 체제였다는 점이다. 그러한 인지적인 차원의 것으로 봐야지 정작 그 이전의 시대의 상황은 몽골집단으로써는 관심도 없는 것이거니와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려 전기나 중기의 상황 또한 응당 전제왕조였거니라고 하는 관점은 실상은 무한히 반복되는 판데모니엄 같은 신분제사회내에서 고착된 지배질서의 시간적인 무한루프라는 이념적 통치수단이자 민중을 좌절시키기 위한 겁주기로써 맘대로 비정되거나 그냥 순전히 양반새끼덜의 뇌내망상에 의해서 이성계식 체제가 오로지 세계사에 유일한 체제이자 지상낙원체제라는 북한새끼덜의 김씨 왕조같은 방식으로 쓰여진 엉터리 종법사가 고려사라는 엉터리인 것이다.

 

고려사를 현대적인 역사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되려 그 시대의 인간새끼덜의 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는 한갖 증거물에 불과하다. 그 말이 카더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그냥 조선의 대부분의 양반 지배계급 새끼덜은 현제체에 닥치고 순응하라는 계도적이고 종교적 입장에 의해서 역사를 유구한 전제주의가 한반도를 지배한 양 장황하게 엉터리로 조선조적인 사회의 연장으로 고려와 신라를 주작했을 뿐인 것이다. 

 

다시 일본사로 가서,

 

우선 1180년에 가마쿠라의 대창향(大倉郷)에 요리토모의 저택이 되는 오쿠라 고쇼(大倉御所)가 건설되었고, 또 막부 통치 기구의 원형이라고도 해야 할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시소)가 설치되어 무사 정권의 확립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곤다이나곤(權大納言, 권대납언) 겸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을 맡고, 공경에 참석하여 장원 영주의 정무 기관인 만도코로(政所, 정소) 설치의 허가를 얻은 것으로, 말하자면 통치 기구로서의 합법성을 띠게 되어, 정이대장군의 작위가 하사(1192년) 되었다. 

 

만도로코=정소=정방임을 쉽게 도출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만도로코의 허가를 받음으로써 통치의 합법성을 띄게 되어, 정이대장군이 하사가 되는 것이다.

 

최충헌 역시도 정방을 통해서 지배하는 정이대장군인 것이다. 다른 말로는 쇼군이라고 한다.

 

다만 조선왕조는 이러한 최씨 막부와도 같은 상황이 무신정변이라고 하는 조선식 유교사회에 대한 전복행위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었다는 식으로 애누리 쳐서는 둘러댄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것이다. 강릉군이 바로 그 증거이고 말이다.

 

특히 고려전기의 대부분의 이름들은 실지로는 고려 후기의 몽골계 이주 지배집단새끼덜이 참칭한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몽주의 조상이 의종을 호위했다 이 지랄을 하는데,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후기의 친원파 집단에서 등장한 무리이고, 의종의 집단는 전혀 다른 통치선상에 있는 무리이므로 그들이 연속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는 편이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시대가 문벌귀족 시대로 묘사된 것 역시도 실상은 이자겸의 위치를 후대의 이인임과 혼용한 것이다. 

 

후일에 사림새끼덜이 고려조의 이색과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임을 대대로 자랑하던 그게 바로 문벌귀족인 것이다. 문벌귀족의 아바타란 실상은 양반=사대부인 것이다.

 

따라서 문벌귀족이라고 하는 것 자체 또한 양반 새끼덜이 그냥 고려조 중기에도 응당 이러한 신분제 사회가 있었겠지라고 가정하는 가정에 의한 묘사이고, 모든 것이 엉터리인 것이다.

 

이자겸과 척준경 또한 인천의 세가인 사무라이집안이었을 뿐이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몽골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갈렸고, 나중에 사택정도를 가지고 사병이라고 묘사된 하급 사무라이들을 거느린 놈들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의 시대를 통해서는 다이묘, 더 나아가서는 센코쿠다이묘(전국구 다이묘)가 되어가고, 반면에 쿠빌라이 체제라는 전제주의 내에서 일개 신료집단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 한국의 사대부들은 태종의 사병혁파를 통해서 사병도 거느리지 못하고, 세조의 관수관급제를 통해서 토지 또한 몰수 당해서 지급토(=이크타), 에 의존하는 체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시도는 이미 일한국의 가잔 칸의 치세에 시도된 것과 같은 것이고, 그러한 지점에서 조선왕조가 얼마나 몽골계 왕조와 유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연산군의 할매는 산스크리트어에 유창한 등 노골적인 여전히 존재하는 몽골식 혈통주의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가잔은 긴급한 군사 정보를 맡은 사절만이 역참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조정은 몽골 병사들에게 이크타를 수여했고, 이크타를 받은 병사들은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잔은 자를릭(칙령)의 반포도 개혁했다. 칙령의 형식과 등급이 나뉜 봉인을 정했고, 모든 자를릭이 조정에 문서로 보관되도록 명했다. 30년이 지난 자를릭과 파이자(pāiza, 牌子)는 취소되었다. 가잔은 두 등급의 파이자를 만들었는데, 이 파이자에는 소유자의 이름을 새겨서 마음대로 양도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오래된 파이자는 관료 임기 말기에 반납되도록 했다.'

 

정도전의 과전법은 실상 함경도에서 이성계의 공신집단에게 이크타를 지급하는 것에서 그 것을 자를릭과 파이자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토관의 혜택을 통해서 파이자를 쉽게 받을 수 있으니 어차피 조삼모사라고 생각해서 북변의 여진계들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을 토관을 없앤다니까 이시애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크타를 수여하는 것을 전시과라고 하며 전시과는 본디는 하급 사무라이의 촌주가 가지는 민정의 차원인 것일 뿐인 것이 몽골집단이 도래하고 나서 성격이 바뀐 것이다.

 

기존의 전시과 연구는 그점을 망각한 것이다. 게다가 이조의 기술체계내에서 그들의 인종주의를 서울 사가들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몽골의 지배는 현지인의 지배체제를 용인한 상태에서 혈연, 지연, 학연을 통해서 교묘하게 장악하는 방식을 택하였고, 일한국의 일부지역에서는 테마제도의 잔재인 테메스도 인정되는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Irfan Habib 은 Iqta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농민들로부터 잉여분을 모아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에게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이 고안되어야 했습니다. 이 메커니즘의 핵심 요소는 정치 구조의 통합을 즉각적으로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수집과 분배의 두 가지 기능을 결합한 iqta 입니다. iqtaʿ 는 영토 할당이었고 그 소유자는 muqtiʿ  지정되었습니다 . [8]

정도전의 과전법은 대단히 노련한 몽골식 시스템의 수립자로써 몽골-여진계 병사집단이 장악한 iqta를 본연의 목적인 농민들로부터 잉여분을 모아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에게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으로 돌릴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구분전과 군인전을 혁파해야 한다는 것이 정도전식 과전법인 것이다.

 

정도전식 분배논리에 의하면 농민을 해방시켜서 땅을 주면 조선식 봉건제 내에서 iqta를 지급받는 군인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혹은 적어도 조세를 내야 될 놈이 더 많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후자는 성공했고 전자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오가작통이라고 하는 김씨 왕조식 이웃간 감시시스템 등 이러저러해서 결국 조세를 내는 놈들은 분명히 많아졌지만 땅 받아간 놈들이 병역에 기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되려 군정만 문란해졌을 뿐이다. 그게 방군수포제다.

 

 

왜 한국학자들의 전시과에 대한 설명이 사변적인가? 정작 진짜 핵심적인 맥락인 조선조의 봉건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온정주의가 가미되었고, 현실인식조차도 미약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오늘날조차도 한국의 촌 지역은 여전히 이갑제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갑제의 이장의 역할은 하급사무라이의 촌주가 대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게 이 시스템이 적용되려고 하자 원래 지방에서 하급 사무라이 하던 놈들이 이장이 되고, 나아가 향리가 되었을 뿐이다.

 

과전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하위 권력 위에서 군림하는 수조권에 불과한 것이다. 관수관급이라고 해도 결국 그 수조권의 대행을 나라가 직접하겠다는 뜻 뿐이다.

 

 

결론: 고려시대 초기와 중기에 조선식 전제주의가 있었다는 가정은 실제가 아니라 조선조 학자들이 제기한 종교적 관념일 가능성이 높다.

 

몽골과 고려가 조우할 당시에는 정작 일본식 막부제에 가까웠고, 그 위로의 몇개의 정권 또한 죄다 일본식 막부였고, 무식정변에 의해서 축출되어서 죽임을 당했다는 의종조차도 강릉군 패밀리에 의해서 지지되는 막부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서 이자겸과 척준경의 성격 또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강릉의 폐사택지에 강릉군이 기인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전주의 사택이 정작 고려의 분권적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선식 중앙집권 시스템은 몽골을 본 뜬 오랑캐 시스템인 것이다.

한국의 막리지들이 몽골인들의 역정을 사서 그 제도를 폐지해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최충헌의 저항 때문에 말이다.

 

이사부의 이름인 태종(苔宗)이나 이종(伊宗)의 종자를 쓰는 놈은 일본에서는 유명한 검술 창시자인 야규 무네요시柳生宗厳의

宗이 있는데, 일본어가 기본적으로 한국의 이두에 기인하고, 중세에 와서는 외자를 펼쳐서 4자로 적기 시작했다고 보면, 이 한자는 분명히 종사에게 쓰는 말인 것이다.

 

야규가 宗을 쓰는 이유는 당시의 막부의 창시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료이기도 했던 정통성 때문인 것이기도 한데, 또한 신라의 새로운 시대에 김씨 막부의 시대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는게 이사부인 것이다.

게다가 이사부가 진흥왕의 밑에 있을 때에 직위가 병부령이었다고 하는 것도 국방부장관이라는 뜻도 되지만 당시의 쇼군이나 막리지에 가까운 지위였다고도 볼 수 있다. 병부에 궁극적 령을 내리는 놈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김유신의 이름이 또한 김춘추나 김법민이랑 항상 세트로 나오는 것 역시도 후대에 전제주의 왕조새끼덜이 이해한 것과 다르게 신라의 체제에서 군사리더는 왕과는 별개의 체제였을 가능성을 무시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사의 광범위한 요하집단의 주작 때문에 엉터리로 비정되었지만 견훤과 경순왕의 실체라는 것도 정작 전주의 이의방과 경주의 이의민을 엉터리로 다른 시대에 데자뷰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공교롭게도 전주의 견훤과 경주의 경순왕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 조작을 통해서 물타기 한 것으로 보여지고, 특히 북방계들이 경주로 쳐들어오기 위한 영천-상주 구간에서 분봉된 정몽주의 정씨나 최무선의 최씨 새끼덜의 연혁을 고려하면 상주-안동의 삼태사라는 것들도 고려조가 아니라 몽골의 길잡이 노릇을 한 장씨, 김씨, 권씨를 말한 것으로 보여진단 것이다. 그들과 하양의 허씨들은 죄다 몽골이 경상도로 난입할 때에 혹은 난입한 직후에 형성된 새끼덜이다. 심지어는 그들이 한국인 앞잡이가 아니라 이식된 몽골놈이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화약무기를 이용한 군대라는 것은 금나라 때에 금나라군이 획득한 체계이기 때문에 최무선이 화약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기 보다는 여진족인 이성계와 금나라계 군대가 화약무기를 한국으로 가져왔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https://namu.wiki/w/%EA%B8%88%EB%82%98%EB%9D%BC

맹안모극(猛安謀克, Miŋgan Moumugə)이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나라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을 얻을 수 있었다.[9]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10][11] 1126년, 송나라의 지방관이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는데 사신을 호위하던 17명의 기병과 궁기병들에게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처발렸다는 기록[12]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거기에 북송을 공격하면서 얻은 공성 무기들과 초기 형태의 화약을 노략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을 개발했는데 대표적으로 로켓의 시초라 할 만한 비화창(飛火槍)과 화약 작렬탄인 진천뢰(震天雷)가 금나라 때 나온 무기들이다.

 

 

최무선이 한국인으로 묘사된 것 마저도 후대의 관점이며, 최무선의 집안은 애초에 여진족 관료들을 중용했던 쿠빌라이 칸의 치세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이성계조차도 실상은 전라계가 아니라 쿠빌라이의 시대에 중용되었던 연경의 여진족 집안으로부터 기인하는 무인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몽골계들이 통혼을 통해서 한국화됨에 따라서 나중에는 아예 한국인임을 자처한 놈들인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몽골인 혹은 여진인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해도 그들 밑에 있는 한국인들을 통제하려면 마치 오늘날 서부의 미국백인들이 히스패닉 가정부나 가드너를 부려먹기 위해서 스페인어를 세컨더리 랭귀지로 장착하듯이 한국어를 습득할 필요가 있던 이방인 가문이고, 또한 금나라계 군사문화를 가져온 자들인 것이다.

 

미드 마르코 폴로만 봐도 여진족 하급관료들이 원제국의 통치에 아주 크나큰 역량을 빌려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몽골인 출신의 성골이라고 할 자들은 너무 적어도 제국의 하급 관료들은 물론이거니와 요직들조차도 몽골인으로 채우기에 역량의 한계가 있던 것이 몽골놈들이었던 것이다. 설사 있다해도 너무 못 배워먹어서 직무능력이 없거나 말이다.

 

원나라의 상태 자체가 하급 관료는 여진족이고, 심지어 장관급들 또한 국방부 장관 빼고는 상서들까지도 여진족을 안 끼면 공석을 메꿀 수가 없고, 왕과 왕공족만 몽골놈이 해 먹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원나라의 증흥을 이끌었지만 반대로 원나라가 몰락하는 원인들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간신을 믿었고 권력 때문에 자기 아들마저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불교를 지나치게 중시해 대대로 원나라 황제들이 라마승에 빠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우리가 한국의 불교라고 알고 있는 것도 실상은 몽골놈들의 불교이며, 한국 본연의 호국불교는 여태까지는 신라와 후백제 이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최충헌과 최의의 시절까지도 호국불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의 불교라는 개 것들은 모두 몽골놈들이 가져온 사변화된 엉터리 개잡것들인 것이다. 정작 일부의 화엄종장들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시대의 일이 아니라 여말선초까지 존재하던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의 정권을 몽골놈의 혼혈잡종새끼덜인 사림이라는 집단이 장악했듯이 한국의 불교 또한 조계종이라고 하는 라마교 떨거지 새끼덜이 장악해 온 것이 한국의 구체제 인문 철학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오랑캐새끼덜이 전제주의를 옹호하는 척 하면서 그들의 혈연에 이로운 말이라면 닥치고 지어내는 기회주의적인 사변적 담론이 사문난적 이 지랄인 것이다.

 

그러한 담론을 가진 현대 학자 새끼덜의 프레임 그 자체가 모두 엉터리이고, 일본의 shogunate 의 원조가 정작 한국이었다고 보여지며, 김씨 왕조라는 것은 김씨 천황이라고 보여지고, 진골, 성골이라는 것도 일본의 친황 개념으로 보여질 뿐이다. 천황가와 친황가 혹은 친황과 친황이 결합했으면 성골이고, 친황의 한쪽의 피만 튄 수준으로 정략결혼을 했으면 진골인 것이다.

 

고종의 호칭은  천자(天子)[6], 만년천자(萬年天子)[7], 지존(至尊), 성황(聖皇)[8], 아황(我皇), 제(帝)로 불리었다고 한다. 고종의 호칭이 왜 성황이겠는가? 성골황제라는 뜻인 것이다. 고종의 에미 원덕태후는 현종 원문천황의 후손이었다니까 고종은 확실히 부계와 모계가 천황가 혹은 친황가인 것이다.

 

성골천황이므로 성황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제사장 기능이 있는 천황이라고 성황이라고도 했을 수 있고, 왕의 기능이 있는 막리지는 중방의 교정별감이라고 했던 것이다.

고려에는 그래서 근친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점조차도 일본과 매우 유사하다.

 

1217년 1월에 최충헌을 따라 종군한 흥왕사, 홍원사, 경복사, 왕륜사, 안양사, 수리사 등의 중들이 최충헌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거짓으로 도망가면서 거란병이 왔다고 알리면서 문지기 56인을 베어 죽였다. 

 

최충헌의 당시에 절간의 승려들이 최충헌을 베어버릴 생각을 했다는 것도 최충헌 시대의 승려들은 그 자체로 사무라이였고, 일향종의 혼간지 새끼덜 만큼이나 괄괄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이 중들한테 뒈졌으면 그야말로 혼노지의 변이 되는 것이다. 

 

사족으로 뭐 일향종은 나중에 도쿠가와에 의해서 처절하게 분쇄되었다. 에도 막부가 유교통치를 표방한 이유이다.

 

결국 중앙집권을 위해서 불교를 약화시킨 것만 한국과 일본이 비슷했던 것이다. 그게 쇼군체제건 이씨 왕조이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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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97 만약에 일본이 계속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new 노인 31 7 2022.03.03
20896 러시아, 터키와 같이 화폐 가치가 떡락한 나라들 사이에서 암호화폐가 뜨고 있다? new 노인 67 7 2022.03.03
20895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가 경제 제재 당하자 4 new 노인 58 7 2022.03.03
20894 new 심상정 14 0 2022.03.03
20893 new 심상정 10 0 2022.03.03
20892 new 심상정 16 0 2022.03.03
20891 new 심상정 18 0 2022.03.03
20890 new 심상정 11 0 2022.03.03
20889 new 심상정 17 0 2022.03.03
20888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의 러블리~심블리~ 심상정입니다~ 2 new 심상정 23 1 2022.03.03
20887 스스로 감옥을 만든다는건 new 킹석열 21 0 2022.03.03
20886 역사적으로봐도 수구세력들이 new 킹석열 13 1 2022.03.03
20885 존 님, 애미뒤진존님 모두 그동안 내가 잘 못 도와줘서 참 미안하네 new eit 33 0 2022.03.03
20884 헬조선좌파들 몰락은 현실로 다가오는거맞고 3 new 킹석열 43 0 2022.03.03
20883 이번대선은 참 웃긴게 5 new 킹석열 23 2 2022.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