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
1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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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10월 혁명 이전의 농민

문명은 농민을 자기 짐을 나르는 말이나 소로 취급해왔다. 거시적으로 보면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이 지는 짐의 형태만 바꾸었을 뿐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농민은 기본적으로 과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경계 밖에 놓여있다. 무대 장면을 바꾸어 하늘과 땅의 배경 그림을 등에 진 채 나르고 분장실을 걸레로 청소하는 잿빛의 사람들에게 연극 비평가는 거의 관심이 없다. 이와 똑같이 역사학자 역시 궂은 일이나 말없이 하는 농민에게 거의 관심이 없다. 역사상의 혁명들에서 농민이 수행한 역할은 아직까지도 거의 해명되지 않고 있다.       

맑스는 1848년에 이렇게 적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을 해방시키면서 혁명을 시작했다. 농민의 도움으로 이들은 유럽을 정복했다. 프로이센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협소한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동맹 세력인 농민을 놓쳐버렸다. 이 결과 농민은 봉건 반혁명 세력의 무기가 되었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과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을 대조하는 그의 서술은 올바르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을 해방시키면서 혁명을 시작했다"는 주장은 당시 프랑스 공식 역사학계의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맑스는 이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농민 혁명을 반대했다. 1789년 농촌에 대한 정책을 조정한다는 미명 하에 제 3 신분(부르주아 계급)의 지역 책임자들은 농민의 가장 강렬하고 대담한 요구들을 제외시켰다. 농촌에서 혁명의 불길이 밤하늘을 밝히는 가운데 국민의회가 내린 8월 4일의 그 유명한 결정은 내용이 전혀 없는 한심한 정식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농민들을 제헌의회는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본업에 복귀하고 봉건 소유제도를 제대로 존중하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시민 근위대는 여러 차례 농민을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시 노동자들은 봉기에 나선 농민의 편을 들어 부르주아 토벌대에 돌과 깨진 기와로 맞섰다.

5년의 혁명기간 내내 프랑스 농민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들고일어나 봉건 소유주와 부르주아 소유주 사이의 합의를 막았다. 혁명 공화국을 위해 피를 쏟았던 파리의 평민들은 봉건제의 사슬에서 농민을 해방시켰다. 1918년의 독일 공화국은 왕정이 빠진 구체제에 불과했다. 이것과 1931년 스페인 공화국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1792년의 프랑스 공화국은 새로운 사회체제의 시작을 알렸다. 근본적 차이가 농업문제에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프랑스 농민은 곧바로 공화국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주의 억압을 벗어 던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파리의 부르주아 공화파는 대체로 농촌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투쟁이야말로 봉건적 쓰레기를 청소하면서 공화국의 수립을 보장했다. 이 점을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에버트가 독일 공화국 대통령이 되기 400년이나 전에 그는 피렌체에 망명하여 어느 푸줏간 주인과 개똥지빠귀 사냥이며 주사위 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시간 틈틈이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저술을 했다. "귀족이 많은 나라에서는 이들을 전멸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다." 러시아 농민도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의견이었다. 이들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알지 못한 채 이 사상의 실체를 공공연히 보여주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가 노동자와 병사들의 운동 중심이었던 반면 농민운동의 중심은 후진적인 대(大)러시아 농업 지역과 볼가강 중부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봉건 농노제의 잔재는 특히 뿌리가 깊었다. 귀족계급의 토지 소유는 농민을 철저히 착취하여 대단히 기생적이었다. 농민의 분화는 훨씬 늦어 있었고 농촌의 빈곤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미 3월에 이 지역에서 터져 나온 운동은 처음부터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지배 정당들의 노력으로 이 운동은 화해주의 정치노선의 통로로 유도되었다.

공업이 발전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의 경우 수출을 위한 농업 생산은 훨씬 진보적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적이었다. 이 지역에서 농민의 계층 분화는 대러시아 농업지역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었다. 더욱이 대러시아인에 저항하는 민족해방투쟁이 당분간 다른 형태의 사회투쟁을 불가피하게 지연시켰다. 그러나 지역적 민족적 조건의 다양성 때문에 시간 차이가 있었지만 농민투쟁은 모든 곳에서 폭발했다. 가을이 되자 농민투쟁은 거의 전국으로 이미 확대되어 있었다. 구 러시아 624개 군의 77%인 482개 군이 이 운동에 끌려 들어갔다. 러시아 북부, 트랜스코커서스, 대평원, 시베리아 등 러시아 변방지역은 농업의 조건이 특수했다. 이 지역들을 제외하면 481개 군의 91%인 439개 군이 농민반란에 휩쓸려 들어갔다.  

경작지, 삼림, 목초지, 임대 농지, 임 노동 등의 다양한 조건 그리고 혁명의 다양한 단계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방식이 달랐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가피하게 지연되었을 뿐 농촌의 운동은 도시의 운동과 같이 크게 두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에서 농민들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면서 이를 통해 새로 도입된 제도들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실제적인 이익보다 형식을 따졌다. 혁명 이전에는 인민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던 러시아의 자유주의 신문들은 1917년 여름에 지주들의 심리상태를 대단히 정확하게 표현했다. "농민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전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위의 토지는 전부 우리 것이다." 4월 톰보프의 어느 마을이 임시정부에 보낸 전보에는 농민들이 이렇게 "평화"를 유지한 이유가 완벽한 드러나 있다: "획득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평화를 유지하겠다. 대신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지주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아무도 토지를 경작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농민은 정중한 위협의 어조를 유지하기가 쉬웠다. 왜냐하면 자신의 역사적 권리인 토지를 점거하기 위해 지주에게 압박을 가해도 국가기구와 직접 갈등할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에서는 정부의 권력 기관들이 부족했다. 마을 위원회는 민병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법원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또한 지역 인민위원은 힘이 없었다. 농민은 이들에게 이렇게 고함지르곤 했다: "우리가 당신들을 선출했소. 그러니 우리는 당신들을 내쫓을 것이요."

여름 동안 농민은 지난 몇 개월 동안의 투쟁을 확대시키면서 내전의 상태에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들의 좌파는 내전의 경계를 넘어 실제 전쟁을 일으켰다. 타간로그 지구의 지주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농민들은 건초와 토지를 차지했으며 쟁기질을 방해하고 토지 임대료를 마음대로 정했을 뿐 아니라 지주와 토지관리인까지 제거했다. 니제고로드 정부위원(commissar)의 보고에 따르면 지방에서 폭력행위와 토지 및 삼림 점유의 건수는 크게 늘고 있었다. 군 정부위원은 농민이 자신을 대지주의 옹호자로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농촌 민병대는 믿을 수 없었다. "민병대 장교들이 군중과 함께 폭력행위에 가담한 경우들이 있었다." 슐뤼셀부르크 군에서는 지역 위원회가 지주의 산림 벌채를 막았다. 농민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제헌의회가 소집되어도 베어진 나무는 다시 살릴 수 없다." 법무부 정부위원은 농민들의 건초 점유를 불평한다: 법원의 말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농민들로부터 건초를 구입해야한다! 쿠르스크 도에서 농민들은 외무장관 테레쉬첸코의 비료를 준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오를로프 도의 말 사육사 슈나이더에게 농민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농민들은 그의 토지에서 자라는 클로버를 수확할 뿐 아니라 그를 "군대로 보낼 수도 있다." 마을 위원회는 로지안코의 토지관리인에게 건초를 농민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토지 위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귀하는 체포될 것이다...." 이 명령서는 서명되고 봉인되었다.     

농민의 투쟁으로 재산상의 손해를 본 자, 지역 당국, 고상한 사고를 가진 관찰자들의 불평과 우는소리가 전국의 구석구석에서 쏟아졌다. 지주들의 전보는 조야한 계급투쟁 이론을 아주 뛰어나게 반박했다: 작위를 가진 귀족, 대토지 소유주, 종교 지도자, 행정 당국 등은 공공의 행복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이들의 적은 농민이 아니라 볼세비키들이며 때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지주들의 재산은 나라의 복지라는 관점에서만 관심거리이다. 체르니고프 도의 입헌민주당원 300명은 볼세비키 선동에 넘어간 농민들이 강제 노동을 하는 전쟁포로들을 풀어주고 자신들이 직접 추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세금을 낼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이들은 외친다. 이 자유주의 지주들은 오직 국가 재정을 지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국립은행의 포돌스크 지점은 마을 위원회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불평한다. "위원회 의장들은 종종 오스트리아 출신 전쟁포로들이다." 이것은 상처 입은 애국심의 표현이다. 블라디미르 도에 위치한 토지문서 등록국장 오딘트소프의 장원에서 농민들은 "자선단체들을 위해 준비된" 건축 자재들을 자기 용도를 위해 마구 실어갔다. 관리들은 오직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 같다! 포돌스크 도의 어느 주교는 대주교 저택에 딸린 삼림을 농민이 자의적으로 점거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러시아 주교회의 의장은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의 목초지를 농민들이 점거했다고 불평한다. 키즐리아르스크 수녀원 원장은 지역 위원회에 신이 천둥과 번개를 내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지역 위원회는 수녀원의 일에 간섭하면서 자기들이 사용하기 위해 토지 임대료를 수녀원으로부터 몰수하고 있다. 또한 "상급자들에게 대항하도록 수녀들을 선동하고 있다." 이 모든 경우에 교회의 정신적 이해는 직접 영향 받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의 아들 톨스토이 백작은 우핌스크 도의 농업경영자동맹의 이름으로 이렇게 보고한다: "제헌의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은 채" 지역 위원회로 토지가 이전되면서 "20만 명이 넘는 도내 토지 소유주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세습 귀족은 지주들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트베르 도의 지주인 상원의원 벨가르트는 노인들이 삼림을 벌채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이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복종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와 분노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탐보프 도의 지주 벨리아미노프는 "군대의 필요에 부응하는" 두 장원을 농민들의 손에서 구출해 줄 것을 요구한다. 우연히도 이 두 장원은 그의 소유이다. 관념주의 철학자에게 1917년 지주들이 보낸 전보들은 진짜 보물이다. 다만 유물론자는 이것들 속에서 온갖 냉소적 행위의 모범들을 볼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거대한 혁명들은 유산자들로부터 품위 있는 위선을 보일 특권조차 박탈한다.

농민의 투쟁으로 재산상 피해를 본 자들은 군과 도 당국, 내무장관, 정부 수상 등에게 호소했으나 일반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인가? 의회 의장 로지안코가 있다! 7월 시기부터 코르닐로프 반란 때까지 짜르의 시종장이었던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전화만 하면 많은 일이 해결되었다.

내무부의 관리들은 지역으로 회보를 보내 소유권을 침해하는 농민들을 재판에 회부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사마라 도의 퉁명스러운 지주들은 전보로 이렇게 답했다: "사회주의 장관의 서명이 없는 회보는 강제력이 없다." 이것으로 사회주의의 기능이 드러났다. 체레텔리는 자신의 수줍음을 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8일 그는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들"을 취하라고 장황하게 지시했다. 지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군대와 국가에 대해서만 걱정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가 지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농민을 진정시키는 정부의 방법이 갑자기 변했다. 7월까지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지배적인 방식이었다. 군대가 지역에 파견되는 경우에도 정부에서 보낸 연설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승리한 후에는 농민을 설득하는 자를 대동하지 않은 채 기병대가 바로 지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젊은 역사학자 유고프의 말에 따르면 가장 소란스러운 지역인 카잔 도에서는 "체포를 하고 토벌대를 마을에 보내고 심지어 채찍질 관습을 부활시키고 나서야...농민들을 복종시키는데" 성공했다. 다른 곳에서도 이 탄압 조치들은 효과가 없지 않았다. 7월에 지주의 재산 피해 건수는 516건에서 503건으로 줄어들었다. 8월에 정부는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불만이 있는 군의 숫자는 325개에서 288개로 떨어지면서 11% 하락했다. 농민의 투쟁에 의해 피해를 본 재산의 건수도 33%나 줄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가장 소요가 심했던 일부 지구들은 잠잠해 졌거나 부차적인 소요지역이 되었다. 반면에 어제는 믿을만했던 지구들이 이제 투쟁을 시작했다. 한달 전만 해도 펜자 도의 정부위원은 위안이 될만한 얘기를 했다: "농촌은 수확에 바쁘다....마을 젬스트보 선거 준비가 진행 중이다. 정부의 위기는 조용히 지나갔다. 새 정부를 큰 만족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8월이 되자 이 목가적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수원들은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산림들이 벌채되고 있다....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군대에 의존해야했다."

일반적으로 여름의 농민운동은 "평화"기에 속했다. 그러나 허약하기는 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급진화 증상들이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2월 혁명 후 첫 4개월 동안 지주의 장원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 전에 비해 감소했으나 7월부터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7월의 분쟁에 대해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흔한 사소한 분쟁에서 큰 분쟁의 순서로 다음과 같이 농민의 투쟁을 구분했다: 목초지, 농작물, 식량과 꼴, 경작지, 농기구 등의 점거; 고용 조건에 대한 분쟁; 장원의 파괴. 8월에는 순서가 다음과 같았다: 농작물, 예비 식량과 꼴, 목초지와 건초, 토지와 삼림 등의 점거; 농업 테러.

9월초 최고사령관으로서 케렌스키는 농민의 "폭력행위"에 대해 전임자 코르닐로프의 주장과 위협을 반복하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며칠 뒤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이 모든 토지를 농민에게 즉시 넘기지 않으면 결국에는 끝없이 격렬한 농민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후 몇 개월에 걸쳐 그의 말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8월에 비해 9월에 피해 재산의 건수는 30%나 증가했다. 그리고 10월에는 9월에 비해 43%나 증가했다. 9월과 10월 첫 3주일간의 피해 재산 건수는 3월 이후의 건수보다 3분의 1이 더 많았다. 그러나 분쟁의 강도는 빈도보다 훨씬 빨리 증가했다.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에는 장원의 각종 부속 시설과 기물들을 직접 점거하는 것조차 화해주의 기관들에 의해 완화되고 위장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합법적인 외양도 필요 없었다. 운동의 모든 부분들은 더욱 대담한 성격을 띠었다. 다양한 형태와 강도로 압박을 가하다가 이제 농민들은 지주의 다양한 사업 부분들을 폭력적으로 점거했다. 귀족들의 소굴은 전멸되었고 장원은 불탔으며 지주와 관리인이 살해되는 경우도 생겼다.

토지 임대 조건의 개선 투쟁은 6월에는 폭력행위보다 건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10월에는 폭력행위의 40분의 1로 빈도가 떨어졌다. 더욱이 이 투쟁도 지주를 몰아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토지와 삼림 매매 저지 투쟁이 직접 점거 투쟁으로 바뀌었다. 지주의 재산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삼림이 벌채되고 가축이 방목되었다. 9월에 공개적인 재산 파괴는 279건 발생했으나 이제는 모든 분쟁의 8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2월부터 10월까지 농촌 민병대가 자행한 파괴행위의 42% 이상이 10월에 일어났다.

삼림을 둘러싼 투쟁은 특히 격렬했다. 마을 전체가 전부 불태워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목재는 엄중한 감시를 받았으며 높은 가격에 팔렸다. 농민은 목재에 굶주리고 있었다. 더욱이 겨울용 땔감을 재어놓을 때가 왔다. 모스크바, 니제고로드, 뻬쩨르부르그, 오렐, 볼린 도 등 전국 곳곳에서 삼림이 파괴되고 끈으로 묶은 비축 땔나무가 몰수되고 있다는 등의 불평이 올라왔다. "농민들이 자기 멋대로 그리고 가차없이 벌채를 하고 있다. 지주 소유 삼림 200 데시아틴이 농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클리모비체프스키와 체리코프스키 군의 농민들이 삼림을 파괴하고 겨울 밀을 파헤치고 있다...." 삼림 경비원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지주의 삼림은 신음하고 있었다. 전국에 걸쳐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가을 내내 농민의 도끼가 혁명의 박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곡물 수입 지역의 경우 농촌의 식량 사정은 도시보다 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식량 뿐 아니라 종자가 부족했다. 곡물 수출 지역의 경우 식량 자원이 평소의 두 배로 반출되면서 식량 사정이 다른 지역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곡물의 고정가격을 인상하자 빈민들이 타격을 받았다. 기근으로 인한 폭동, 곡물창고 습격, 식량 당국에 대한 공격 등이 다수의 도에서 발생했다. 인민은 빵 대용품에 의존했다. 괴혈병, 티푸스, 절망으로 인한 자살 등이 보고되었다. 기근이 퍼지면서 풍요와 사치를 누리던 부자 동네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 빈곤한 부위들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이 분노의 물결과 함께 사회 밑바닥의 인간 쓰레기들도 같이 올라왔다. 코스트로마 도에서 "흑백인조와 반(反)유태인 선동이 목격되고 있다. 범죄율이 높아가고 있다....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뚜렷이 눈에 띤다." 정부위원이 쓴 이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교육받은 유산계급들이 혁명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포돌스크 도에서는 갑자기 흑백인조들이 짜르의 복귀를 주장했다: 데미도프카의 마을 위원회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짜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러시아 인민의 가장 충직한 지도자로 간주한다. 만약 임시정부가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독일과 연합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대담한 선언은 특이한 경우였다. 농민들 사이의 왕당파들은 오래 전에 색깔을 바꾸고 지주와 행보를 같이 하고 있다. 지금 언급했던 포돌스크 도와 같은 여러 곳에서는 농민과 합세한 군대가 포도주 저장소를 습격했다. 정부위원은 무정부 상태를 보고하고 있다. "마을과 인민은 사라지고 있다; 혁명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혁명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은 채 더 깊은 골을 파고 있었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혁명의 물결은 혁명의 문턱 직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9월 8일경 밤에 톰보프 도의 시체프카 마을의 농민들은 곤봉과 쇠스랑으로 무장한 채 남녀노소 없이 전부 지주 로마노프를 습격하자고 선동했다. 마을 집회에서 어느 그룹은 장원을 질서 있게 점거하여 재산을 서로 나누고 대신 건물은 문화적 용도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빈민들은 장원을 불태우고 건물을 하나도 남기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들이 다수파였다. 같은 때에 거대한 불길이 읍 전체를 삼켰다. 농업 개선을 위한 실험용 농토를 포함해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모두 불탔다. 종자 소들도 도살되었다. "이들은 술에 취해 미치광이가 되었다." 불길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번졌다. 농민 투사들은 이제 가부장적인 낫과 쇠스랑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 도의 정부위원이 이렇게 전보를 쳤다: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농민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라넨부르크와 리아쥐스키 군의 장원들을 습격하고 있다." 농민 반란에 이 고급 기술을 도입시킨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지주동맹은 3일 동안 24개의 장원이 불탔다고 보고했다. "지역 당국은 질서를 회복시킬 힘이 전혀 없다." 시간이 흐른 후 군관 사령관이 보낸 군대가 도착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선동 주도자들은 체포되었다. 골짜기는 지주의 소유물로 가득했으며 약탈한 물건의 다수는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

펜자 도의 농민 베지쉐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9월에 우리는 모두 탈것에 올라 1905년에도 습격 당했던 로그빈을 습격했다. 사람의 무리들과 마차들이 떼를 지어 그의 장원과 그 뒤로 물결쳤다. 수백 명의 농민과 부녀자들은 소, 곡식 등을 가지고 나가기 시작했다." 토지 당국이 부른 군대가 약탈물의 일부를 다시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농민과 부녀자들이 마을에 500명이나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지주의 짓밟힌 권리를 회복시킬 의욕이 병사들에게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농민 가포넨코의 기억에 따르면 타우리데 도에서는 9월말부터 시작하여 "농민들이 건물을 습격하고 관리인들을 내쫓고 말과 소, 농기구, 곡물 등을 창고에서 꺼내가기 시작했다....심지어 이들은 창문의 블라인드, 문짝, 마루바닥, 양철 지붕 등도 뜯어갔다...." 민스크 출신의 농민 그룬코는 이렇게 말한다: "맨 처음 이들은 걸어와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꺼내서 끌고 갔다....그러나 나중에는 말을 끌고 와서 마차에 맨 후 누구의 것이든 짐을 가득히 실어갔다. 사람이 지나다닐 틈이 없었다. 정오에 시작하여 두 날과 두 밤을 멈추지 않고 농민들은 물건들을 끌고 갔다. 48시간동안 이들은 모든 것을 깨끗이 청소했다." 모스크바의 농민 쿠즈미체프에 의하면 재산 몰수는 이렇게 정당화되었다: "지주의 물건은 우리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일했으므로 그의 재산은 우리만의 재산이다." 옛날에 지주들은 농노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희들은 내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 것도 내 것이다." 이제 농민들은 이 말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지주였고 그의 물건은 전부 우리 것이다."

민스크의 또 다른 농민 노비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여러 곳에서 농민들은 밤에 지주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더욱 자주 이들은 지주의 장원을 불태우곤 했다." 한때 최고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니콜라이에비치 대공의 장원이 다음 차례였다.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다 가지고 간 후 이들은 난로를 해체하여 화관을 제거하고 마루와 판자까지 뜯은 후 모두 끌고 나갔다...."

이 파괴행위 뒤에는 수백 수천 년이나 오래된 농민 전쟁의 전략이 버티고 있었다: 적의 요새들을 완전히 불태운다. 적이 머리를 둘 곳을 남겨놓지 말아라. 쿠르스크의 농민 티간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좀더 합리적인 농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건물은 불태우지 말자. 학교와 병원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을 파괴하여 적들이 숨을 곳이 없게 만들어야한다.'" 오렐의 농민 사브첸코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들은 지주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갔으며 이들을 장원에서 내쫓고 지주 저택의 창문, 문짝, 천장, 마루 등을 두들겨 부수었다....병사들이 말했다: '늑대의 소굴을 파괴할 것이면 늑대도 목 졸라 죽여야한다.' 이런 위협들 때문에 최대 지주들은 몸을 숨겼고 이 때문에 이들은 살해되지 않았다."

비테프스크 도 잘레시에 마을에 소재한 프랑스인 바르나르의 장원에 저장되어 있던 곡식 및 건초 창고가 불에 탔다. 농민들은 지주들의 국적을 조사할 생각이 없었다. 다수의 지주들이 서둘러서 특권을 누리는 외국인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이전시켰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사관이 정부의 조치를 요청했다...." 10월 중순 전선 지역에서는 프랑스 대사관을 위해서라도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다.

리아잔 근처에서는 대규모 장원들이 4일간 계속 파괴되었다. "어린이들도 약탈에 가담했다." 지주동맹은 장관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린치 법, 기근, 내전이 터질 것이다." 지주들이 내전을 미래시제로 말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현상들은 현실로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9월초 협동조합 대회에서 강력한 농민 지도자이자 상인인 베르컨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전부가 정신병동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대도시 사람들만이 정신이 나갔다고 나는 확신한다." 농민의 강력하고 보수적인 부위의 이 자기만족의 목소리는 가망 없이 시간에 뒤져 있었다. 농촌의 마을들은 이성의 모든 올가미에서 완전히 풀려나 날뛰었다. 바로 9월에 이들이 보인 투쟁의 격렬한 정도는 도시의 "정신병동"을 훨씬 앞질렀다.

4월에 레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국주의 협동조합 지도자들과 부농들이 대다수 농민을 부르주아 계급 및 지주들과 화해시킬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농업 노동자 특별 소비에트의 수립과 빈농의 독자적 조직 건설을 지치지 않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달 한 달이 지나면서 이 정책이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발트해 국가를 제외하고 농업노동자 소비에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빈농들 역시 독자적인 조직 형태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 현상을 단순히 농업 노동자와 빈농의 후진성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주요한 이유는 민주적 농업혁명이라는 역사적 과제 자체에 있었다.

농노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일반적 이해 때문에 빈농과 농업 노동자는 독립적 정책을 가질 수 없다. 토지 임대료와 농업 노동자라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서 이 점은 대단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럽 러시아에서 농민은 지주로부터 2,700만 데시아틴 즉 개인 소유 토지 전체의 약 60%를 임대했다. 그리고 매년 4억 루블의 임대료를 지불했다. 임대료 때문에 지주에게 종속되는 현실에 대한 투쟁은 2월 혁명 후 농민운동의 주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농업 노동자의 투쟁도 비중은 적었지만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농업 노동자는 지주 뿐 아니라 농민 착취자와도 이해가 충돌했다. 임대 농민은 임대 조건의 개선을 위해 농업 노동자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전자는 지주를 소유주로 후자는 지주를 고용주로 인식하면서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여 토지를 차지할 가능성이 열리자마자 빈농은 임대료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은 농업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잃어버렸다. 둘 다 자영 농민이 될 전망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임대 빈농과 농업 노동자가 농민 운동 일반에 참여하여 농민 전쟁을 통해 이 운동의 궁극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지주에 대한 투쟁은 농촌의 양극단 부위를 완전히 투쟁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도까지 농민의 상층부는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 그리고 가끔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부농은 농민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더욱더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전쟁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지 알 수 없었다. 잃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투쟁에서 물러섰다. 그러나 이들은 농민 전쟁을 전적으로 저지하지는 못했다. 농촌이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부농보다 농민 전쟁을 더 유보적으로 그리고 더 적대적으로 바라 본 부위는 농촌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소규모 자영 농민들이었다. 50 데시아틴까지 소유한 자영 농민의 농지는 전국에 60만개 있었다. 다수의 지역에서 이들은 협동조합의 중추가 되었고 특히 남부지방에서는 보수적인 농민연합을 지지했다. 농민연합은 입헌민주당으로 가는 교량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 민스크의 농민 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영 농민과 부농은 지주를 지지하면서 농민들을 진정시키려했다."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 내부의 투쟁이 10월 혁명 이전에도 격렬했다. 이 투쟁에서 자영 농민들은 가장 잔인하게 고통을 겪었다. 니제고로드의 농민 쿠즈미체프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의 농장은 거의 모두 불에 탔다. 이들의 재산은 일부는 파괴되고 일부는 농민들에 의해 몰수되었다." 자영 농민들은 "지주의 삼림 일부를 맡아서 지주의 하인이 되었다; 그는 경찰, 헌병, 지배자들의 친구가 되었다." 니제고로드 군의 여러 마을에 사는 아주 부유한 농민과 상인들은 가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들은 2, 3년 후에야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러나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농민 내부의 관계가 이렇게 가혹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부농은 외교적으로 행동했고 투쟁을 저지시키고 저항했으나 "농민 모두"에게 너무 적대시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빈농들은 부농을 시기하면서 감시하여 이들이 지주와 연합하지 못하게 막았다. 부농에 영향을 미치려는 귀족과 빈농 사이의 투쟁은 "우호적인" 압력에서부터 격렬한 테러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1917년 내내 계속되었다.             

대지주들은 아양을 떨면서 자영 농민들에게 귀족 사회에 들어오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러나 소규모 자영 농민들은 귀족과 함께 망하지 않으려고 보라는 듯이 이들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이것은 정치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다: 혁명 전에 극우정당에 속했던 지주들은 자유주의의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했으며 입헌민주당을 종종 지지했던 자영 농민들은 이제 좌로 이동했다.

9월에 열린 페름 도의 소규모 자영 농민 대회는 "백작, 공작, 자작"등을 지도자로 한 모스크바의 지주 대회와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켰다. 50 데시아틴을 소유한 자영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입헌민주당원들은 집에서 만든 양모 외투를 걸치고 나무껍질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이익을 결코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거리를 둔 자영 농민은 자신의 소유권을 지킬 "사회주의자들"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의원 하나가 나서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다. 그러자 자영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그에게 토지를 주면 그는 농촌에 와서 만족하여 과격한 말을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결코 토지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는 멘세비키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토지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쉽게 토지를 넘기는 자는 쉽게 이것을 가진 지주들이다. 그러나 농민은 토지를 얻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

가을에 농촌은 부농과 투쟁했다. 그를 내쫓지는 않고 다만 그가 농민 운동 일반을 따르고 우익의 공격으로부터 운동을 방어하도록 강제했다. 장원 습격을 거부하는 부농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부농은 할 수 있는 한 술수를 부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뒤통수를 다시 한번 긁으면서 잘 먹인 말을 쇠테로 두른 마차에 매고 자기 몫을 갖기 위해 장원 습격에 참가했다. 그는 종종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고는 했다. 펜자의 농민 베지쉐프가 말한다: "말과 일꾼을 가진 부농들이 가장 많은 몫을 가지고 갔다." 오렐 출신의 사브첸코도 거의 같은 말을 했다: "부농은 잘 먹었을 뿐 아니라 나무를 끌고 갈 마차가 있어서 이익을 제일 많이 보았다."

베르메니체프의 계산에 의하면 2월에서 10월까지 지주와의 분쟁은 4,954건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농민 부르주아와의 분쟁은 324건에 불과했다. 대단히 명확한 상호관계가 아닐 수 없다! 1917년의 농민운동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농노제의 잔재에 과녁을 맞추고 있었다. 부농과의 투쟁은 지주가 결정적으로 청산된 후인 1918년에 전개되었다.

농민운동의 순수한 민주적 성격은 공식 민주주의 진영에 정복당할 수 없는 힘을 부여해야만 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 운동은 민주주의 진영의 정치적 파산을 완전히 드러냈다. 상층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에 의해 완전히 주도되었으며 이들을 소비에트 대의원으로 선출했고 이들을 따랐고 거의 이들과 합쳐졌다. 5월 농민 소비에트 대회의 집행위원회 선거에서 체르노프는 810표, 케렌스키는 804표를 얻은 반면 레닌은 기껏해야 20표 밖에 얻지 못했다. 체르노프가 자신을 농촌 장관이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농촌의 전략이 체르노프의 전략과 퉁명스럽게 결별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실제 지주와의 투쟁에 너무 전심한 나머지 농민은 산업적 측면에서는 고립 분산되어 국가기구로 구현된 일반적 지주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 때문에 진짜 국가에 대비되는 전설상의 국가에 농민들은 천성적으로 기댈 필요가 있었다. 옛날에 이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짜르의 황금 칙령, 정의로운 세계의 전설 등을 구심점으로 삼아 이 주위로 단결했다. 2월 혁명 후에는 "토지와 자유"라는 사회혁명당 깃발 주위로 단결했다. 이를 통해 정부의 장관이 된 자유주의 지주들에 대항하려했다. 농민은 상상의 짜르 칙령을 따랐으나 진짜 짜르에는 대항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인민주의 강령을 따랐으나 진짜 인민주의자 케렌스키에게는 대항했다.

사회혁명당의 강령에는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요소가 많았다. 이들은 소규모 상거래 경제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창조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강령의 토대는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즉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자신의 강령을 실현시킬 필요성에 직면하자 사회혁명당은 연립정부와 뒤엉켰다. 지주들과 입헌민주당 은행가들은 토지 몰수에 반대해 들고일어났다. 은행은 토지를 담보로 40억 루블 이상을 대출해주었다. 이 상황에서 사회혁명당은 토지 가격을 제헌의회에서 흥정하되 화기애애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농민의 열망을 열성적으로 저버렸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식 사회주의의 유토피아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비(非)일관성 때문에 망했다. 이들의 유토피아를 현실에 비추어 시험하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농업 민주주의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는 데에는 몇 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농민들은 사회혁명당 강령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사회혁명당 정부에 대항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회혁명당 정부가 농촌을 탄압하던 7월에 농민들은 급히 도망하여 같은 사회혁명당에 몸을 숨기려했다. 젊은 빌라도에게 쫓긴 이들은 늙은 빌라도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볼세비키당이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이 달에 사회혁명당은 농촌에서 가장 크게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특히 혁명의 시대에는 흔히 그렇듯이 최대한의 조직적 팽창은 정치적 쇠퇴의 시작을 의미했다. 사회혁명당 정부의 공격에 대해 사회혁명당 등뒤에 숨은 농민들은 정부와 당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거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농촌에서 사회혁명당 조직은 팽창했지만 이 자체는 이 잡동사니 정당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당의 상층부는 질서를 회복시키려한 반면 당의 하부는 이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사조직 회의에서 사회혁명당원인 전선의 병사 대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농민들이 아직도 스스로를 사회혁명당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과 당은 틈이 생겼다. 병사들도 이것을 확인해 주었다: 사회혁명당의 선동 때문에 농민들은 볼세비키당을 아직도 적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토지와 권력의 문제를 볼세비키당의 방식으로 결정하고 있다. 볼가강 지역에서 활동하던 볼세비키 포볼쥐스키는 1905년 혁명에 참여했던 가장 존경받는 사회혁명당원들의 인기가 더욱더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농민들은 이들을 '사부님'이라고 부르면서 겉으로는 존경했지만 자기 방식대로 투표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모든 곳에 침투하여 계속해서 소규모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농민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상당수의 공장들이 농촌에 있었기 때문에 상호 침투는 더 쉬웠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조차 고향인 농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름 몇 개월 간 증대하고 있던 실업과 고용주들의 직장폐쇄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농촌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의 대다수는 선동가와 지도자가 되었다.

5월부터 6월까지 뻬쩨르부르그에는 도, 군, 마을 단위로 귀향단이 조직되었다. 노동자 신문의 칼럼들이 전부 귀향단 모임을 알리는데 할애되었다. 이 회의에서 귀향 여행에 대한 보고들이 있었고 대의원들에 대한 지시사항들이 작성되었다. 또한 고향의 선동활동을 위해 모금활동이 진행되었다. 봉기가 일어나기 조금 전에 이 귀향단들은 볼세비키당의 지도 하에 특별 중앙사무국으로 통일되었다. 이 귀향단 운동은 곧 모스크바, 트베르는 물론 다수의 기타 공업도시로 곧 확산되었다.

그러나 농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노동자보다는 병사가 더 중요했다. 젊은 농민들이 어느 정도 고립을 극복하고 전국적 문제들에 직면한 곳은 바로 전선이나 도시라는 인위적 조건 속에서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들의 정치적 의존성이 드러났다. 애국주의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계속 장악되어온 농민들은 이들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또 한편 이들은 다른 사회 집단들로부터 독립하여 군대에서 조직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군 당국은 이 경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전쟁부는 반대했으며 사회혁명당은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 소비에트는 군대에서 뿌리가 허약했다. 가장 유리한 조건 속에서도 농민은 양의 압도적 우위에 상응하는 정치적 질로 자신을 전화시킬 수 없다! 노동자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혁명의 거대 중심부에서만 농민 병사 소비에트는 중요한 작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17년 4월부터 1918년 1월 1일까지 뻬쩨르부르그 농민 소비에트는 특별 위임장을 주어 1,395명의 선동가들을 농촌으로 보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수의 선동가들은 위임장이 없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65개 도를 포괄했다. 크론슈타트에서는 노동자들의 예를 따라 귀향단이 병사와 수병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의 대표들은 철도와 기선에서 무임 승차할 "권리"를 부여하는 위임장을 받았다. 민영 철도와 기선은 이 위임장을 군소리 없이 인정했으나 정부가 운영하는 경우에는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직의 공식 대표들은 농민의 거대한 바다에서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대중 집회의 연설에서 울려나오는 강력한 구호들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전선과 후방 주둔군 병영에서 탈출한 수십만 수백만의 병사들은 이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일을 했다. 전선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병사들은 농촌의 고향으로 돌아오면 말이 많았다. 이들의 말을 게걸스럽게 듣는 청중은 얼마든지 있었다. 모스크바의 볼세비키 무랄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모스크바를 둘러싸고 있던 농민의 엄청난 수가 좌경화되었다....모스크바 도의 농촌과 도시는 전선에서 돌아온 탈주병들로 넘쳐 났다. 또한 이들은 농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도시 노동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농민 나움첸코프에 따르면 칼루가 도의 따분하고 후진적인 마을들은 "6월과 7월에 다양한 이유로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니제고로드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범법 및 무법 행위는 도에 출현한 탈주병, 휴가병, 연대 위원회의 대표 등과 모두 관련되어 있다." 8월에 졸로토노쉬즈키 군에 위치한 바리아틴스키 공주의 장원 관리인이 토지 위원회의 자의적인 행동을 불평한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크론슈타트 수병인 가트란이었다. 부굴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휴가 중인 병사와 수병들이 무정부 상태와 유태인 학살의 분위기를 조성할 목적으로 선동을 하면서 돌아다닌다." "므글린스키 군의 비엘로고쉬 마을에 도착한 어느 수병이 삼림에서 장작과 철도용 침목을 만들거나 수출하는 것을 자기 멋대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병사들은 투쟁을 시작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투쟁을 마무리했다. 니제고로드 군에서 농민들은 수녀원을 약탈하고 초원의 풀을 잘랐으며 울타리를 부수고 수녀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수녀원장은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민병대는 농민들을 끌고 가서 벌을 주었다. 농민 아르베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질질 끌다가 마침내 병사들이 도착했다. 이들은 작당하여 즉시 일을 벌렸다...." 수녀원은 깨끗이 약탈되었다. 농민 보브코프에 의하면 모길리에프 도에서는 "전선에서 귀향한 병사들이 위원회의 첫 지도자들이었고 지주의 추방을 지휘했다."

소총과 총검으로 동료 병사들을 익숙하게 다루는데 필요한 무거운 결심으로 전선의 병사들은 일을 해치웠다. 병사들의 부인들조차 남편으로부터 투쟁 정신을 배웠다. 펜자의 농민 베지쉐프는 이렇게 말한다: "9월 집회에서 장원 습격에 대한 지지 연설을 하는 병사 부인들의 강력한 운동이 일어났다." 다른 도에서도 같은 일이 관찰되었다. 도시에서도 병사의 부인들은 종종 투쟁을 부채질했다.

베르메니체프의 계산에 따르면 병사들이 농민의 투쟁을 주도한 비율은 3월에는 1%, 4월에는 8%, 9월에는 12%, 10월에는 17% 이었다. 이 수치들은 정확하다고 허세를 부릴 수는 없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일반적 경향을 보여준다. 사회혁명당 교사, 읍 서기, 관리들의 지도력은 죽어간 반면 못 말리는 병사들의 지도력은 상승했다.

당시 독일의 유명한 맑스주의 저술가 파르부스는 전쟁 기간에 재물은 축적했지만 운동의 원칙과 통찰력은 잃어버렸다. 그는 러시아 병사들을 중세의 용병, 도적, 노상강도 등과 비교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을 가지려면 러시아 병사들의 무법행위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농민 혁명의 집행기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무시해야한다.

이 운동이 합법성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벌대의 농촌 파견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토벌대로 사용될 수 있는 부대는 카자흐 기병뿐이었다. 자유주의 신문 루스코에 셀로(러시아의 농촌) 지는 10월 11일 이렇게 말한다: "4백 명의 카자흐 기병이 세르도브스키 군에 파견되었다...이 조치는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효과가 있었다; 농민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기다리겠다고 선언했다." 4백 명의 카자흐 기병은 확실히 제헌의회 소집을 지지하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카자흐 기병은 숫자가 충분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이들 자체가 동요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더욱더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2월 혁명 후 첫 4개월 동안 군대가 농민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건수는 17번, 7월과 8월에는 39번, 9월과 10월은 105번이었다고 베르메니체프는 계산한다.

그러나 군대로 농민을 진압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토벌에 나선 군대의 병사들이 농민 편이 되었다. 포돌스크 도의 어느 군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군대 조직 그리고 심지어는 개별 부대들이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결정하고 있으며 농민들이 지주 재산을 몰수하고 삼림을 벌채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들이 직접 약탈에 가담하고 있다....지역의 부대들은 폭력행위를 진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농민 반란은 군대의 마지막 빗장을 풀어버렸다. 노동자들이 농민 전쟁을 주도했기 때문에 농민 군대가 도시의 봉기를 진압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농민들은 노동자와 병사들로부터 우선 사회혁명당이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 즉 볼세비키당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레닌의 구호와 그의 이름이 농촌에 침투했다. 사실 볼세비키당에 대해 꾸준히 증대한 불평은 대부분의 경우 조작이거나 과장이었다. 이를 통해 확실한 이익이 될 것이라고 지주들이 생각했을 뿐이었다. "오스트로프스키 군은 볼세비키의 선동 때문에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다." 우파 도에서는 이런 소식이 들린다: "마을 위원회의 바실리에프는 볼세비키당의 강령을 배포하면서 지주들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강도 행위로부터 보호"를 구하면서 노브고로드의 지주 폴로니크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집행위원회에 볼세비키들이 득실거린다." 이것은 볼세비키들이 지주들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심비르스크의 농민 주모린은 회상한다: "8월에 노동자들은 농촌의 마을을 돌면서 볼세비키당을 선동하고 볼세비키당 강령을 말하기 시작했다." 세베즈 군을 연구한 어떤 사람은 뻬쩨르부르그에서 26세의 직조공 타티아나 미하일로바가 도착한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고향 농민들에게 임시정부를 타도하라고 촉구하면서 레닌의 전술을 칭송했다." 농민 코토프의 말에 의하면 8월말 경에 "우리는 레닌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 젬스트보에서는 아직도 사회혁명당원들이 절대 다수였다.

볼세비키당은 농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9월 10일 네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농민 신문 발행을 요구했다: "농민이 파리 노동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파리 노동자들이 농민을 이해하지 못한 파리 코뮌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도록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비예드노타(빈민) 지가 곧 발행되었다. 그러나 농민들 사이에서 순수한 당 활동은 미미했다. 볼세비키당의 힘은 실무적인 자원이나 기구가 아니라 올바른 정책에 있었다. 공기가 들풀의 씨를 퍼뜨리듯이 혁명의 회오리바람은 레닌의 사상을 퍼뜨렸다.

트베르의 농민 보로비예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9월이 되면 병사들 뿐 아니라 빈농 자신들이 더욱 자주 그리고 더 대담하게 볼세비키당을 옹호하기 위해 집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심비르스크의 농민 주모린도 이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빈농 대다수와 중농 일부는 너나 할 것 없이 레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대화는 오직 레닌에 대한 것뿐이었다." 노브고로드의 농민 그리고리에프는 농촌의 사회혁명당원 한 명이 볼세비키들을 "정권 찬탈자" "배신자"로 부르자 농민들이 "그 개 같은 놈을 처단하라! 그를 돌로 쳐죽이자! 더 이상 우리에게 동화같은 얘기는 하지도 말아라. 토지는 어디 있나? 그만 좀 떠들어라! 볼세비키들이 얘기하게 하자!" 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전국의 다수 지역에서 일어난 이 같은 일들은 10월 혁명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농민의 기억 속에는 사실은 강하게 남아있으나 일어난 시간은 흐릿하다.

병사 치네노프는 트렁크 하나 가득히 볼세비키당의 간행물을 가지고 자기 고향 오렐 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농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선전물들은 아마 독일의 돈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10월에는 "마을의 중핵은 700명에 달했고 다수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고 나선다." 볼세비키 브라체프는 농업만 존재하는 보로네즈 도의 농민들이 "사회혁명당의 매연으로부터 깨어나 볼세비키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이미 마을과 읍의 다수에 지부를 건설하고 신문 정기 구독자들을 확보했으며 우리 위원회의 아주 작은 본부에 다수의 좋은 동지들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바노프의 기억에 따르면 스몰렌스크 도에서 "볼세비키들은 마을에 아주 귀했다. 군대에는 거의 없었다. 볼세비키당 신문은 발행되지 않았으며 유인물은 아주 드물게 배포되었다....그러나 10월이 가까워 오자 더 많은 마을들이 볼세비키당 편으로 넘어왔다."

이바노프는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10월 이전에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당이 영향력을 행사한 군에서는 지주의 장원은 공격을 받지 않거나 소규모로만 공격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곳에서 동일한 현상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타데우쉬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에게 토지를 넘기라는 볼세비키의 요구는 모길레프 군의 농민 대중에게 대단히 빠르게 접수되어 이들은 장원을 파괴했으며 어떤 경우는 불까지 질렀다. 이들은 수확물과 삼림도 접수했다." 근본적으로 이 두 증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볼세비키당의 일반 선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국에서 내전을 키웠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확고한 뿌리를 내린 곳은 어디든지 농민의 투쟁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공격의 형태를 규제하고 파괴의 정도를 줄였다.

토지 문제만이 현안은 아니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시기에 농민은 판매자와 구매자로 손해를 입었다. 곡물은 고정 가격에 징발되었지만 공산품은 더욱 얻기가 어려웠다. 농촌과 도시의 경제적 상호관계의 문제는 곧 "협상 가격(가위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경제의 중심적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미 이 문제는 벌써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볼세비키들은 농민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해 여러분에게 토지를 주고 전쟁을 끝낼 것이다; 또한 공업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고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확립하며 공산품과 농산품의 가격 관계를 통제해야한다. 이 대답은 대단히 간단했으나 가야할 길은 제시되었다. 10월 10일 트로츠키는 공장위원회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브크센티에프의 덩치 작은 고문들이 우리와 농촌 사이에 장벽을 쌓고 있다. 우리는 이 장벽을 깨야한다. 농기구를 제공하면서 이렇게 설명해야한다: 농민을 돕는 노동자의 모든 노력도 노동자들이 생산을 조직적으로 통제할 때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협의회는 이런 의미를 담은 선언문을 발행하여 농민들에게 배포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특별 위원회를 수립하여 금속, 손상된 부품, 조각난 물건 등을 조립하여 "노동자가 농민에게"라는 특별 센터가 운영되도록 했다. 이 고철은 아주 단순한 농기구와 예비 부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주 작은 규모이고 경제에 대한 선동을 목표로 했지만 이 최초로 계획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은 가까운 미래의 전망을 열어주었다. 농촌이라는 금지된 영역에 볼세비키당이 들어온 곳을 보고 겁에 질린 채 농민 집행위원회는 이 새로운 사업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낡아빠진 화해주의자들은 농촌에서 지지 기반이 이미 유실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지역에서 볼세비키당과 경쟁할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트베르의 농민 보로비에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의 선동 메아리는 "빈농을 너무 들쑤셔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혁명이 10월에 오지 않았으면 11월에는 확실히 왔을 것이다." 볼세비키당의 정치적 힘에 대한 이 다채로운 묘사는 당의 조직적 허약성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뚜렷한 불일치를 통해서만 혁명은 전진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혁명 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 속으로 강제될 수가 없다. 10월이든 11월이든 농업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농민은 해체되고 있던 사회혁명당을 활용해야했다. 이 정당의 좌파는 농민 반란의 압력 하에 서둘러 비체계적으로 그룹을 형성하여 볼세비키당을 따르고 당과 경쟁도 했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 농민들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번쩍거리는 깃발 밑에서 정치적 변화를 주로 겪게 될 것이다. 이 하루살이 정당은 농촌 볼세비키당을 반영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농민 전쟁에서 노동계급 혁명으로 가는 일시적인 교량 역할을 할 것이다.

농업 혁명은 나름의 지역 기관들을 가지고 있어야했다. 이 기관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농촌에는 여러 유형의 조직들이 있었다. 읍 집행위원회 같은 국가기관, 토지 및 식량 위원회, 소비에트와 같은 사회적 기관, 당과 같은 순전히 정치적 기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읍 젬스트보로 대표되는 자치기관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농민 소비에트는 도 또는 어느 정도 군의 규모로만 발전했다. 읍 소비에트는 거의 없었다. 읍 젬스트보는 뿌리를 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반면 토지 및 집행위원회는 목적 상으로는 국가기관이었다. 그러나 언뜻 이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나중에는 농업 혁명의 기관이 되었다.

정부 관료, 지주, 교수, 농업 과학자, 사회혁명당 정치꾼 그리고 의심스러운 농민 등이 결합된  토지 수석위원회는 핵심적으로 농민 혁명의 브레이크가 되었다. 도 위원회들은 정부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결코 중지하지 않았다. 군 위원회들은 농민과 상층 관료들 사이에서 동요했다. 그러나 마을 농민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선출되고 활동한 읍 위원회는 농민운동의 기구가 되었다. 이들 각종 위원회의 위원들이 사회혁명당원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지주의 장원이 아니라 농민의 오두막집과 보조를 같이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토지 위원회의 국가적 성격을 소중히 여기면서 이것을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특허권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5월에 사란스키 군의 민병대장 한 명이 이렇게 불평한다: "농민들은 읍 위원회만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군과 시 위원회들은 모두 지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니제고로드의 어느 정부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농민의 독자적 행동을 반대하려는 일부 읍 위원회들의 시도는 거의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결국 위원회의 구성이 바뀐다." 프스코프의 농민 데니소프에 따르면, "위원회들은 언제나 농민 운동의 편을 들었다. 왜냐하면 농민과 전선의 병사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부위가 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군 위원회 특히 도 위원회는 행정 "지식인"이 주도했다. 이들은 지주와 평화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모스크바의 농민 유르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농민들은 이들이 옷의 속을 겉으로 뒤집어 입은 채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정부의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쿠르크스크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임시정부의 지시를 언제나 따르는 군 위원회를 선거를 통해 쇄신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농민이 군 위원회에 진입하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사회혁명당은 마을과 읍 사이의 정치적 끈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당을 통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당의 역할은 오랜 외투의 속을 겉으로 뒤집는 속임수에 있었다.

3월에 농민들은 소비에트를 냉랭하게 대했다. 이 현상은 언뜻 놀라울지 몰라도 사실 아주 깊은 원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토지 위원회와 같은 특별 기관이 아니라 혁명의 보편적 기관이었다. 일반 정책의 영역에서 농민들은 지도부 없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유일한 문제는 이 지도부가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었다. 도 및 군 차원의 농민 소비에트는 협동조합 지도자들의 주도로 그리고 상당한 정도 이들의 비용으로 수립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농민 혁명의 기관이 아니라 농민에 대한 보수적 감시 기관이었다. 농민들은 사회 혁명당 우파가 건설한 이 소비에트가 정부 당국에 대항하는 방패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토지 위원회를 더 좋아했다.

농촌의 마을이 "순전히 농민의 이익"의 범주 내에 갇히는 현상을 막기 위해 정부는 서둘러서 민주 젬스트보를 수립했다. 그런데 농민들은 정부의 이 시도에 대해서도 경계했다. 따라서 선거를 강제하는 것이 빈번하게 필요했다. 펜자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무법행위들이 발생하면서 선거가 중단되었다." 민스크 도에서 농민들은 읍의 선거위원회 의장 두르츠코이-리우베츠코이 공을 체포했다. 그가 선거인 명부를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오래된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와 농민들이 합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굴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했다: "전체 군에서 읍 젬스트보 선거는 계획처럼 잘 되지 않았다....유권자는 전적으로 농민들이다. 이들과 지역 지식인 특히 지역 지주들과의 냉랭한 관계가 눈에 뚜렷했다." 그러나 형태로 보면 젬스트보는 위원회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불평한다: "지식인 특히 지주에 대한 농민들의 태도는 적대적이다." 9월 23일자 모길레프 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토지를 농민에게 즉시 넘기는데 협조하겠다고 확실히 약속하지 않으면 농촌의 문화활동은 위험을 동반한다." 기본 계급들 사이의 합의나 교통이 불가능할 때 민주적 기관들의 토대는 사라진다. 읍 젬스트보의 사산(死産)은 제헌의회의 붕괴를 의심의 여지없이 미리 보여주었다.               

니제고로드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지역 농민들은 다음과 같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민법은 효력을 잃었으며 모든 법적 규제조항들은 농민 조직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일부 지역에서 민병대를 장악하고 있던 읍 위원회는 지역 법을 공표하고 토지 임대료를 정했다. 또한 임금을 규제하고 장원에 자기들이 보낸 관리인을 앉혔다. 또한 토지, 농작물, 장작, 삼림, 연장 등을 차지하고 농기계를 지주로부터 빼앗았으며 수색과 체포를 실시했다. 수백 년 동안 말해온 목소리와 혁명의 신선한 경험은 모두 토지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라고 농민에게 말했다. 농업 혁명은 농민 독재기구를 필요로 했다. 농민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독재라는 말을 몰랐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지주, 자유주의 정부위원, 화해주의 정치가 등이 불평했던 "무정부 상태"는 실제로는 농촌의 혁명적 독재의 첫 단계였다.

1905년 ~ 1906년 혁명기에 레닌은 토지 혁명을 위해 농민만으로 구성된 특별 기관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농민 혁명위원회는 농민운동이 나아갈 유일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농민은 레닌의 생각을 읽지 못했지만 레닌은 농민의 생각을 읽는 법을 알고 있었다.

소비에트가 정치노선을 바꾼 가을이 되어서야 농민들은 소비에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군과 도의 도시에서 볼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 좌파가 장악한 소비에트는 농민의 투쟁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부추겼다. 2월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 농민들은 합법적 방패 막을 갖기 위해 화해주의 소비에트를 쳐다보았으나 나중에는 이것과 적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혁명 소비에트에서 진짜 지도자를 찾을 수 있었다. 9월에 사라토프 농민들은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전국의 권력은...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에게 이전되어야한다. 이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가을이 되어서야 농민들은 토지 강령을 소비에트 권력 구호와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이 소비에트를 누가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 지를 몰랐다.

러시아의 농민 투쟁은 위대한 전통, 단순하지만 명확한 강령, 지역의 순교자와 영웅들을 가지고 있었다. 1905년의 거대한 경험은 농촌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만 농민들을 사로잡았던 종파들의 사상이 성취한 작업을 여기서 언급해야한다.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어느 저술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10월 혁명을 자신들의 종교적 희망이 직접 실현된 형태로 받아들인 다수의 농민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역사상 알려진 모든 농민 반란 가운데 1917년 러시아의 농민 운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치사상의 비료를 가장 풍부하게 공급받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독자적 지도부를 수립하여 권력을 스스로 장악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원인은 고립되고 소규모이며 일상이 반복되는 농업의 천성에서 찾아야한다. 농민의 비참한 경제적 지위는 농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답으로 경험을 일반화하여 이론으로 정식화할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농민의 정치적 자유는 실제로는 다양한 도시의 정당들을 취사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선택조차 선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민은 반란을 통해 볼세비키당을 권력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후에야 볼세비키당은 농업 혁명을 노동자 국가의 법률로 전환시켜 농민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야코블레프의 지도 하에 있던 어느 연구 집단이 자료를 대단히 가치 있게 분류해왔다. 이를 통해 2월부터 10월까지 농업운동의 발전과정이 규명되었다. 매달 농민의 조직화되지 않은 투쟁을 100으로 지정하고 이들은 조직화된 투쟁을 4월에 33, 6월에 86, 7월에 120으로 추산했다. 7월에 사회혁명당의 조직은 절정에 도달했다. 8월에는 100의 비조직화된 투쟁에 비해 62의 조직화된 투쟁이 10월에는 14가 있었다. 비록 그 의의는 제한적이지만 대단히 유익한 이 수치들로부터 야코블레프는 전혀 예상 밖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8월까지 운동이 꾸준히 조직성을 증가시킨 것에 비해 가을에는 더욱더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었다." 또 다른 연구자인 베르메니체프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0월 이전의 투쟁의 물결에서 조직된 운동의 수치가 낮은 것은 이 시기 운동의 자연발생성을 증언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과 대비되듯이 자연발생성이 의식성과 대비되는 것이 유일한 과학적 대비이다. 그렇다면 농민운동의 의식성은 8월까지 상승했다가 급격하게 하락하여 10월 봉기의 순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결론 내려야한다. 그러나 우리 연구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확실히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 예를 들어 이렇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겉으로 보면 "조직적" 성격을 띠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 선거에서 농민이 보인 반응은 훨씬 더 "자연발생적"이었다. 즉 지주에 대항한 "비조직적" 투쟁에서 농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해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농민은 생각이 얕고, 유순하며, 맹목적이었다.

8월 위기에서 농민은 의식성을 버리고 자연발생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화해주의 지도부를 버리고 내전을 선택했다. 조직의 쇠퇴는 진짜 피상적인 특징이었다: 화해주의 조직은 사라졌으나 남은 것은 빈 공간이 결코 아니었다. 농민은 가장 혁명적인 병사, 수병, 노동자 분자들의 직접 지도를 받으며 새로운 투쟁의 길로 나섰다. 단호한 투쟁을 시작할 때 농민들은 대단히 자주 대중집회를 열었다. 또한 같은 마을에 사는 모든 농민들이 채택된 결의문에 서명하도록 노력하기조차 했다. 세 번째 연구자 쉐스타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주의 장원을 공격한 8월에 가장 자주 등장한 장면은 '구 농민 집회...'이다. 집회를 통해 농민은 전유한 물품을 나누고 온갖 종류의 지주, 관리인, 군 정부위원, 토벌대 등과 협상을 한다."

내전 때까지 농민을 지도한 읍 위원회가 내전과 함께 사라진 문제를 이 자료들은 직접 해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설명은 저절로 나온다. 혁명은 아주 빨리 자신의 기구와 도구들을 닭아 없앤다. 토지 위원회는 반(半)평화적 활동을 했기 때문에 지주를 직접 공격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이유에 못지 않게 중요한 특별한 이유들이 보충된다. 지주와 공개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면서 농민들은 자기들이 패배할 경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토지 위원회는 케렌스키의 감옥에 갇혔다. 따라서 반란의 책임을 분산시키는 것이 전술상 필요했다. "농촌 공동체"는 이것을 위해 가장 편리한 형태였다. 늘 그렇듯이 농민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성향도 의심의 여지없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제 문제는 지주의 재물을 직접 점거하고 배분하는 것이었다. 각자는 자기 권리를 누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이 과정에 참여하려 했다. 따라서 투쟁이 조성한 최고의 긴장 때문에 대표기구들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이 대신 농민 집회와 공동체 포고령의 형태로 원시 농민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볼세비키 연구자들이 농민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조야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유형의 볼세비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한다. 사고가 관료화되면 상층부에서 농민에게 강요된 조직 형태들을 불가피하게 과대평가 한다. 대신 농민들이 수립한 조직 형태는 과소평가 한다. 교육받은 관리들은 자유주의 교수처럼 사회 현상을 행정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농업 인민위원(People's Commissar of Agriculture) 야코블레프는 이후 훨씬 더 광범위하고 책임이 더 무거운 영역에서 동일한 관료적 즉흥적 사고방식을 드러냈다. 즉 그는 "완벽한 집단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론적 피상성은 대규모로 실천될 때 잔인한 복수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완벽한 집단화의 오류로부터 13년이나 떨어져 있다. 이제 남은 유일한 문제는 지주의 장원을 몰수하는 것이다. 134,000명의 지주들이 천 8백만 데시아틴을 몰수당할까 덜덜 떨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위협을 받고 있는 층은 7천만 데시아틴을 소유하고 있는 3만 명의 구 러시아 대지주들이다. 이들은 일인당 2천 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귀족인 보보리킨은 짜르의 시종장 로지안코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지주이다. 그런데 내 토지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현실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주의 교리를 실험한다는 대단히 황당한 이유 때문이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혁명의 임무는 지배계급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지주들은 자기 장원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더 이상 장원을 유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토지를 빨리 처분할수록 더 좋다. 이들에게 제헌의회는 국가가 자기 토지를 배상할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걱정까지 배상하는 거대한 어음교환소이다.

자영 농민들은 좌익 농민의 강령을 따랐다. 이들은 기생적 귀족들이 청산되는 것을 대환영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의 개념을 뒤흔드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이들은 자기들 집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국가는 120억 루블 정도를 지주들에게 지불할 돈이 있다. "농민"인 이들은 귀족의 토지가 유리한 가격으로 인민에 의해 지불되어 자기 것으로 이용될 전망에 기대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배상의 수준이 배상의 순간에 조성되는 역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다. 코르닐로프 식 즉 반동적 방식으로 소집되는 제헌의회가 로지안코와 밀류코프가 각각 제시하는 노선의 중간인 개혁노선을 따를 것으로 8월말까지는 기대되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반란이 실패하면서 유산계급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9월과 10월에 유산계급들은 병이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가 죽음을 기다리듯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민에게 가을은 정치의 계절이다. 들판의 농작물은 전부 추수되었으며 환상은 박살났고 참을성은 다했다. 끝장을 볼 때가 왔다! 이제 운동은 제방을 흘러 넘치고 모든 곳에 침투하면서 지역의 특수성을 전부 걷어가 버린다. 또한 마을의 모든 계층들을 끌어 모으고 법과 신중함과 관련된 모든 생각들을 쓸어버린다. 공격적이고 난폭하고 격렬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되어 이 운동은 쇠, 불, 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장원을 파괴하고 불태운다. 또한 지주를 몰아내고 자신의 피로 땅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물을 붉게 물들인다.

푸쉬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가 칭송하던 귀족의 소굴들은 이 과정에서 전부 사라진다. 구 러시아는 연기 속으로 증발한다. 자유주의 언론은 영국식 정원, 농노의 붓으로 그린 유화, 유산으로 상속받은 서재, 톰보프의 파르테논 신전, 승마용 말, 고대의 판화, 씨 황소 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 신음과 울부짖음을 가득 토해낸다. 부르주아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강변해왔다: 농민들이 상전의 "문화"에 앙갚음하는 "파괴적" 방식에 대한 책임은 볼세비키당에게 있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볼세비키당이 세상에 등장하기 수백 년 전에 시작된 일을 지금 끝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진보적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다. 혁명적 야만행위를 통해 그들은 중세의 야만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이들의 선조 및 증선조는 자비나 너그러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프랑스 농민들이 해방되기 450년 전에 봉건 지주들은 자크리의 난을 진압했다. 이 때 경건한 어느 수도승은 자신의 연대기에 이렇게 적었다: "지주들은 나라에 만행을 너무 많이 저질러서 왕국을 파괴하기 위해 영국인들이 올 필요가 없었다. 프랑스 귀족들이 자행했던 만행을 영국 귀족들은 자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 당시의 부르주아 계급만이 그 악랄함에 있어서 프랑스 봉건 귀족들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노동자의 지도력 덕분에 러시아 농민들은 그리고 농민들의 지지 덕분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문화와 인류애의 옹호자들로부터 이 이중의 교훈 즉 반혁명은 혁명보다 몇 배나 잔인하다는 교훈을 배우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전체에서 기본 계급들이 가지고 있었던 상호관계는 농촌의 마을에서 재연되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계획과는 반대로 왕정에 대항해 싸웠듯이 빈농들은 부농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지주에 대항해 가장 대담하게 일어섰다. 화해주의자들은 밀류코프가 인정하는 순간에만 혁명이 확고히 자기 발로 설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농은 좌우를 흘낏 보며 부농의 서명이 자신들의 토지 몰수를 합법화시킬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에 적대적이어서 처음에는 지주 장원에 대한 습격에 저항했으나 부농은 습격의 과실을 즐기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이 화해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넘긴 권력을 갖는데 주저하지 않은 것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 같은 이유로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의 손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으며 지주의 재산은 부농의 손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다.

농촌의 계급 갈등을 당분간 극복했다는 사실에서 농업 민주주의 혁명 그리고 핵심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의 힘이 드러났다: 부농이 지주를 약탈하는 것을 농민이 도왔다. 러시아 역사의 17세기, 18세기, 19세기는 20세기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 20세기가 땅으로 몸을 굽히게 만들었다. 농민 전쟁은 부르주아 혁명가들이 전진하도록 재촉하기는커녕 이들이 반동의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뒤늦은 부르주아 혁명의 허약성이 드러났다. 어제의 중노동 죄수 체레텔리는 무정부 상태에 대항하여 봉건 귀족지주의 장원을 옹호했다! 이렇게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거부당한 농민 혁명은 공업 노동자들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20세기는 자기 목에 걸려 있는 수백 년의 과거를 걷어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어깨에 올라서서 새로운 역사의 지평으로 나섰다. 농민이 자기 토지를 정리하고 울타리를 칠 수 있도록 노동계급은 나라의 선두에 서야했다. 바로 이것이 10월 혁명의 아주 단순한 공식이다.

 

 

제 2장 민족 문제

언어는 인간의 의사소통 그리고 결과적으로 산업활동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민족을 통합시키는 상품 교환이 승리하면서 언어는 민족언어가 된다. 이 토대 위에 민족 국가가 건설되어 가장 편리하고 이윤이 많이 나며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무대가 된다. 네덜란드의 독립 투쟁과 섬나라 영국의 운명을 제외한다면 서유럽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형성기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약 100년 뒤 독일 제국이 성립하면서 이 시기는 기본적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유럽의 민족국가들은 생산력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이 동안 동방 즉 페르시아, 발칸 반도, 중국, 인도 등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자극으로  민족 민주 혁명의 시대를 겨우 시작했다. 1912년의 발칸반도 전쟁으로 남부와 동부 유럽의 민족국가 형성은 완료되었다. 이후 제국주의 전쟁은 부수적으로 미완성된 유럽의 민족 혁명을 완성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할, 독립국 폴란드의 성립, 짜르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러시아 접경 지역의 독립 국가 성립 등으로 유럽의 민족 혁명은 전부 완료되었다.

러시아는 단일 민족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로 시작되었다. 이 현상은 러시아 사회의 뒤늦은 발전과 맞아 떨어졌다. 널리 흩어져 있는 농업과 가내수공업의 기초 위에 상업자본은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생산관계를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대신 넓게 퍼져 활동 공간을 증대시켰을 뿐이었다. 무역상, 지주, 정부 관리 등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퍼지면서 정착 농민을 뒤따라갔다. 농민은 신선한 토지와 세금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 후진 부족들이 거주하는 새로운 지역 속으로 더욱 깊이 침투했다. 러시아 국가의 팽창은 기본적으로는 농업의 팽창이었다. 러시아의 농업은 대단히 원시적이었지만 남부와 동부의 유목민 농업보다는 어느 정도 우월성을 드러냈다. 광활하면서도 계속 퍼져나가는 토대 위에 형성된 관료적 국가는 국경선 서부의 민족들을 정복할 정도의 위력은 가지고 있었다. 이 민족들은 러시아보다 문화 수준이 높았으나 적은 인구 규모나 내부 위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트해 국가들, 핀란드).    

러시아의 주력인 7천만 대러시아인에 약 9천만의 "변방" 민족들이 서서히 합쳐졌다. 변방 민족들은 러시아보다 문화수준이 높은 서부 민족들과 문화수준이 낮은 동부 민족들로 크게 나누어졌다. 이렇게 성립된 제국의 지배적 민족은 전체 인구의 43% 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57%는 다양한 수준의 문화와 종속성을 지닌 민족들이었다. 이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17%, 폴란드인은 6%, 백러시아인은 4.5%를 차지했다.

러시아 국가기구는 탐욕스럽게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켰으며 지배계급들의 토대인 농민은 가진 자원이 빈약했다. 이 두 요소가 결합하여 가장 가혹한 착취질서가 성립되었다. 러시아는 서부 국경 뿐 아니라 동부 국경의 민족들도 이웃 나라들보다 훨씬 가혹하게 억압했다. 권리를 박탈당한 피억압 민족들의 엄청난 숫자와 이들이 겪은 극도의 피폐함이 결합하여 짜르 러시아의 민족 문제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민족적 동질성을 구비한 국가들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지역주의의 극복을 이탈리아와 독일은 민족 분열의 극복을 호소하는 사상으로 뭉쳤다. 이와 반대로 터키,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민족적 이질성이 심했던 제국들에서 발생한 뒤늦은 부르주아 혁명은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촉구하면서 제국을 분열시켜 결과적으로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이 두 과정은 기계적으로 표현되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역사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 단결을 활용하여 산업의 기본 토대를 구축한다. 이 목적을 위해 독일 국가들은 통일되어야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어야했다.

일찍이 레닌은 러시아의 원심력적 민족운동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수년간에 걸쳐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에 반대하여 오랜 당 강령의 유명한 제 9항 즉 민족 자결권을 끈질기게 옹호했다. 볼세비키당은 분리 독립의 복음을 결코 옹호하지 않았다. 다만 거대 국가의 국경 안에 민족들을 강제로 묶어 두는 것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민족 억압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었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러시아 노동계급은 서서히 피억압 민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첫 번째 측면에 불과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볼세비키당의 정책은 겉으로는 이 측면에 모순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보완하는 두 번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당과 노동자 조직 일반의 틀 내에서 볼세비키당은 조직의 엄격한 중앙집중성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을 서로 대립시키거나 분열시킬 소지가 있는 모든 색채의 민족주의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다. 볼세비키당은 부르주아 국가가 소수 민족에게 시민권이나 국가 언어를 강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반면에 자발적인 계급적 규율로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을 가능한 밀접하게 단결시키는 것을 진정 성스러운 임무로 간주했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은 민족으로 구분되는 연방적 당 구조를 단호히 거부했다. 혁명 조직은 미래 국가의 원형(原型)이 아니라 국가 수립의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는 제품을 만들기에 적합해야할 뿐 제품을 그 속에 포함시키지 말아야한다. 이렇게 되어야 중앙집중적 조직은 혁명투쟁의 임무 그리고 민족들에 대한 중앙집중적 억압을 분쇄하는 임무를 성취하도록 보장받는다.

러시아의 피억압 민족들에게 짜르의 타도는 필연적으로 민족해방 혁명을 의미했다. 그러나 2월 체제의 여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공식 민주주의 진영은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어 코가 꿰였기 때문에 구체제의 족쇄를 깨는데 완전히 무능했다. 민주주의 진영은 모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할 자신의 권리를 신성 불가침의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도 대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에게 지배적 지위를 부여한 부, 권력, 영향력의 원천인 민족 억압을 눈에 불을 키고 계속 옹호했다. 화해주의자들의 민주주의는 짜르의 민족 정책의 전통을 자유주의 수사(修辭)로 번역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피억압 민족들의 해방보다 혁명의 단결을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떠벌렸다. 그리고 연립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족들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좀더 효과적인 주장을 들고 나왔다. 따라서 피억압 민족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오스트리아-독일 총사령부의 공작으로 간주되어야 했다. 이 문제에서도 입헌민주당은 주역을 화해주의자들은 조역을 맡았다.

물론 새 정부는 변방 민족들에 대한 혐오스러운 법률적 족쇄와 복잡한 중세적 조롱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다만 개별 민족들을 차별하는 예외법들을 단순히 철폐하는 것 즉 대러시아 국가관료집단 앞에서 모든 민족들에게 단순히 법률적 평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일을 끝내려고 희망하고 노력했다.

이 형식적인 평등은 유태인들에게 가장 많은 것을 선사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조항은 650개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도시 거주자이며 가장 뿔뿔이 흩어진 민족이었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국가적 독립이나 영토적 자치를 주장할 수 없었다. 전국의 유태인들을 학교와 기타 기관들을 통해 단결시킨다는 소위 "문화적 민족 자치" 프로젝트는 다양한 유태인 그룹들이 오스트리아 이론가 오토 바우어로부터 빌린 반동적 공상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햇볕에 밀랍이 녹듯이 2월 혁명의 자유 속에 며칠만에 녹아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혁명은 적선이나 체불 임금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좀더 부끄러운 민족차별 법들이 철폐되면서 민족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에게 형식적 평등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들 사이의 불평등한 지위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냈을 뿐이었다. 소수 민족들 대부분이 대러시아 국가의 서자나 양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특히 핀란드인에게 평등권 선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러시아인과의 평등이 아니라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전에 이미 강제적으로 러시아인이라고 선언되어 평등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지주의 장원과 러시아식 독일 도시에 의해 억압당해온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에게도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중앙아시아 후진 민족과 부족들의 가혹한 운명도 전혀 완화되지 못했다. 이들은 법적 규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족쇄 때문에 맨 밑바닥 지위에 묶여있었다. 자유주의-화해주의 연립정부는 이 모든 문제들을 고려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민주 국가는 오랜 대러시아 관료 국가와 다른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국가 관료들은 자기의 특권적 지위를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변방의 대중에게 혁명이 깊이 뿌리내리면 내릴수록 러시아 국가언어가 유산계급의 언어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졌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허용한 형식적 민주주의는 후진 피억압 민족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우리는 민족 고유의 학교, 법정, 관리 등 문화발전에 가장 기본적인 수단들을 그 동안 너무나 박탈당해 왔다. 미래에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말은 이들을 더욱 짜증나게 했을 뿐이었다. 이들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여당은 제헌의회 역시 지배할 것이며 러시아 동화 정책의 전통을 계속 옹호할 것이다; 또한 지배계급이 넘지 않으려는 양보의 한계선을 탐욕스럽게 경계하면서 이것을 피억압 민족들에게 확실히 주지시킬 것이다.

핀란드는 처음부터 2월 체제의 옆구리에 박힌 가시였다. 노예화된 영세 소작농 "토파즈"가 대단히 고통스러운 농업 문제였기 때문에 인구의 14%밖에 되지 않은 공업 노동자들은 농민을 지지자로 만들었다. 핀란드 의회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한 세계에 유일한 의회였다. 이들은 200 의석 가운데 103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6월 5일에 공포된 법은 전쟁과 대외정책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의회가 주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핀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동지 당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들의 호소는 아주 잘못된 주소로 전달된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임시정부가 한발 물러섰다. "동지 당"이 행동을 취하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체이제를 대표로 한 고문단이 헬싱키에 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케렌스키, 체르노프, 스코벨레프, 체레텔리 등 뻬쩨르부르그의 사회주의 장관들은 헬싱키의 사회주의 정부를 무력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인 왕당파 루콤스키는 핀란드의 민간 행정당국과 시민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러시아군에 저항할 경우 "도시 특히 헬싱키가 초토화될 것이다." 이렇게 사전 준비가 끝나자 정부는 문체조차 왕당파를 그대로 모방한 엄숙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핀란드 의회는 해산되었다. 무력 진압의 첫날 러시아 정부는 전선에서 차출한 병사들을 핀란드 의회의 정문에 배치시켰다. 10월 혁명으로 전진하고 있던 러시아의 혁명 대중은 이렇게 해서 계급투쟁에서 민주주의 원칙이 차지하는 제한된 지위에 대해 좋은 교훈을 얻었다.

러시아 지배계급들의 이 방자한 민족주의에 직면하여 핀란드의 혁명군대는 존경할 만한 태도를 보였다. 9월초 헬싱키에서 열린 소비에트 지역 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핀란드 민주주의가 의회를 다시 소집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할 경우 의회 소집을 방해하는 어떤 시도도 반혁명 행위로 간주한다." 이것은 의회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직접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가 지배한 핀란드 민주주의는 봉기를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의회를 해산시키겠다는 위협 속에 진행된 새 선거는 케렌스키 정부의 의회 해산에 동의를 했던 부르주아 정당들에게 200 의석 중 180석이라는 다수를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국내 문제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들과 탐욕스러운 지주들이 있는 이 유럽 북부의 스위스에서 이 문제들은 불가피하게 내전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 부르주아 계급은 반 공개적으로 군대 간부들에게 내전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적위대의 비밀 중핵이 구성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스웨덴과 독일에게 무기와 군사 고문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노동자들은 러시아군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어제까지만 해도 러시아 정부와 합의할 의향이 있었던 부르주아 내부에는 완전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의 주요 신문 후부드스타츠블라데트 지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인민은 무정부주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그렇다면 될 수 있으면 이 혼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 임시정부는 제헌의회를 기다릴 여가가 없이 일단 양보조치를 취해야했다. 10월 23일 "원칙적으로" 군사와 대외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케렌스키가 하사한 "독립"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로부터 이틀 뒤에 그는 권력에서 쫓겨났다.

러시아의 옆구리에 박힌 두 번째 그러나 훨씬 더 거대한 가시는 우크라이나였다. 6월초 케렌스키는 우크라이나 의회가 소집한 우크라이나 병사 대회를 금지시켰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이에 불복했다. 정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케렌스키는 대회를 사후에 합법화시키고 과장된 투의 전보를 보냈다. 이것을 대회는 경멸의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 쓰디쓴 경험이 있는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케렌스키는 3주일 후 모스크바의 회교 군사 대회를 금지시켰다. 민주 정부는 불만을 품은 민족들에게 손에 붙드는 것만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려고 열성인 것 같았다.

6월 10일 처음으로 발표한 "보편 선언"에서 우크라이나 의회는 임시정부가 민족 독립을 반대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이에 입헌민주당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독일 첩자라고 비난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충고를 했다. 임시정부는 키에프에 대표단을 보냈다. 우크라이나의 열띤 분위기 때문에 케렌스키, 체레텔리, 테레쉔코는 우크라이나 의회를 만나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에 대한 7월 공격 후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나왔다. 8월 5일 압도적 다수로 우크라이나 의회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제국주의 경향에 찌든" 정부가 7월 3일의 합의를 깼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 비니첸코는 이렇게 선언했다: "약속을 지킬 때가 왔을 때 임시정부는...치사한 사기꾼임이 드러났다. 정부는 사기적 술수를 통해 거대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 단도직입적인 언어는 정치적으로 정부에 가까워야할 부위에서조차 정부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적절히 전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시적으로 보면 우크라이나의 화해주의자 비니첸코와 케렌스키의 차이점은 하나 뿐이었다: 케렌스키는 평범한 변호사였으며 비니첸코는 평범한 소설가였다.

제헌의회가 이후 정하는 범위 내에서 러시아의 모든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하는 포고령을 정부는 마침내 9월에 발표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이 약속은 자결권의 한계만 정확히 명시하고 나머지는 대단히 모호한 채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또한 내적으로 모순적이었기 때문에 누구의 신뢰도 받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하는 일들은 이미 너무 노골적으로 그 정체가 드러나 누구에게도 신뢰를 줄 수 없었다.

상원은 오랜 전통의 제복을 입지 않았다고 새 의원들의 원내 입장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바로 이 상원은 우크라이나 총서기국 즉 내각에 하달되었으며 임시정부가 확인한 지시사항들을 공개하지 않기로 9월 2일 결정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총서기국에 대한 법 조항이 없으며 불법기관에게 지시사항을 하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고상한 법학자들은 다음 사실도 역시 숨기지 않았다: 정부와 우크라이나 의회 사이의 합의 자체는 제헌의회의 권한을 찬탈하는 것이다. 짜르가 임명한 이 상원의원들은 이제 순수 민주주의의 가장 완고한 옹호자가 되었다. 이렇게 용기를 보인 우익의 정부 반대자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반대가 지배계급들의 마음에 쏙 들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은 약한 경제적 유대를 통해 러시아에 통합된 핀란드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립을 참아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곡물, 도네츠의 석탄, 크리보로그의 철광석 등의 "자치"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10월 19일 케렌스키는 우크라이나 총서기에게 전보를 보냈다: 우크라이나 제헌의회를 지지하기 위해 그곳에서 시작된 범죄적 선동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직접 설명할 것이 있으므로 뻬쩨르부르그로 급히 출두할 것"을 명령한다. 동시에 키에프 지방검사는 의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위협적인 조치들은 용서 행위가 핀란드를 기쁘게 하지 못한 것과 똑같이 우크라이나를 조금도 겁주지 못했다.

이때 우크라이나의 화해주의자들은 뻬쩨르부르그의 화해주의자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민족적 권리를 위한 자신들의 투쟁을 둘러싸고 있는 상서로운 분위기가 존재했다. 이외에도 상당수 피억압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상대적 안정성은 후진성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뿌리에 근거하고 있었다. 도네츠와 크리보로그 분지의 급격한 공업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대러시아에 계속 뒤 처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노동계급의 동질성과 단련 정도는 그 수준이 낮았다. 이곳의 볼세비키당은 양적 질적으로 허약했으며 멘세비키당과 조직을 분리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 그리고 특히 민족적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공업이 발전한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도 10월 중반에야 겨우 열린 소비에트 지역 협의회에서 화해주의자들은 근소한 다수를 지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계급은 아직도 허약했다. 기억하고 있듯이 전체적으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원인의 하나는 이것이었다: 이들의 강력한 부위는 러시아에 살지도 않는 외국인들이었다. 변방에서는 여기에다가 이에 못지 않은 중요한 원인이 보충되었다: 이곳의 부르주아 계급은 인구 대다수와는 다른 민족이었다.

변방 도시의 인구는 민족 구성이 주변 농촌 지역의 대다수 인민과 달랐다.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에서 지주, 자본가, 변호사, 기자 등은 대러시아인, 폴란드인, 유태인 등 외국인이었다. 농촌 인구는 전부 우크라이나인과 백러시아인이었다. 발트해 국가들의 도시는 독일인, 러시아인, 유태인 부르주아 계급의 피난처였다. 대신 농촌은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이 전부 차지했다. 그루지아 도시들의 지배적 민족은 러시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이것은 터키인이 사는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활과 문화수준 뿐 아니라 언어에서도 대다수 농촌 인구는 도시 인구와 달랐다. 도시 인구는 인도에 사는 영국인과 같은 처지였다. 재산과 수입의 보호를 위해 관료기구의 덕을 보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의 지배계급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던 변방의 지주, 자본가, 상인 등은 자기 주위에 러시아 출신의 관리, 서기, 교사, 의사, 변호사, 기자 그리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을 소규모로 포진시키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도시는 러시아 동화 정책 및 식민화의 중심이었다.

이런 현상은 농촌이 조용하기만 하면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갈수록 참을성을 상실하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도시는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방어하면서 계속 이에 저항했다. 관리, 상인, 변호사 등은 산업과 문화의 고지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투쟁을 증대되는 "국수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고상하게 위장했다. 지배 민족이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구는 "민족주의"에 대한 우월성으로 위장된다. 이것은 승리한 민족이 자신의 전리품을 보호하기 위해 평화주의를 손쉽게 채택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간디의 인도 민족주의에 직면한 영국 노동당 당수 맥도널드는 자신이 국제주의자인 체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인이 독일에 끌리는 것이 프랑스의 보수주의 수상 쁘웽까레에게는 프랑스 평화주의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보였다.      5월에 임시정부에 파견된 우크라이나 대표단은 이렇게 적었다: "우크라이나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러시아식 거리를 본다...그리고 이 도시들이 우크라이나 인민의 바다 속에 떠있는 조그만 섬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10월 혁명의 강령에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담은 글이 그녀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오락거리"에 불과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민족자결권이라는 볼세비키 효모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풀려졌다. 빛나는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주장을 통해 아주 심각한 역사적 오류를 범했다. 일반적으로 우크라이나 농민은 정치적 존재의 수준으로 올라서지 못했기 때문에 과거에는 민족적 요구들을 제기하지 못했다. 2월 혁명의 아마도 유일한 공헌이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로 이것이었다: 2월 혁명은 러시아의 피억압 계급과 민족들이 자신들의 요구들을 마침내 목소리 높여 외칠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농민의 정치적 각성은 이들 고유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학교 교육, 법정, 자치 행정 등은 큰 변화를 강요받았다. 이 운동을 반대하는 것은 농민을 다시 정치적 무존재의 상태로 떠미는 것과 같았다.

소비에트는 지배적으로 도시의 조직형태였다. 따라서 도시와 농촌의 민족적 차이는 소비에트에서도 고통스럽게 감지되었다. 화해주의 정당들의 지도로 소비에트는 빈번히 기본 인구의 민족적 이해를 무시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허약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리가와 레발의 소비에트는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들의 민족적 이해를 아예 망각해버렸다. 바쿠의 화해주의 소비에트는 이곳의 기본 민족인 투르크만인의 이해를 경멸했다. 국제주의라는 거짓 깃발 하에 소비에트는 빈번하게 우크라이나인과 회교인의 방어적 민족주의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도시의 억압적인 러시아 동화 운동의 방패가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통해 변방의 소비에트는 농촌의 이해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의 인민은 자연의 가혹함과 사회의 착취 때문에 짓눌려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경제와 문화는 전반적으로 원시성을 면치 못했으며 민족적 열망을 느낄 조건을 제공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보드카, 세금, 강제적인 그리스정교 등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국가의 주요한 억압 도구였다. 이탈리아인이 프랑스의 악이라고 부르고 프랑스인이 나폴리의 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시베리아 인민은 "러시아"의 악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러시아가 문명의 씨앗을 시베리아에 가지고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월 혁명은 시베리아까지 미치지 못했다. 북극 지방의 황무지에서 사는 사냥꾼들과 순록 목동들은 자신들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한다.

볼가강, 코커서스 북부지방, 중앙아시아 등지의 민족과 부족들은 2월 혁명에 의해 처음으로 선사시대의 존재로부터 깨어났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민족 부르주아도 민족 노동계급도 없었다. 농민과 목동 대중 위에 상층부의 얇은 부위가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지식인 집단이 되었다. 민족 자치의 강령 수준으로 아직 올라서지 못한 이곳에서 투쟁의 목표는 자신들의 문자, 선생 그리고 가끔 자신들의 성직자를 갖는 것이었다. 이들은 쓰디쓴 경험을 통해 다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받은 국가 지배자들은 가장 억압받는 이들이 일어서는 것을 자발적으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후진적인 인민은 가장 혁명적인 계급을 동맹자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지식인 집단의 좌파를 통해 보티아크족, 추바쉬족, 지리아족, 다게스탄과 투르케스탄의 부족 등이 볼세비키당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를 비롯하여 러시아 식민지들의 운명은 러시아 중앙의 산업발전에 따라 바뀌었다. 무역상을 강탈하는 등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강도 행위가 좀더 위장된 강도 행위로 바뀌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의 농민들은 주로 면화 등 공업원자재의 공급자로 바뀌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야만성이 결합된 착취질서는 아시아 민족들을 극단적인 치욕상태로 짓눌렀다. 그리고 2월 혁명의 체제는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유지시켰다.

짜르는 바쉬키르족, 부리아트족, 키르기즈족 기타 유목민 부족들의 가장 좋은 토지들을 강탈했다. 이것들은 원주민 사이의 식민지 오아시스에 흩어져 있는 지주와 러시아인 부농들의 소유로 계속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민족 독립정신의 각성은 무엇보다 이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을 의미했다. 이들이야말로 인위적으로 대상(帶狀) 토지소유 제도를 구축하여 유목민들을 기아와 점진적인 멸망의 운명으로 내몰았다. 한편 식민주의자들은 아시아 민족들의 "분리독립 운동"을 러시아의 단결 즉 자기 소유권의 신성함으로 저지했다. 원주민 운동에 대한 식민주의자들의 증오심은 트랜스바이칼 지역에서는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3월 사회혁명당의 주도로 농촌의 서기들과 전선에서 돌아온 하사관들은 부리아트족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구체제를 최대한 오래 보존하기 위해 식민지의 모든 착취자들과 강도들은 이때부터 제헌의회의 주권에 호소했다. 이들이 자신의 가장 확실한 보루라는 것을 인식한 임시정부가 이 상투어를 제공했다. 반면 피억압 민족의 특권 상층부 역시 더욱 빈번하게 제헌의회에 호소했다. 회교 지배계급인 성직자들은 각성하고 있는 산악 민족과 코커서스 북부지역 부족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수록 이들 위로 회교 율법의 초록색 깃발을 흔들면서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모든 문제들을 연기한다고 선언했다. 제헌의회는 전국의 보수 반동, 특별 이해집단, 특권층 등의 구호가 되었다. 제헌의회에 호소하는 것은 곧 문제 해결을 미루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시간을 번다는 것은 반동세력을 규합하여 혁명의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초기에만 그리고 후진 민족들과 거의 회교도들 사이에서만 운동의 지도력이 성직자나 봉건 상류층에 의해 장악되었다. 일반적으로 농촌의 민족운동은 당연히 농촌 교사, 서기, 관리, 하급장교 그리고 어느 정도 상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변방의 도시에는 좀더 품위 있고 부유한 분자들로 구성된 러시아인 또는 러시아 동화 지식인 집단과 함께 좀더 젊은 부위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농촌 출신으로 자본의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 부위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 기본 농민 대중의 민족적 이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사회적 이해도 대표하는 임무를 맡았다.

변방의 화해주의자들은 민족적 열망 때문에 러시아의 화해주의자들을 적대시했으나 기본적으로 이들과 같은 유형이었으며 심지어 대개는 같은 이름으로 통했다.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주의당, 그루지아와 라트비아의 멘세비키당, 리투아니아의 "트루도비키(노동당)" 등은 대러시아의 사촌들과 똑같이 혁명을 부르주아 체제의 틀 속에 가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대단히 허약했기 때문에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대신 국가권력을 스스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변방의 화해주의자들은 농업 및 노동 문제에서 중앙정부보다 더 진보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군대와 농촌에서 연립정부 반대자로 보이는 큰 장점을 누렸다. 이 결과 이들은 러시아 화해주의자들과 결국에는 같은 운명이었으나 다만 상승과 몰락의 시간을 달리했을 뿐이었다.

그루지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소그루지아의 극빈농들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러시아 전국의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지도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2월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 그루지아 지식인 집단의 지도자들은 그루지아를 조국이 아니라 지롱드 즉 전국에 지도자들을 제공하도록 점지된 축복 받은 남부의 도로 바라보았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정협의회에서 그루지아의 멘세비키 지도자 첸켈리는 짜르 치하에서 그루지아인들은 날씨가 좋든 나쁘든 이렇게 말했다고 뻐겼다: "단 하나의 조국, 러시아." 그리고 한달 후 민주협의회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루지아 민족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루지아 민족은 대러시아 혁명에 전적으로 복무한다." 그리고 대러시아 관료들이 개별 지역들의 민족적 권리 주장을 완화시키거나 저지할 때마다 유태인들을 이용했듯이 그루지아 화해주의자들을 "이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루지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내로 제한하기를 희망할 때까지만 계속되었다.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는 대중이 승리할 위험성이 커지는 만큼이나 그루지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화해주의자들과 결별하고 그루지아 내부의 반동 세력과 유대를 더 강화했다. 그리고 소비에트가 승리하자마자 러시아의 단결을 주창했던 이들은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트랜스코커서스 지역의 민족들에게 국수주의의 누런 송곳니를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변방에는 사회 모순이 덜 발전했고 이 때문에 이것은 불가피하게 민족 문제로 위장되었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러시아 중심부보다 변방의 피억압 민족 대부분에 의해 더 많은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족적 갈등은 그 성격상 2월 혁명 체제를 잔인하게 뒤흔들어 중심부의 혁명에 충분히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 상황 속에서 계급 갈등과 동시에 터진 민족적 갈등은 특히 격렬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되어온 라트비아인 농민과 독일 호족 사이의 적대감 때문에 전쟁이 터지자 수천 명의 근로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군에 자원 입대했다. 라트비아인 농업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명사수 연대들은 전선에서 가장 훌륭한 부대에 속했다. 그러나 이미 5월에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요구하며 나섰다. 이들의 민족주의는 미성숙한 볼세비키주의의 겉껍질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에스토니아에서도 반복되었다.

백러시아에는 지주들이 폴란드인이거나 폴란드에 동화되었다. 또한 유태인들이 도시와 읍을 장악했다. 더욱이 관리는 러시아인들이었다. 따라서 두 배 세배 억압받은 농민들은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조성된 전선의 영향으로 자신의 민족적 사회적 분노를 볼세비키주의의 통로로 집중시킬 시간을 가졌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백러시아 대중은 압도적으로 볼세비키당에게 표를 던졌다.

깨어난 민족적 존엄성은 사회적 분노와 연결되어 한때는 이것을 억제하고 한때는 이것을 폭발시켰다. 이 모든 과정들은 군대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민족 단위로 연대를 창설하려는 진정한 열병이 군대를 휩쓸었다. 이 민족 연대들은 전쟁과 볼세비키당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에 따라 중앙정부에 의해 보호되거나 용인되거나 탄압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민족 연대들은 갈수록 임시정부를 적대시했다.

레닌은 혁명의 "민족적" 맥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9월말에 쓰여진 유명한 논문 [위기는 무르익었다]에서 그는 끈질기게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협의회의 민족 대표단은 "연립정부에 대한 반대 투표(55표 가운데 40표)를 통해 소비에트보다 더 급진적이며 노동조합보다 덜 급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피억압 민족들이 대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독자적 투쟁을 한발 한발 혁명적 몰수를 통해 수행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흐네유딘스크에서 열린 부리야트족의 10월 대회에서 어느 연설자는 이렇게 선언했다: 변방 민족들의 지위 개선과 관련하여 "2월 혁명은 새로운 것을 전혀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의 판단은 볼세비키들을 아직은 지지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들에 대해 더욱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는 것을 필요하게 만든 것 같았다.

뻬쩨르부르그에서 10월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전국 병사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다음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지만 대러시아 볼세비키당의 무장봉기를 "반민주적 행위"로 규정하는 것도 거부한다; 봉기 진압을 위한 병사의 파견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들을 취한다. 이 입장은 민족 해방 투쟁의 소부르주아 단계를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든 애매한 입장을 끝장내려는 노동계급의 혁명을 촉진시켰다.

한편 지금까지 언제나 중앙정부에게 기울었던 변방의 부르주아 대부분은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민족적 토대가 조금도 없는 분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발트해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열광적인 애국주의로 로마노프 왕조의 첫 보루였던 독일의 호족들을 따랐었다. 그러나 이제 분리 독립의 깃발 아래 볼세비키당의 러시아와 자기 민족의 대중에게 저항했다. 이와 같은 방향으로 더욱 신기한 현상들이 줄을 이었다. 10월 20일에 "카자흐 군대집단, 코커서스 산악인, 대평원의 자유민족 등의 동남 연방"이 새로운 국가의 토대를 놓았다. 여기서 제국주의 중앙정부의 보루였던 돈강, 쿠반 지역, 티어 지역, 아스트라한 지역 등의 카자흐 지도자들은 몇 달만에 연방국가의 열렬한 옹호자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 근거로 회교 산악인, 대평원 거주민 등의 지도자들과 단결했다. 연방국가의 국경선은 북쪽에서 다가오는 볼세비키당의 위험에 대한 장벽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반혁명적 분리독립 운동은 볼세비키 정부에 저항하는 내전의 주요 훈련장이 되기 전에 먼저 케렌스키의 연립정부에 직접 저항하여 이 정부의 기를 죽이고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하여 다른 모든 문제들과 함께 민족 문제는 임시정부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보여주었다. 이 머리에 붙어있던 3월과 4월의 희망적인 머리카락들은 모두 나중에 증오와 분노의 뱀으로 돌변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보론>

거시적으로 보면 볼세비키당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통해 10월 혁명의 승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 정당이 2월 혁명 직후 바로 이 입장을 채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 조직이 허약하고 경험이 부족했던 변방 뿐 아니라 뻬쩨르부르그 중앙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전쟁 중에 당은 너무도 약화되었으며 당 중핵의 이론적 정치적 수준도 너무 낮아져 있었다. 따라서 레닌이 해외에서 귀국할 때까지 공식 당 지도자들의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어정쩡했다.  

물론 전통에 따라 볼세비키당은 민족 자결권을 옹호했다. 멘세비키당도 말로는 이 입장에 동조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두 당의 강령은 동일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권력 문제였다. 농업 문제 뿐 아니라 민족 문제에서도 볼세비키당이 제출한 구호는 민주주의로 위장된 부르주아 제국주의 체제의 보존과 화해할 수 없이 적대했다. 그러나 당의 임시 지도자들은 이 점을 이해할 능력이 조금도 없었다.  

스탈린의 민주적 입장은 이 무능력의 가장 조야한 표현이었다. 민족 차별을 철폐하는 정부의 포고령에 대한 3월 25일의 논문에서 스탈린은 민족 문제를 역사적 규모로 정식화하려고 했다: "민족 억압의 사회적 기초이자 원동력은 쇠퇴 중인 토지 귀족이다." 그러나 민족 억압은 자본주의 시대에 사상 유례 없이 확대되었으며 식민지 정책에서 가장 야만적 모습을 드러냈다. 스탈린은 이 사실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계속 이렇게 적고 있다: "토지 귀족은 부르주아 계급과 권력을 공유하고 있다. 귀족의 무제한적 권력은 영국에서 이미 오래 전에 종식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민족 억압은 온건하며 덜 비인간적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전쟁 중에 권력이 지주(!)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민족 억압은 상당히 강화되었다(아일랜드와 인도에 대한 박해)." 아일랜드와 인도를 억압한 자들은 지주들이고 이들은 로이드 조오지를 통해 전쟁 덕분에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계속 주장한다: "...지주제도가 과거이든 지금이든 전혀 없었으며(!)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의 손에만 맡겨진 스위스와 북미에서 민족들은 자유롭게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나라들에서는 민족 억압은 존재할 곳이 없다...." 그는 미국의 흑인, 원주민, 이주민, 식민지 문제 등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

봉건제도를 민주주의와 혼란스럽게 대조시키는데서만 나오는 이 가망 없는 편협한 분석으로부터 순수한 자유주의 추론이 정치적으로 도출된다. "정치무대에서 봉건 귀족을 제거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것 바로 이것이 민족 억압을 끝내고 민족 자유에 필요한 실제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면서 실제로 이 조건들이 조성되었다...." 이 글은 이 주제에 대해 그 동안 멘세비키들이 써온 것 전부보다 제국주의 "민주주의"를 더 원칙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카메네프와 함께 스탈린은 대외 정책에서 임시정부와 분업을 하여 민주적 평화를 성취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정도로 국내 정책에서도 그는 르보프공의 민주주의에서 민족 자유의 "실제 조건"을 찾았다.

실제로 짜르의 몰락은 우선 다음 사실을 완전히 폭로했다: 반동 지주 뿐 아니라 자유 부르주아 계급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전체는 노동계급의 애국주의 상층부와 함께 민족적 권리의 진정한 평등 즉 지배 민족의 특권 철폐에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이었다. 이들의 강령 전체는 민족 문제를 완화시키고 문화라는 당의정을 제공하고 대러시아의 지배적 지위를 민주적으로 은폐하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4월 당협의회에서 레닌의 민족문제와 관련된 결의안을 옹호하면서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민족 억압은 제국주의 집단이 채택하는 체제이자 조치들이다."라는 테제로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논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3월 입장으로 돌아간다. "민주 국가일수록 민족 억압은 덜하며 이 역도 성립한다." 이 주장은 그가 직접 요약한 것이며 레닌으로부터 빌린 것이 아니다. 민주적 영국이 봉건적이며 카스트 제도가 억누르고 있는 인도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전처럼 그의 제한된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스탈린은 계속한다: "구 토지귀족"이 지배해온 러시아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민족 억압이 소수 민족의 학살을 가져온 적은 결코 없었다." 마치 토지귀족이 "결코" 영국을 지배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헝가리에서 지배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말한다! "민주주의"를 약소국 억압과 통합시키는 역사발전의 결합적 성격은 스탈린에게는 아예 금시초문이다.

역사 발전이 뒤늦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다민족 국가로 출발했다. 그러나 뒤늦음은 불가피하게 모순적인 복잡한 개념이다. 후진국은 같은 거리를 두고 선진국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지 가지 않는다. 세계 경제의 시대에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압력 때문에 일반적 발전의 고리에 묶여 중간 단계 전부를 건너뛴다. 더욱이 확고히 정착된 사회적 형태와 전통이 없기 때문에 후진국은 최소한 어느 한도 내에서 국제 기술과 사상의 최신 성과를 지극히 환영하면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때문에 후진성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 발전 전체는 모순적이고 결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적 극단이 후진국의 사회구조를 지배한다. 후진 농민과 선진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중간 부위를 대신한다. 한 계급의 임무는 다른 계급의 어깨에 전가된다. 민족 문제에서도 중세의 잔재를 뿌리뽑는 임무는 노동계급에게 맡겨진다.

물론 정치적 실천은 정치 이론보다 훨씬 원시적이었다. 왜냐하면 사물은 사상보다 변화시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은 실제 활동의 요구들을 명확하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민족 해방과 문화 발전을 성취하기 위해 피억압 민족들은 자기 운명을 노동계급의 운명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 민족의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결별해야했다. 이들은 역사 발전의 길에서 크게 도약해야 했다.

민족운동을 혁명의 기본 과정인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투쟁에 종속시키는 임무는 즉시 성취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임무는 여러 단계에 걸쳐 각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케렌스키, 전쟁, 러시아 동화 정책 등에 적대적이었던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타타르의 노동자, 농민, 병사들은 화해주의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이 임무를 통해 노동계급 봉기의 동맹자가 되었다. 볼세비키당의 객관적 지지 세력이었던 이들은 나중 단계에서는 의식적으로 볼세비키당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핀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더 미약하게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운동의 계층 분화는 10월까지 급격히 날카로운 형태를 띠었다. 이 때문에 외국 군대의 개입만이 노동계급 혁명의 성공을 막을 수 있었다. 민족적 각성이 좀더 원시적이었던 동방 아시아에서 민족 운동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노동계급의 지도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야 이것이 가능했다. 이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과정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결론은 명백하다: 농민 뿐 아니라 민족의 물살이 10월 혁명의 수로로 쇄도하고 있었다.

대중은 정치적 농업적 민족적 해방과 농노제의 철폐 등 가장 기본적인 임무로부터 노동계급 독재의 구호로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저항할 수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이 현상은 자유주의자들과 화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참주선동", 미리 계획된 틀, 연속혁명의 이론으로부터가 아니라 러시아의 사회구조 그리고 전 세계적 상황에 의해 일어났다. 연속 혁명론은 이 운동 발전의 결합적 과정을 정식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러시아에만 일어나지 않았다. 뒤늦은 민족해방 혁명이 노동계급 혁명에 종속되는 현상은 전 세계에 관철되는 법을 따른다. 19세기에 전쟁과 혁명의 근본문제는 생산력에게 국내 시장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20세기의 문제는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되는 일국적 한계로부터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역사의 거시적 의미에서 동방의 민족 혁명은 노동계급 세계혁명의 단계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민족 운동들 역시 소비에트 독재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짜르 러시아와 전 세계 피억압 민족들의 발전에 내재하는 혁명 역량을 레닌은 경탄할만한 깊이로 평가했다. 일본은 노예화를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했다. 중국은 해방을 목적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이 두 현상을 똑같은 정도로 "비난하는" 위선적인 "평화주의"는 레닌의 경멸을 샀을 뿐이었다. 제국주의 억압 전쟁과 대조되는 민족 해방 전쟁은 레닌에게 일국 혁명의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국 혁명은 국제 노동계급의 해방투쟁에 필연적인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국 차원의 전쟁과 혁명을 평가하더라도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과 무관하다. 이와 반대로 후진국 부르주아 계급은 젖니 때부터 외국 자본의 하수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외국자본을 시기하고 증오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외국자본의 편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국의 매판자본은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이고 국민당은 매판자본의 전형적 정당이다. 지식인 집단을 비롯해 소부르주아 상층부는 민족해방 투쟁에서 적극적이며 때로는 매우 큰 소리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적 역할을 할 능력은 조금도 없다. 오직 인민의 선두에 선 노동계급만이 민족 혁명이나 농업 혁명을 철저히 완수할 수 있다.

레닌주의의 아류들 그리고 특히 스탈린은 피억압 민족 투쟁의 진보적 역사적 의의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으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임무를 도출했다. 이것이 이들의 치명적인 오류이다. 이들은 제국주의 시대 혁명의 연속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역사발전을 현학적으로 도식화했다. 또한 살아 움직이는 결합발전 과정을 난도질하여 시간에 의해 필연적으로 분리된 죽은 단계로 만들었다. 이 모든 오류를 통해 스탈린은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독재"를 저속하게 이상화시켰다. 현실에서 이것은 제국주의 독재나 노동계급의 독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스탈린 일당은 이 오류의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면서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완전히 결별한 채 중국 혁명을 재앙으로 몰고 갔다.                                  

1927년 8월 좌익반대파(트로츠키, 라코프스키, 기타 인물들)에 대항하여 스탈린은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혁명은 나름의 특색이 있다; 이곳에서 부르주아 계급은...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반혁명적이다....식민지와 종속국의 혁명은 또 다르다...; 이곳에서 민족 부르주아 계급은 특정 단계와 날짜에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자국의 혁명운동을 지지할 수 있다."

오직 자신감의 결여 때문에 여담과 완화된 표현을 첨가했을 뿐 그는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에게 1917년 3월 그가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에게 부여했던 같은 특징을 부여한다. 스탈린의 기회주의는 자신의 깊이 타고난 본성에 복종한다. 따라서 어떤 중력 법칙으로 강제된 것처럼 자기의 길을 찾아서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이론적 주장을 하기 위해 선택하는 내용들은 순전히 우연적이다.

그는 임시정부에 대해 1917년 3월 평가한 내용을 중국의 "민족" 정부에 그대로 이전시켰다. 이렇게 해서 그는 3년 간 국민당과 협력했다. 이것은 현대 역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초래한 정책이었다. 중국 부르주아 계급의 충직한 심부름꾼이 되어 아류들의 볼세비키주의는 상해 노동자들이 유혈 낭자하게 도살되는 1927년 4월 11일까지 이들을 뒤따라갔다. 스탈린은 장개석과 자신의 동지 관계를 이렇게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좌익 반대파의 근본적 오류는 이것이다: 타민족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국가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을 피억압 국가 중국에서 일어난 혁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을 "타민족들을 억압하는" 나라의 관점이 아니라 중국인만큼 억압을 당한 러시아 내부 "타민족들"의 경험을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에게도 놀라울 정도로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

세 차례의 혁명을 통해 러시아는 거대한 경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 투쟁과 계급투쟁의 모든 변종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이 자기 민족을 해방시킨 경우는 없었다. 정치적 색깔과 무관하게 러시아 변방의 부르주아 계급은 발전 단계마다 러시아 자본 전체의 도구인 중앙은행, 트러스트, 상업 기관들에 종속되었다. 이 기관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러시아 동화 운동에 종속시켰으며 광범위한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 지식인 집단을 부르주아 계급에 종속시켰다. 변방의 부르주아 계급은 "성숙"해질수록 전반적인 국가기구에 그만큼 더 강하게 결박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과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과의 관계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제국주의 금융자본과 맺은 관계와 같았다. 적대와 종속의 위계질서가 복잡했지만 이 세 부르주아 계급들은 봉기 대중에 대항하는 데에 있어서는 단 하루도 근본적인 연대를 중지한 적이 없었다.  

반혁명 시기(1907년 ~ 1917년)에 민족 운동의 지도부는 토착 부르주아 계급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들은 러시아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솔직하게 짜르 체제와 실무적으로 합의를 추구했다. 폴란드, 발트해 국가, 타타르, 우크라이나, 유태인 부르주아 계급들은 서로 경쟁하여 제국주의적 애국주의를 과시했다. 2월 혁명 후 이들은 입헌민주당의 등뒤에 숨었다. 또는 입헌민주당처럼 자기 민족 화해주의자들의 등뒤에 숨었다. 변방의 부르주아 계급은 1917년 가을에 민족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진하고 있는 노동계급 혁명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분리 독립의 길을 걸었다. 결산하면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은 대러시아 부르주아 계급만큼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3개 러시아 혁명들의 거대한 역사적 교훈은 이 사건들에 참여했던 다수의 사람들 특히 스탈린의 의식 속에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식민지 국가의 역관계에 대한 화해주의 즉 소부르주아적 사고는 1925년-1927년 중국 혁명을 살해했다. 그런데 이 사고는 레닌주의 아류들에 의해 코민테른 강령에 포함되었고 이 강령은 동방 피억압 민족들에게 족쇄가 되었을 뿐이었다.

 

레닌의 민족 정책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대조의 방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볼세비키주의는 민족해방 혁명이 앞으로 몇 십 년에 걸쳐 계속 폭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선진노동자들을 이 예상에 입각하여 교육시켰다. 반면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정책에 복종하듯이 적응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0개 민족들에게 강제적으로 동동한 시민권을 부여했을 때 이를 옹호했다. 동시에 이 민족들의 노동자들을 혁명적으로 단결시킬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당과 노동조합 안에 칸막이를 쳐서 이들을 분열시켰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교육받은 관리였던 카알 레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규칙을 부활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을 탐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망한 후에도 이 제국의 이론가가 되었다. 이 제국이 붕괴했을 때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시 자신의 지배를 받는 자치국가 연방의 깃발을 들어 올리려했다. 왕정의 틀 속에서 평화로운 발전을 추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공식 강령은 이제 곧바로 왕정의 강령이 되었다. 이것은 4년 간 전쟁의 유혈과 오물로 뒤덮였으나 10개 민족을 하나로 묶었던 녹슨 굴렁쇠는 산산조각이 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수술 때문에 그 내부에 원심력이 강화되면서 해체되었다. 새로운 국가들이 수립되고 오래된 국가들은 재건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인들은 심연을 사이에 두고 독일과 분리되었다. 다른 민족들을 계속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이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의 문제는 단지 외국의 지배를 면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를 대표하여 오토 바우어는 민족 자치의 정식을 제시할 적절한 순간이 이때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와 지배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해 노동계급의 투쟁을 고무시켰을 이 강령은 이제 해방된 슬라브 민족들로부터 위험에 처한 민족을 보존하는 도구로 도입되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주의 강령은 눈 깜짝할 순간에 물 속에 가라앉고 있는 왕정이 잡으려는 지푸라기가 되었다. 이와 똑같이 민족 자결의 정식은 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거세되어 독일 부르주아 계급에게 구원의 닻이 되었다.

1918년 10월 3일 사태를 변화시킬 힘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인식한 의회의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은 너그럽게 구 제국의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했다". 10월 4일 부르주아 정당들 역시 자결권을 채택했다. 이렇게 하여 오스트리아-독일 부르주아 계급을 하루 앞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즉시 대기 정책을 재개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 지 그리고 윌슨이 무슨 말을 할지 아직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오토 바우어의 말에 의하면 10월 13일에 군대와 왕정이 확정적으로 붕괴되고 "우리의 민족 문제 강령이 원래 의도했던 혁명적 상황"이 발생하고 나서야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은 자결권 문제를 실제적인 형태로 제기했다. 진짜 이들은 이제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우어는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설명한다: "타민족들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자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역사적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실 타민족을 지배하는 대의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자발적으로 독일 조국과 분리했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강령은 피억압 민족들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억압자들에게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포되었다. 역사적으로 어려운 지경으로 내몰린 유산계급들은 법적으로 민족 혁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이것을 이론적으로 적법화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성숙하며 시기 적절하고 역사적으로 이미 준비된 혁명이었다. 어쨌든 모든 것은 끝났다. 사회민주주의 정신은 여기서 마치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사회혁명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지배계급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연기되고 손상되고 광채가 박탈되어야 했다. 제국이 가장 약한 부분 즉 민족의 틈을 따라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토 바우어는 혁명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것은 결코 사회혁명이 아니고 민족 혁명이었다." 실제로 운동은 처음부터 깊은 사회 혁명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의 "순수하게 민족적인" 성격은 다음의 사실에 의해서 아주 잘 설명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유산계급들은 공개적으로 연합국들을 초대하여 제국 군대 전체를 포로로 잡도록 했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이탈리아 장군에게 간청하여 이탈리아군이 비인을 점령하게 했다!

혁명 과정에서 사회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으로부터 저속하게 그리고 현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이 혁명들을 독립적인 역사 단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오토 바우어가 스탈린에게 얼마나 근접하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의 목적은 사회혁명의 위험에 대항하여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계급과 협력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었다.

혁명이 역사 발전의 기관차라는 맑스의 말을 인정한다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역사 발전의 제동장치이다. 왕정이 실제로 붕괴한 후에도 정부에 참여할 것을 촉구 받은 사회민주주의는 구 합스부르크 내각과 단절할 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민족" 혁명은 구 장관들을 국가 비서들로 보강시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시켰다. 독일 혁명이 호언쫄런 왕가를 타도한 10월 9일이 되어서야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무회의에게 공화국을 선포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대중운동을 수단으로 부르주아 파트너들을 위협하여 이들이 공화국 정부에 참여하도록 강제했다. 물론 대중운동이 두려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뼈 속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분별 없는 아이러니로 오토 바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11월 9일과 10일에 여전히 왕정을 지지했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11월 11일 저항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흑백인조 왕정의 당보다 꽉 채워서 무려 이틀이나 앞서 있었다! 인류의 모든 영웅적 전설들도 이 혁명적 대담성 앞에서는 빛을 바랜다.

자기의 의지와는 반대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의 시작부터 자동적으로 인민의 선두에 섰다. 러시아의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처지와 똑같았다. 또한 러시아의 사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무엇보다도 정권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연립정부에서 이들은 가능한 장관직을 적게 맡으려고 했다. 오토 바우어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처음부터 정부에 적게 참여하겠다고 요구한 것은 혁명의 순수히 민족적인 성격에 주로 조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권력의 문제는 실제 역관계, 혁명운동의 위력, 지배계급들의 파산, 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일부 똑똑한 체하는 분류자들이 붙인 현학적인 조그만 명찰  즉 "순수히 민족적인 혁명"에 의해 결정되었다.                 

카알 레너는 국무회의의 수석 서기가 되어 혁명의 폭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장관들의 조수인 차관으로 전환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사무실 탁자 밑으로 숨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보관하고 있던 혁명의 민족적 껍질을 먹는 것에 대중은 만족하지 않았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부르주아 장관들을 밀쳐내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피신처에서 나오도록 강제했다. 대체할 수 없는 이론가 오토 바우어는 이것을 또한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 며칠 간의 사건들이 민족 혁명을 사회혁명 쪽으로 밀치고 있었다. 오직 이것 때문에 정부에서 우리의 비중이 커졌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대중의 공세에 직면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탁자 밑에서 기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능은 단 한순간도 바뀌지 않았다.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낭만주의 및 모험주의에 대해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정부에서 자신들의 비중을 증대시킨" 사회혁명에게 이 아첨꾼들은 낭만주의 또는 모험주의의 딱지를 붙였다. 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은 1918년에 비인의 크레디트안슈탈트(신용대부기관)의 수호 천사가 되어 노동계급의 혁명적 낭만주의로부터 이것을 방어하는 역사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들의 시도를 가로막는 진정한 혁명정당이 장애물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태는 이렇게 흘러갔다.

다민족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의 최근 운명을 통해 볼세비키주의와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차이점을 확실히 부각시켰다. 15년 동안 레닌은 대러시아 국수주의의 모든 정치적 색조들에 비타협적으로 대항하면서 모든 피억압 민족들이 짜르의 제국으로부터 결별할 권리를 설교했다. 그러자 볼세비키당이 러시아의 분할을 꿈꾸고 있다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민족 문제에 대한 이 대담한 혁명적 정식은 짜르 러시아의 피억압 소수민족들의 파괴할 수 없는 신뢰를 볼세비키당에게 가져다주었다. 1917년 4월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한 것을 보면 우크라이나인들은 분리 독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류코프의 공화국을 수립한 것을 보면 이들은 분리 독립할 것이다." 그의 예언은 이후의 사태에 의해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었다. 역사는 민족 문제에 대한 두 정책을 아주 뛰어나게 비교했다. 비겁하고 어정쩡한 정책의 정신으로 교육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노동계급은 막강한 격동 앞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더욱이 이 과정의 주도력은 사회민주주의 제 2 인터내셔널의 지부들이 주로 맡았다. 그러나 짜르 체제의 잔해를 딛고 러시아에서는 민족들로 구성된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었고 볼세비키당에 의해 경제적이고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소련은 아직도 조용한 피난처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이후 운명이 어떻든 레닌의 민족 정책은 인류의 영원한 보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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