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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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trauss
1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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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헬조선닷컴의 여러 회원들과 며칠간 키배를 한 결과로 떠 오른 반도 삼국의 기원에 대한 가설임. 지금까지 읽은 책과 인터넷상의 글들을 거의 기억과 인상에만 의존해 쓴 글로, 사료적 증거가 아닌 논리적 개연성을 우선으로 쓴 것이다. 부디 진지하지 않게 그저 재미로만 읽어 주기 바람.


나는 AD 0년 전후의 반도와 만주지역의 인류집단들을 기술함에 있어 우열이나 우리민족, 이민족적 관점을 배제하고, 당시를 살았던 인류들이라는 관점으로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데, 나는 일단 한국의 인종주의적 국뽕들의 저열함을 경멸하며, 내 가계의 족보에 의하면 나의 조상은 9세기 말에나 당에서 통일신라로 입국한 외노자인지라 하등 반도의 특정 인류에 대해 호불호나 이해관계를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임을 고려해 줬으면 함.

 

삼국이 건국되기 전의 한반도 내에는 중북부의 중국 식민지 영역이었던 지역을 제외하면, 반도 대부분 지역은 중국식의 전제적 관료국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기원전 2세기 전후까지도 한반도 남부는 지정학적으로 고립으로 대륙으로 부터 간섭의 여지가 적고, 중국 대륙쪽에서도 춘추전국->진->초,한으로 지들끼리도 싸우기 바빴을 시절이니, 크게 관심도 없었을 듯 하다는 이유로, 국가규모의 무력에 대응할 국가 시스템이란 게 존재해야 할 유인이 적었다고 보기 때문. 어쨌든 중국에서 반도에 최초로 관심을 갖는 공식기록은 진시황의 장생불사약이 저기 바다 건너 동쪽에 있다던데 정도가 아닌가 싶고, 한사군 설치에 의한 식민지 역시 반도의 문화에 미친 영향은 컸지만, 고구려의 등장으로 중국의 직접 영향권에서는 일찌감치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반도에서 자생적인 대중 약탈적 국가 시스템의 성립이 늦은 이유를 설명하기엔 불충분하다. 인간의 본능적 폭력성과 권력에 대한 욕구는 위협적인 외부세력의 존재 없이도 권력집단을 만드는 충분한 요인이기 때문에. 반도 사람들의 성격이 유순하다느니, 동방예의지국이라, 군자의 나라라서, 그런 이딴 소리는 개소리고, 아마도 반도의 특성상 농경 자체가 그리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는 서남해안의 엄청난 길이의 해안선 덕분에 해안에서 어로 (한반도 근해에서는 이미 8천년 전에 통나무배를 제작하여 고래사냥까지 했었고, 일본열도를 오갔을 가능성도 높다고) 및 해산물 채취, 간소한 농경, 인근 산에서의 식물성 식량 채취만으로도 먹고 사는데 그리 문제가 없어 한반도의 신석기 혁명은 농업혁명을 동반하지 않았다고 하니, 중국처럼 농업이 발전하고, 그로 인한 잉여생산물이 생길 여지가 없어, 어떤 집단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수탈할 잉여 생산물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부족국가 정도인데, 수천~수만명 단위의 부족 들이 반도의 해안을 위주로 하천, 산악, 평야등의 다양한 지형에서 다양한 생산활동을 영위 했을 것이고, 이로 인해 문화, 언어, 생활양식도 따라 매우 다양했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식량과 생필품들은 부족내 자급자족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부족들이 중국측 사료에 등장하는 마한 몇십개국, 진한, 변한 몇십개국일지도 모르겠음. 당시의 國이라는 건 현대의 정부 시스템을 가진 국가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고 단순히 원뜻대로 지경,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1. 가장 다수 세력을 고한국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반도의 원주민들이라고 가정해 보고, 이들은 주로 해안가 채집과 텃밭수준의 농작물로 먹고 살았다고 해 보고, 이들을 해안정주민이라 해보자.


물론 이 원주민의라는 개념은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살아 왔다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이 기술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정확히 누구이고, 어디서 온 건지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정도로 한반도에서 살아 왔다는 정도의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인류는 약 20만년전의 아프리카의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그동안 삶이 근거지를 이동하지 않은 인류는 거의 없으며, 한반도는 일본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보면 이동의 동쪽 한계 지역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이 지역에 불과 3-4만년전에 유입기 시작하였고, 짧은 기간이나마 반도의 호모 에렉투스와도 구석기 시대를 함께 살았을 것이다.


2. 황해와 동지나해를 중심으로 대륙 동해안과 동남아를 넘나들던 뱃놈들도 전라, 충청에 꽤 있었을 것이다. 배를 잘 다루고, 어로를 잘 했겠지. 이들을 황해해양세력이라 하자, 이들의 주요생업은 원양어업, 국제무역, 해적질이었을 것이다,


3. 남해안을 따라 일본어와 제주어 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얘네들은 류쿠열도나 일본열도를 넘나드는 뱃놈들일 가능성이 높았겠지. 이들을 남방해양세력이라고 하자.


나는 이들 위의 2,3번의 세력들 중 다수가 '왜'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고 믿는다, 반도와 열도, 대륙사이의 바다와 해안가를 삶의 무대로 하는 해양유목민이라 할 이들이 반도인인가 일본인인가 대륙인인가 하는 현대국가적 관점으로 속지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큰 강의 하구과 같이 물류가 원할한 해안지역이라면 반도, 열도, 대륙을 막론하고 삼안(三岸) 지역에 두루 세력권을 구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각 국가의 전제왕국화가 심해짐에 따라 이들은 자치권과 납세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고 따라서 정주왕조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향후 결국 이들의 최대이익을 따라 각자 반도, 열도, 대륙의 왕국에 편입되어 각국 해군무력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4. 도피, 피난, 기근 등의 다양한 이유로 유목민으로 살다가 반도로 진입해 반정주민화 된 부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진나라 통일기와 그 이후의 학정에 시달리다 망명한 유목민들을 포함한다. 이들 유목민들 중 일부는 내륙에서 목축을 생업으로 삼았을 것이고, 다른 일부는 2, 3번의 일종의 해양유목민이라 할 집단으로도 편입 되었을 것이고, 이후 반도의 열국이나 삼국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5.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와  진나라 통일기와 학정기 때 황해나 육로로 넘어 피난 온 한장어계통 중국인들이 반도 동해안과 내륙에서 살았을 것이다. 얘네들도 주로 농사와 채집으로 먹고 살았겠지만 결국 고향에서 먹고 산 방식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결국 반도 전역에 걸쳐 있었을 것.


6. 남해안과 전라, 충청 평야지대에는 동남아, 중국남부 지역 출신의 벼농사권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오스트로네시안어나 오월(오나라 월나라)어 계통을 썼겠지. 이들에 의해 반도에 벼농사와 남방계 고인돌 같은 게 보급되었을 지도 모르지.

7. 경기북부, 황해, 평남지역에는 한사군 설치에 따라 총독부 및 군인, 그리고 이주정책에 의해 이주 온 중국어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이들은 반도에 중국문물을 들여와 반도의 문화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한자어휘의 대량 유입으로 한국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부분은 낙랑과 함께 다시 설명할 것이다.

8. 풍부한 산악환경에서 낮은 구릉지대를 이용해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부족들도 있었을 듯 하다.


9. 아프리카나 뉴질랜드쪽의 미개한 지역들에 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하면 농경유목족이라 할만한 화전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언어계통은 상상도 안 간다.


언어적으로 크게 이런 카테고리라는 것이고 실제로는 부족마다 차이가 나는 수십 내지 수백개의 방언이 사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john 회원의 의견).


애초 중국 식민지로 시작한 낙랑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 감소에 따라 일시적으로 독립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400년간 중국 식민지로 존재하였고, 중국인 비율도 매우 높아 실질적으로는 중국지방정권으로 관료제가 갖추어진 국가시스템으로 봐야 할 듯 하다. 다른 부족연맹체들은 최소한 유목민들의 많은 부족의 족장급 회의기구인 코릴타와 비슷한 부족간 회의 및 최고족장선출 제도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삼한은 그 명칭이 후대에 붙여진 게 아니라면, 명칭의 조직성으로 추정해 보건대, 각한 내의 제부족내 회의와 더불어, 거기서 선출된 최고족장급 회의가 따로 있었을지도.


물론 초기부터 부족연맹체로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통은 주변 인근 부락과의 물자교환이나 혼인, 다툼이나 약탈 정도의 교류였을 것. 그러나 인구증가, 본격적 농업의 시작되고 잉여생산물이 나오기 시작해 부족간 부족내 분쟁이 증가하고,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국이 중앙권력으로 안정되면서 반도에 관심이 가지게 되고, 북방에서 무력집단들의 위협도 높아짐에 따라 반도의 부족들도 자위적 차원에서 국가적 규모의 안전보장 시스템이 절실했기 때문에,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가능한 많은 부족으로 교류의 범위를 넓혀 연합체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갔을 것.


글이 좀 길어지더라도 반도의 고대사를 재조명하는 큰 맥락에서 반도 원주민의 주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반도의 원주민들이 농경민이었을까와 당시의 반도문명의 미개성의 수준에 대한 논의로, 아래는 헬조선닷컴의 delingsvald, john, 리아트리스 회원들과의 토론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로 당시의 반도 원주민들이 농경정주민이 다수라는 설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데, 내 의견은 위의 1번에 해당하는 해안가 채취 및 간소한 밭농사, 주변 야산에서 도토리, 나물, 버섯 등을 채취를 하던 해안가 정주민이 다수이고, 2. 3번의 해양유목민인 '왜'족이 그 다음 다수를 차지한다고 본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3면이 바다인 반도는 생존을 위해 굳이 농경이 불필요했고, 이는 반도의 신석기혁명이 농업혁명을 동반하지 않는 사실로도 추론이 가능하다. 나의 외가가 서해안 바닷가인데, 현재는 주요 생업이 농업이지만 이는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이며, 지금도 생존만을 위해서라면 신석기 수준의 도구를 들고 갯벌만 나가도 식량의 절반 이상을 커버칠 수 있는 정도로 해산물이 풍부하다. 굳이 내륙으로 깊이 들어가 농사를 지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반도인들은 해양을 떠나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반도에서 농업이 활성화 되기 위한 조건으로 아래와 같은 조건들 중 최소한 한개 이상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1. 농사를 지어 줄 노예제도의 활성화
2. 농업생산물에 대한 국가의 강제할당적 수탈
3. 인구증가로 인해 해안가 어로와 채취만으로 생존이 어려워짐
4. 화폐경제가 활성화 되어 잉여생산물의 화폐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

john님의 의견 역시 맥락상으로는 근접한데, 아래는 john 님의 의견이다.


쌀농사보급에 관한 것은 세가지 이벤트가 있음. 금강문명(백제)성립(약 AD 470)이후에 동진으로부터의 문물수입, 다른 하나는 고려조때의 향, 소, 부곡이고, 마지막으로 조선세종대의 일임. 부곡은 분명히 쌀생산노예들의 행정구역이며, 쌀농사는 삼한보다는 고려, 조선조에 확실히 강제되었던 것 같음. 그 것은 정서적으로 군사정권이 어떤 식으로 농업을 프로파간다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조차 농업프로파간다를 펼치는 지를 감안하면 분명히 전대보다는 후대의 일로 반도의  쌀농사는 의외로 매우 늦게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

<http://hellkorea.com/more/925506 의 리플>


반도인들이 고리적부터 농경을 하였다는 선입견의 상당부분은 유교탈레반들의 농본주의적 사관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의 노비제도로 인해 국민 절반이상이 노비였고, 이들을 땅에 묶여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수탈의 효율성을 가장 높이며, 새로운 선진문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농사 외의 모든 산업을 억제해야 했던 조선조 지배층의 후진적 마인드의 결과로, 조선시대는 해금령을 통해 반도의 섬을 비우고, 어로조차 억제 하면서 근본이 해양족이던 반도인들을 철저히 농경민화 시켰던 것이다. (이조가 망하고, 일제를 거쳐 해방 후 주목할 만하게 성장한 한국산업분야 중 하나가 조선업으로 불과 수십년만에 해양제국 일본과 함께 1,2위를 다투게 된 것만 보아도 반도인들이 바다에 대한 적응력과 활용능력은 거의 본능적이며 억압되었던 거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물론 살인적인 노동착취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지만)


일설에는 반도 삼국이 반도내에서 지속적으로 충돌했던 근본원인이 황해, 남해와 동해의 제해권을 위한 다툼이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고구려-백제는 황해진출과 물류와 군수 이동의 핵심지역인 한강과 대동강을 놓고 각축전이었으며, 고구려와 신라는 일본으로 가는 해류를 타기 쉬운 강원지역을 놓고 각축을 벌였던 것으로, 이들이 농사 지을 땅 몇평 더 차지해 보겠다고 전쟁을 했다는 건 개연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제해권을 가진 쪽이 무역과 군사력을 장악하는 것은 오늘날의 미국이 해양이 투입하는 해군력의 규모를 보면 자명해 진다. 따라서 반도에서의 삼국의 패권다툼을 기존의 의미를 딱히 찾을 수 없는 영토분쟁이 아닌, 제해권분쟁의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할 것이며, 삼국 중 백제, 신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의 대반도정책의 기본은 해양지향정책으로 반도인들이 해양족이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반도에서는 노예의 증가나 전제권력에 강요, 또는 해양억제책이 시행되지 않는 한은 바다를 굳이 멀리하고,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으로 고대 반도의 원주민은 농경족이 아니라 해양족이라는 것이 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만 바다를 근거로 살아 간다고 해도 절대 다수의 주민들은 정주민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할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여기서 말하는 반도의 해양족은 해안정주민과 해양유목민을 모두 합친 개념이며,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반도에서 전제왕조의 성립이 늦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중국식 전제왕조 수립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농경기술의 발전이 대륙에 비해 매우 더뎠다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둘째로, 이 당시의 반도 원주민들의 미개성의 정도에 대해서인데, 당시 부족국가라고 하니 미개한 움집이나 동굴거주를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당시의 문명화는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위에서 언급한 해양유목민들에 의해 중국의 기술, 문화, 철기 등이 유입되었을 것이다.


반도의 철제 농기구는 기원전 3세기경에 이미 널리 보급 되었던 흔적이 있다. 물론 반도의 경우는 해양을 통해서가 아니라 북방의 대륙을 통해서도 전해졌을 수 있지만, 기원전 2세기 일본의 야요이 문명에도 철기가 전파 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반도-열도 또는 대륙-열도간 무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당시의 항해술은 상대적으로 항해가 쉬운 황해는 물론이고(반도 서해안에서 산동반도나 요녕반도는 거리상으로도 매우 가깝다), 일본까지도 해상무역이 가능한 정도의 수준으로 보여져, 반도의 원주민들의 문명화 수준을 추측해 볼수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을 기반으로, 우리는 반도의 고대사를 보는 관점 중,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로서 반도인은 농경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해양족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도쪽 판도가 대략 이렇고, 반도 북부는 대략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이들은 주로 양, 순록유목이나 산림지대에서 사냥하는 걸로 살아간 집단들이겠지.


1. 평안도, 요녕지역, 북만주 일대는 예족(=여진족, 조선족)이 분포했으며, 이들 중 요녕지역에는 조선이, 북만주지역에서는 그 보다는 뒤늦게 부여가 건국되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녕부근의 예족들은 농경과 해안가 어로, 채집경제였을 것이고, 북만주로 올라갈수록 유목적 성향이 강해지는 반농반목 경제권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2. 남만주, 반도북구의 압록강 중류 지역 역시 예족부락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곳의 예들은 서부저지 평야와 해안가 지형과는 달리 산악지역이며 동쪽의 말갈문화권과도 만나는 곳이라 말갈족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주로 고랭지 밭농사와 압록강 지류들을 이용한 어로와 채집경제권이었을 것으로, 이들이 나중에 고구려의 모태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3. 함경도와 연해주, 강원북부까지는 동예, 옥저 세력권이었는데, 이들은 서쪽의 예족과는 약간 다른 언어와 문화권 계통으로 초고대에는 숙신, 읍루 등으로 불렸다가 나중에는 말갈로 불리게 되는 농경과 수렵을 주생활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주생활을 하였지만 부족원들 중 일부는 계절에 따라 태백산맥과 장백산맥을 타고 이동하면서 사냥도 했을 것이다. 이들은 퉁구스어계통으로 보이지만 서만주, 요녕, 반도북구의 예족이 사용하는 부여어과 말이 통할 수 있는 정도였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산림, 산악족을 범칭하는 맥족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고 말갈의 어원이 이 맥족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4. 서만주쪽은 선비, 거란의 선조쯤 되는 애들로 보이는데, 중국사서에는 동호 집단으로 표기됨. 비정학적으로 흉노계와 퉁구스계가 만나는 지점이라 언어는 흉노어와 퉁구스어가 하이브리드 계통으로 나중에 거란어 정도 될 걸로 추정하며, 대체로 흉노세력권인 걸로 본다. 그 서쪽엔 당연히 유목민족 최초의 국가시스템이라는 흉노제국이 있었고. 흉노제국을 너머 더 서쪽으로 투르크, 스키타이계통이 있었겠지.


5. 현재의 외몽골, 내몽골, 알타이, 카자흐, 신장성, 감숙성, 사천성 지역은 흉노제국의 세력권으로  몽골계, 흉노계, 스키타이계, 투르크게 언어를 사용하는 실로 다양한 유목민 부족들의 생활터전이었을 것. 이들은 흉노 대칸을 의장으로 하는 정기 족장급회의가 있어 각 부족간 이동경로를 조정하고 정보교환 등을 했을 것이다.


6. 옥저보다 더 북쪽의 아이누(읍루) 계통의 집단은 오호츠크해를 중심으로 사할린 지역과 홋카이도를 넘나들던 집단으로 추정, 얘네들 중 북쪽애들이 에스키모라는 설도 있더라.


중요한 점은 내몽골을 중심으로 하는 흉노계와 만주계는 생활양식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흉노계는 극도로 건조한 기후로 인해 유목을 거의 전업으로 하던 사람들이었으나, 만주지역의 경우는 지역에 따라 북만주는 반농반목에 수렵, 남만주는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 채집을 위주로 하고, 흑룍강, 사할린쪽은 수렵이 대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요녕성에서 평북지역의 조선 세력권은 농업과 어로, 채집위주의 정주권 경제였을 것이다.

 

예맥에 대한 색다른 의견 중에는 만주-사할린에 걸쳐 분포하는 이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구체적으로 맥은 산지에서 농경, 수렵을 하며 너구리 모피를 입고, 때로는 주변지역과 곡물, 그릇 등과 교환도 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너구리라는 의미이고, 예는 저지대 펼야, 물가, 해안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수달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설이 있다<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 이 너구리족, 수달족이라는 명칭이 만주에서도 사용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쪽에서는 저 멀리 미개만주 지역민을 비칭하는 단어였을지도.

 

(고)조선을 좀 더 말하자면 나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기존학설대로 예(맥)족의 나라기도 하지만, 이들은 또한 후대의 여진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여진의 형성과정은 이러하다. 상대적으로 중국문명을 빨리 수할 수 있었던 요녕, 서만주의 예족(조선, 부여, 동부여, 동예, 옥저, 고구려)은 고조선 이후 지속적으로 반도와 동북만주로 밀렸으며, 퉁구스어계인 멕(말갈)족은 동예, 옥저, 고구려, 발해의 주요구성원으로 이들 국가를 거치며, 서로 융화되어 예족 맥족의 구분이 모호해져 갔고, 발해 멸망 후 동만주와 사할린 쪽에서 요와 고려의 압제를 받으며 (또는 백두산의 폭발로 인해 도저히 국가가 건국될 여지가 없어) 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관리되던 발해유민 집단이 역사에서 여진족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요녕, 만주지역에서 사용하던 예맥어(=부여어)는 사할린 지역의 퉁구스어와 동계일 가능성이 있다. 몽골어와 투르크어간 친연성에 비해 몽골과 퉁구스어의 친연성이 상당히 떨어지게 된 잃어버린 고리가 바로 이 예맥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후에 부여어는 고구려 당시 낙랑군, 중국계 망명객과 포로 등으로 인해 중국어집단의 대량 유입으로 중국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후에 반도로 남진하면서 삼한계 언어와도 융합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현대 한국어의 기원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추측하자면 반도에서의 부여어족은 통일신라시대 때 삼한어와 본격적으로 융합되어 현대 한국어족을 형성하면서 소멸하였고, 만주에서는 발해 때 퉁구스어족인 말갈의 흥기로 인해, 발해 때 퉁구스어와 융화되며 만주어(여진어)족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사멸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여진이거나, 여진의 한 부족으로 본다. 물론 당시 사서에 의하면 이들은 여진이 아니라 '예'라고 불렸으나, 예맥족이라 하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 글에선 반도인과의 분리감을 강조하기 위해 계속 여진이라 칭한다. 물론 예족은 고구려인으로서 삼한에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며, 백제건국과도 관련되어 있고, 현대 한국어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현대를 사는 반도인에게 예족이 직접 조상이라거나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한민족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이며 무리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 전까지는 조선은 중국식 왕국이 아닌 연나라와 국경을 접한 요녕성에 정주민국가들과의 외교, 군사적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부족연맹체국가급 집단이었다고 본다. 요녕성의 조선은 각 부족들의 위임을 받은 외교권을 가지고 있었고, 유사시 유목, 수렵 여진들의 군사력 - 각 부족 내의 기마술과 궁술에 능한 청장년 예비군들과 말들 - 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은 단체라고 생각하면 무방할 듯 하고, 만주지역의 농업, 수렵, 유목민 부족들의 의회이자 대중국 외교대표부 정도로 보면 되지 않나 싶음.


이렇게 써 놓으니 조선이 민주주의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비슷했다. 유목민들은 코릴타라는 신라 화백제도 같은 부족장급 회의가 있어서  정기적으로 모여 부족간 분쟁조율, 정보교환, 예비군 차출 할당 그리고 필요시 대칸을 뽑기도 한다. 칭기스칸도 그런 식으로 대칸이 된 거(전술했듯 나는 전제왕국의 성립 전단계인 반도의 부족연맹체들도 이러한 시스템이 있을 거라 추정한다). 만주지역은 농업, 유목, 수렵민들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이었고, 부족국가 단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회의시스템이 존재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가 약화되었을 때, 연나라 접경에서 조선부족장이 조선왕이라 자칭하고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했다는 기록이 있음. 아마 연에서 피난 오거나 조선에서 스카웃한 연의 관료들 작품인 듯. 이 때에 유목부족수장제에서 세습체제의 왕국으로 전환 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무력적인 측면은 여전히 유목, 수렵계 사람들에게 의존했을 가능성 높고, 자체적인 상비군도 마련했겠지.


사실 이런 대칸이 선출된 부족이 세습적인 왕조형태로 변하는 것은 일견 시대 흐름이었다고 보이는데, 대칸이 나온 부족으로 인물, 재화, 정보가 집중될 수 밖에 없어, 그 부족이 그들과 연합한 다른 부족들에게 현저한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대칸의 자식들이나 그 부족내에서 차기 대칸이 코릴타에서 선출(이라 쓰고 승인이라 읽으면 된다) 될 수 밖에 없기 때문. 특히 정주민으로 부터 약탈하거나 조공을 받은 재화가 많을 수록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북방유목민들에 대한 명칭이 시대에 따라서 다양하게 새로 생기는 이유가 대칸이 세습 되다시피하는 유력한 부족명이 세력권내의 유목민 부족들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바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주민의 국가명이 바뀌는 것 같은 효과라는 거지.


그러나 그렇게 까불던 조선은 다음 세기에 연나라 장군 진개에게 완전히 털려서, 요녕성에서 기록상으로는 2천리를 밀려나게 되는데, 이 조선대이동은 게르만대이동과 비슷한 결과를 만주, 사할린, 한반도 일대에 초래하게 되어, 그간 뚜렷한 정치체제가 부재하던 이들 지역에 열국시대의 태동을 알리는 군장연맹국가들의 탄생을 촉발 시킨다. 조선은 그 중심세력지가 압록강 하류와 평안, 황해도까지 밀렸고, 이들 중 일부가 반도 동부해안에서 산악지역의 말갈(맥)족을 규합해 동예와 옥저를 탄생 시킨다.

 

만주북부로 쫒긴 조선세력들은 만주북부의 유목지역으로 이동해 농경법을 도입시킴으로써 반농반목 지역으로 변모 시키는데 기여를 하였을 것였고, 이로 인해 증가한 농업생산성은 기원전 200년경 위만조선의 건국 무렵에는 제부족들을 통폐합된 4부족이 왕을 선출해 부여를 건국하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조선은 기록상으로는 기원전 200년경 준왕 때 연나라 위만에게 왕위가 인수되고, 위만에 의해 연나라에게 점령 당했던 요녕지역의 일부를 수복하였으나, 위만의 손자 3대 우거왕 때 폭망해 기원전 108년 조선이라는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 일설엔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준왕 일당이 반도 반도 남부로 망명해 일군의 탈조선명망세력이 되어 삼한 정치체제 구축에 일조하며 수십개 부족국가였던 삼한지역에 연맹의 씨앗을 뿌렸다더라.


내가 추론하는 조선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몽골지역에서 춘추전국, 진한과 대립하던 유목민족이 흉노부족을 중심으로 흉노제국이라는 유목민 의회 및 대정주민 외교대표부 성격의 시스템을 만들었 듯, 조선은 쥬선 부족을 중심으로 만주지역민을 대표하는 시스템이었다고. 또한 흉노와 조선의 관계는 조선왕이 흉노좌현왕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대체로 흉노의 영향력 아래에서 협력관계 였을 것으로 본다.


다시 돌아와 조선에 대해 쓰면서도 과연 조선이 이렇게 특별히 다뤄져야 하는지도 의심스럽긴 하다. 조선이라는 존재는 한반도, 특히 남한지역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지만 3세기에 쓰여진 위략에서 반도3국이 조선의 후예라 한 걸 보면, 삼국이 그렇게 자칭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지는 것 뿐.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조선대이동이 읍락, 성읍부족국가였던 이 지역에서 삼한을 포함한 연맹국가를 태동시키는 계기였다고 보면, 조선이 특별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바로 이러한 조선의 성격이 고려애들이 단군신화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대충 북방계의 탱그리신화를 가져다 단군이 조선을 건국했다고 주작한 가장 중요한 이유일지도.


종합적으로 보면 당시 북쪽은 크게 만주쪽의 농경, 채집, 사냥, 유목 등의 복합경제권인 부여-퉁구스어족 여진(예맥)계와, 내몽골 지역의 유목경제권인 흉노계가 주축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제 대충 삼국의 시작을 추적해 보자. 미리 말해 둘 건 난 삼국역사 잼병임. 내 역사에 대한 관심사는 고대한반도 상황이랑 삼국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를 나이브하게 추론하는 정도임. 국가성립 이후야 대략 권력기구에 의한 전쟁과 대중수탈의 뻔한 기록들인데 딱히 내 흥미를 끌지 못하더라.

 

고구려의 근간세력은 압록강 유역의 예족부락(那郡: 상고시대 나는 래로도 발음되어 사료의 압록강나군은 압록가의 예군인 것으로 추정)들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사서에는 압록강변 산악과 장백산맥의 산악민을 맥족이라고 지칭한 듯. 이들은 한사군 대방군, 낙랑군과 세력다툼 속에서 성장한하는 와중에, 추모, 주몽이라 알려진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들이 남하하다가 이들과 연합한 것으로 보인다.

 

신화에 의하면 주몽은 동부여에서 나와 졸본에 이르러 졸본부여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압록강 중류지역의 예족부락들에는 흉노계 기마무력 세력이 존재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고구려의 초기 무덤 양식이 유목민들의 적석총이 베이스라, 부여의 무덤양식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초기의 고구려는 산지에서 농경과 수렵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또한 고구려의 초중기는 예족계들과 중국계가 군사무력의 주축이었으나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기마무력을 말갈 7부쪽에 의존이 심해지는 걸로 보임.


연개소문이 대대로라는 직함인데, 귀족들이 선출하는, 기본적으로 지방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말갈7부의 수장이라는 설이 있기도 함. 고구려 후기에는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게 되고, 나중에 이들 세력을 주축으로 발해, 고려, 금나라가 건국됨.
 
신라도 마찬가지지만 반도원주민들을 비롯해 기존의 반도쪽의 다양한 집단들은 뭐 잘해야 지방유지 정도고 대부분 밥셔틀 정도 아니었을까 싶다.
 
여담으로 청나라에서 황명으로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과 국가들을 집대성한 만주원류고라는 책을 냈는데, 여진 국뽕 사관이라 사료적 가치는 별로라고 하고, 암튼 별의 별 종족이 등장하는데, (고)조선과 고구려만 없어. 추정에는 고구려 초중반이 여진족 흑역사인데, 당시 꼬봉 조선이 있었고, 이전 왕조 고려가 고구려를 연상 시키므로 꿀리기 싫어서라는 설이 있다. 이걸 보면 여진족은 맥족을 동류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신라의 지배층은 4세기 흘해이사금까지는 남방해양세력과 이미 진한지역에 진입해 있던 스키타이계 부족이 진한 지역의 부족연맹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5세기 내물마리칸 이후로는 이전 스키타이계와는 다른 스키타이계 부족인 것 같음 (이건 석씨를 남방해양세력으로 보고, 박씨를 선주 스키타이계, 김씨를 1세기경 남하한 후기 스키타이계로 상정한 것).


신라는 대체로 관직명부터 시작해, 골품제도나 편두, 황금공예 등 문화적으로 서구의 스키타이족과 색이 비슷함. 스키타이랑 흉노 문화도 비슷하다는데, 내 보기엔 스키타이와 신라도 덜하지 않어. 사실 유목민의 특성상 존나게 돌아 다니는 애들이라 싸우다 복속되고, 연합하고, 멀리 가서 또 만나고 그러는 동안 광대한 유라시아 벌판이라도 문화적 동질성은 당연히 있겠지만. 또는 스키타이를 들먹일 것도 없이 흉노계라고 해도 될 듯한데 흉노의 서쪽 세력권은 어차피 스키타이계들의 활동영역과 같기 때문. 이러한 사실로 시조 거서간(게세르칸)의 경우 실존여부가 의심되는데, 왜냐하면 6세기 지증왕을 필두로 전제왕조를 성립한 흉노계 지배층에 의해 유목민들의 전설적 영웅인 게세르라는 이름으로 가공의 시조로 주작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할 수 있다.


말이 좀 새지만 신라 김유신의 관직명이 또한 대카칸(대각간)이고 통일 후 태를 덧붙여 태대카칸 (태대각간)이라 불렸는데, 신라왕조의 권력서열 2위의 명칭이 여전히 유목계의 족장명칭인 카칸인 걸 볼 수 있다. 신라 초기의 수장들 역시 대체로 시조 거서간(게세르칸, 게세르는 북방계 전설적 영웅의 이름), 마립간(마리칸) 또는 이사금(이건 나도 모르겠다지만 8대왕은 아달라 이사금인데, 아달라는 아틸라)이었다가 지증왕정도 부터 왕으로 호칭되기 시작하여 칸이 왕 다음으로 한단계 격하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스키타이나 흉노 직계인지는 나도 모르겠고, 그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한 가지 가설은 스키타이 중 일부가 흉노제국 서부권에서 생활하다가 언어도 투르크계통으로 바뀐 후, 어떤 계기로 몇개 부족이 기원전 부터 꾸준히 순차적으로 동진하여 여진족 루트인 장백산맥, 태백산맥을 타고 남하해 경상, 강원지역, 즉 진한지역의 부족들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설명으로 김해김씨, 경주김씨, 박씨들의 선조 일족이 사천성, 감숙성에서 반도로 이주 왔다고 하면 그리 실감이 나지 않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의 직계 조상을 추적해 보면, 저 김,박씨들의 조상보다도 더 서쪽 지역의 유목민으로 귀착 된다. 거기서 태어난 내 직계 조상은 일단의 무리들과 기원전 11세기 은주교체기 때 전란에 말려 들어 중국 동부 해안에 정착하였다가, 9세기말 당조의 탄압을 피해 뱃길로 통일신라 말기의 평안도에 이르게 되고, 반도에서 내 씨족의 도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이런 스키타이나 흉노왕족에 대한 지나친 계승의식이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나 경주외 지역민에 대한 무차별적 차별의 근원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백제나 고려가 이런 신분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차별의 정도는 좀 더 약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라, 나로서는 신라 지배층의 성향이 다른 나라와는 구분되는 특징이 이 특수한 계승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내 성씨 뿐 아니라 반도내 중국 기원 성씨들의 유래 중에서 비슷한 사례가 드물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다만 내 조상들은 중국의 기록에 남을 사건을 거쳐, 9세기에 이르러 반도로 이주해, 상대적으로 문서화가 잘 되어 있다는 점에서 추적하기가 쉬울 뿐 (물론 내 성씨는 물론 반도인의 대부분의 성씨는 구한말, 일제에 성을 얻고, 족보가 주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반도의 개개인에게는 실제 혈통적으로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각 성씨들이 주장하는 자기 성씨의 유래들만을 따져 본다면' 이라는 전제이다).


신라가 반도의 각 지역 제부족들을 복속 시킨 과정을 좀 상상해 보면, 전술했듯 반도 부족들도 족장급회의도 있었을 것이고, 부족마다 자위권을 위한 일정수준의 무력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 외부세력이 기마술과 철기를 가진 비대칭전력 세력으로 본다면 부족회의에서 데몬스트레이션 내지 몇개 부족에게 실제 무력행사만으로도 족장급회의를 장악하거나 유력한 부족이 되는데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엔 연맹의 형태로 유력 부족장이나 최고족장 중 하나로 시작했다가 5세기부터 이 부족들 중 한 부족인 김씨 부족이 본격적인 두각을 내타내며 최고부족장의 반열에 오르고, 결국 이 부족을 중심으로 신라라는 본격적인 전제왕조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보는 게 개연성이 높은 듯.


신라의 사례에서 흉노계가 이후 전제왕국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신라가 이민족 지배층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는 의문이다. 중요하게 고려해 볼 것은 당시의 부족국가 상황에서 외부세력의 유입은 또 하나의 신생부족이 생긴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까? 부족마다 다른 방언을 쓴다고 가정해 보면, 새로운 방언을 사용하는 부족이 등장한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신라의 예를 보면 5-6세기경부터 거의 흉노문화권이 확실한 부족이 연맹체를 장악하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이들이 신라의 실질적인 지배층으로 오르기까지는 거의 5세기가 걸린 셈이라, 내부 지배층의 문화는 여전히 흉노의 색이 강했을지도 모르지만, 언어라던가 생활습속은 이미 반도에 동화가 많이 되었을 터, 이들을 과연 이민족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최소 반도에 전제왕국이 성립되기 전의 상황에서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다양했던 다수의 부족들이 나중에 특정 유력부족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고 지배되어 가며, 전제국가라는 괴물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거.


사실 내가 가지는 가장 큰 의문은 신라와 이후 설명할 가야, 백제의 전제왕국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원주민의 주류였던 해안정주민들보다 북방유목민계 부족들과 해약유목민부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고구려는 유목계에 의해 의한 정복전쟁이라고 하면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어도, 신라, 백제와 가야는 연맹내의 많은 부족들 중에 어째서 유목민계 부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단순히 무력의 우위였다면 더 이른 시기에 유혈정복도 가능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또는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무력이 다른 부족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 가장 타당하고 단순한 설명일 것이다. 추정컨대, 유목생활 중 중국의 전제왕국을 접해 본 경험, 정주민처럼 인근 부족만 상대한 것이 아니라 이동중 수많은 부족들을 만나 상대하면서 얻어진 협상력 그리고 거친 환경과 끝없는 이동에서 나오는 무력과 기동력의 우위의 요소들이 곧 전제왕국 추진에 있어 정치력의 우위로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잡설 그만하고 백제는 위의 반도의 판세로 보면 상당히 다문화 지역인데, 반도 원주민, 남방농경집단, 남방해양집단, 황해해양집단, 탈중국망명집단들에 고구려에서 이탈한 북방계 세력이 연합해 단일 권력체를 만들고,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는 방법으로 국가 성립된 거 아닌가 상상해 본다. 백제 초기 국가명이 십제로 시적했다는 설도 있고 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했던 원인이 이 다양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야는 신라와 비슷하게 열도와 동지나해를 넘나들며 철기 무역을 하던 남방해양세력과 흉노계의 연합체로 보이며, 특히 김수로왕계 귀족들의 출신은 철기기술이나 항아리를 싣고 가는 기마인물토기 등의 유물로 봐서는 흉노계 신라귀족들과 비슷한 지역으로 보여지는데, 유력한 곳이 현재의 중국 사천성, 감숙성 지역임(참고로 이 지역은 흉노우현왕의 세력권이기도 하다). 허황옥이 중동계라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사천성 파족이라는 설도 있음. 김수로 일파가 신라 김씨계 부족의 초청으로 이민 왔다가 변한지역의 유력한 부족 중 하나가 되고 대족장으로 추대된 후 고향을 못 잊어, 자기 고향 여자를 초청이민 시켜 결혼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파족도 물에 능숙한 종족이라고도 하더라. 그래서 그 먼거리를 뱃길로 올 수 있었겠지. 가야의 언어면에서는 김수로왕계가 북방 유목계이긴 하지만 가야 전체로 보면, 가야어는 해양세력의 왜어계통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delingsvald 의견).


글의 주제를 넘어가지만 신라, 백제, 가야의 삼한지역 부족 통합과정에서 권력에서 밀려난 일단의 해양세력들로 하여금 열도로의 근거지 이동을 촉발 시켜, 이 세력들이 야마토정권의 성립에도 도움을 주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나의 추론은 반도인은 한민족이라는 정체가 모호한 집단의 오천년 농경 단일민족이라는 도그마를 무시하고, 매우 다양한 종족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세력집단들의 각축장이었을 것을 기반으로 한다. 나는 사실 혈연적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데, 고대사를 기술하는데 있어 민족라는 정치적 개념보다는 부족(클랜, Klan)이라는 경제적 개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부족은 인간이 생존하는데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제반 물자를 자체 생산해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단위인 것이고, 비록 혈연적 관계가 중심이었겠지만, 그것이 부족 형성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만 해도 근친상간은 터부시 되어 족외혼이 보편화 되었고, 부족의 힘과 번영은 부족민의 수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가능한 외부인에게 초기에는 배타적이지만 어느 정도 검증이 이루어지고 나면 꽤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문화가 형성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부족의 족외혼 풍습이 다른 부족의 여자를 신부로 데려오는 것이었다면, 새로 유입된 부족외 남자와 부족내 여자 역시 족외혼이며 부족내 유전적 다양성을 확대하는 좋은 방법이다).


민족이라는 명칭만큼 유동적이며 모호한 개념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순전히 근대 민족주의의 태동 과정에서 주로 정치적 필요에 의해 창조된 개념으로 인쇄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해 초래된 부족 (또는 근대적 의미로 지역공동체) 범위를 넘은 광역의 언어, 문화 통합이 주요 원인이었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어떤 민족의 조상'이라는 말 자체가 정확한 말일 수 없는 것이 인류는 자연변화에 따라 이동하며, 그들 스스로 민족이라는 자각이 없던 사람들에 대해 특정 시대와 지역을 임의로 정하고, 그 사람들이 어떤 민족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실로 그들은 현대의 기준에 의해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이 결정되고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관점 자체가 전적으로 불필요하거나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광범위한 인류집단으로서의 북방계는 영거드라이아스 소빙기가 끝난 후 기원전 70세기~기원전 50세기 까지는 거의 확실하게 내몽골지역을 중심으로 또는 그 위도대의 중앙아시아와 유럽지역에 분포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기후가 매우 온난하여 반도가 열대우림수준이었고, 해수면도 매우 높아 그 시기의 반도에는 인류가 살기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일 정도고,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이 시기 반도인의 흔적은 발견된 바가 없다. 따라서 해당 위도대는 현재처럼 사막이 아닌 온대 내지 아열대 기후로서 농업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홍산문명이 이 지역에서 출현한 것이다. 이후 온난화가 약화되면서 농업 인류의 활동 범위가 점점 남쪽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시기는 유목이라는 생활 형태는 전혀 없었거나 이보다 훨씬 북쪽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나 소수의 집단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당시 북방계는 농업과 수렵을 중심으로 생존을 영위하던 옥기문명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급격한 기후변화는 언어적으로는 그간 긴 빙하시대를 거치며 고아시아어족에서 파생되어 넓게 퍼져있던 많은 언어 집단들은 아열대, 온대지역으로 상대적으로 남북으로 좁은 영역에 강제 재집결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서 비로소 알타이 제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어미활용, 격조사 등의 (언어영역에서 상대적으로 고수준의) 문법적 규칙들이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하다가, 다시 각 언어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베리아지역에서 수렵이나 순록유목을 계속 하던 고아시아어족들은 원래 언어를 유지해 유카기르어, 축치어, 길약어 등으로 현재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고아시아어족을 고시베리아어족이라고도 하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이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고아시아어족이 형성된 기원전 4만-2만년경은 극심한 빙하시대로, 당시 유라시아 수렵인류의 주생활 지역인 툰드라 지역은 열도-반도-타클라마칸-카스피해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시베리아는 아예 빙하지역으로 인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50세기경 지구 온도가 하강하면서 한반도는 열대기후에서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인류가 다시 재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반도로 재유입된 인류 중 일부가 알타이의 문법적 요소를 차용한 고한국어족을 형성 했을 것이고, 다른 방면으로 확산된 집단은 투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 왜어, 일본어 등으로 분화 되었을 것이고, 기원전 35세기 근동의 아나톨리아 고원까지 진입한 집단에 의해  교착어에서 굴절어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히타이트어가 형성되어 인도유럽어족의 기원이 된다.


기원전 20세기 전후 부터는 지구의 기후가 다시 소빙기로 진입해 기온이 매우 하강하기 시작하였고, 내몽골지역은 사막화가 진행되고, 그 북쪽 고원은 초원화가 진행 되면서 인류의 유목민화와, 농경민들의 중국으로의 남진을 촉진 시켰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 중 특정 시기, 보통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는 특정 시기를 정해 민족의 조상이라고 하는 말하며 다른 민족과 배타적 구분하려는 것은 특정 정치권력의 전제적 권력의 정당성 주장을 위한 목적 이외에는 거의 넌센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부계직계 조상은 역사적으로 보면 홍산민족이었다가 서역의 유목민족이었다가 중국민족이 되고 지금은 한민족이 되었다라는 것인데, 이 문장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인종, 혈연이나 혈통적 개념으로 보면 얼마나 넌센스인지를 보게 된다. 게다가 배우자들 역시 다양한 민족이었을 텐데, 왜 내가 굳이 5천년 단일민족 헬민족이라는 개소리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나의 조상들은 저런 지역들을 자연적, 경제적, 정치적 원인으로 수세대를 거쳐 이동했다고 보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다시말해 민족이라는 개념은 현대 국가들의 권력층의 민족적 기원에 근거한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한다거나, 영토나 유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목적에는 유용할 수 있어도, 기본적으로 인류의 인종차별성, 배타성을 강화 시켜 결국 전제적 국가권력에 봉사하게 되는 역효과를 매우 경계해야 할 것이고, 민족이라는 개념 보다는 당시의 특정 지역에서 특정 문화를 이루고 삶을 영위했던 경제단위로서의 인류 집단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관점이 현대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데, 인류가 국가라는 유사파시즘에서벗어 날 수록 향토사를 연구하여, 지역민들과 전제적 중앙권력과의 관계를 재조명하여, 나와 지역, 지역과 중앙권력의 관계, 내 조상들의 이동 원인과 경로 등, '나'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재조명하고 이해하는 역사 관점이, 천부민족사상 내지 천부국가사상에 의해 국가에 종속된 노예적 국민이 아닌, 지역, 국가의 일원으로서 시민인 인간에게 매우 필요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파시즘적인 국사가 아니라, 인디비쥬얼리즘의 시민사로 명명되어야 할 것이다.

 

 

by R. Strauss


* 퍼 갈 때는 반드시 R. Strauss 를 명시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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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Delingsvald 회원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 했는데, 자세한 언어적 고증은 기억이 나지 않음.


1. 반도 원주민이 사용하는 고한국어는 존재하지 않고, 주류 원주민 언어는 일본어계통이었을 것. 근거로서 한국어의 물고기 이름들에 근거하여, 한국어는 해양이 없는 내륙지역에서 발생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


2. 고구려어가 현대 한국어의 기원인 고한국어(참고로 델링스는 한국어를 시노티베트족으로 보고 있고, 아마도 고구려도 북방 유목계가 아니라 북중국인계로 보고 있는 것 같음, 내 의견으로는 북중국의 매우 한족화 된 흉노계 정도면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고는 생각됨)로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반도의 언어가 고한국어로 교체가 일어나기 시작함.


3. 고구려의 영향력 또는 신라와 백제의 지배층은 고구려와 언어적으로 같은 계통이라 최소한 신라와 백제의 지배층은 고구려어가 가능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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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내역


0.13 (2016.11.23) - 고구려의 기층세력 수정 (유목계 -> 산지농경수렵계), 예맥가설 도입

0.12 (2016.11.22) - 한국어 (부여어+중국어+삼한어), 만주어 (부여어+퉁구스어) 형성 가설 추가


0.11 (2016.11.20) - 고구려, 부여의 출신 수정 (몽골의 별종 -> 북중국 권력 싸움에서 밀린 고조선, 한족, 흉노 패잔세력)


0.10 (2016.11.19) - 한자의 한사군 전래설 삭제


0.9.1 - 시민사의 필요성 추가


0.9 (2016.11.9) - 고아시아어족 관련 추가


0.8 (2016.11.3) - 한국어족의 형성과정 추가, 한사군이 반도에 미친 영향이 생각보다 컸을 수도.


0.7.1 - 야마토 관련 추가


0.7 (2016.10.25) - 반도 원주민은 해양족일 가능성이 높다 추가


0.6.1 - 왜족 추가


0.6 (2016.10.22) - 새롭게 알게 된 신라왕족 성씨들 관련 사항 업데이트


0.5 - 유목집단의 삼한지역 장악과정 가설 추가


0.4.3 - 반도에서 국가시스템의 성립이 늦은 이유를 미개한 농경기술에서 농업의 불필요성으로 변경


0.4.2 - 고구려, 신라의 반도 정복 과정 내용 보강


0.4.1 - 여진과 조선의 관계 추가


0.4 (2016.10.12) - 정주민 vs 유목민 논평 추가


0.3.8 - 반도에 전제국가의 성립이 늦은 이유 추가, 신라 김유신의 관직명과 신라 초기 왕들의 호칭에 대한 설 추가


0.3.7 - 부여에 대한 가설 수정


0.3.6 - 낙랑국, 온달장군 추가


0.3.5 - 화전민 추가, 서두 수정 및 가설의 객관성에 대한 나의 입장 추가


0.3.4 - 흉노제국 세력권 상황 추가


0.3.3 - 고한국어가 반도어 주류라는 건 남겨두고, 고한국어로 융화되었다는 내용은 삭제함


0.3.2 - 고구려, 신라, 가야의 반도부족 복속과정 추가


0.3.1 - 열국관련내용 추가, 고조선을 부족국가기과 왕국기로 분리


0.3 (2016.10.11) - 가야, 고조선 추가, 여진계 분류 제안

 

 

 






  • john
    16.10.21
    응 이 사이트에서 기타게시판으로 옮기는 것은 걍 맘에 안드는 글은 잘 보이는 곳에서 없애버리는 의미라네. 국정원 개새끼들이랑 놀아주는 것도 슬슬 질려가는데, 쓰레기새끼들은 못 죽이면 이 나라는 나라가 아니라고 본다.
  • 미개한반도사
     
    ~BCE 1300 화전농경&수렵채집 초저밀인구 평화?세계
     
    BCE 1300~ 수전농경확산(중국남부와 동북부의 작물과 기술 유입), 본격 정착생활, 인구증가, 전쟁, 위계적 지역연결망 형성
     
    BCE 500~ 중국동북부에서 인구유입 선주민들과 족외혼으로 융합, 반도인들 일본열도로 이주 유행
     
    BCE 200~ 사서에 반도정치체 기록(대륙난민 수용, 조선이 교역을 방해), 중원통일 한제국 이북병합 군현설치 동아 헤게모니 장악
    삼한시대
    대표 - 목지국 진왕(합의에 의해 추대되는 대족장 추정 충청지역)
    유력국 - 신분고국(경기지역), 신운신국(전라지역), 안야국(임나아라의 전신 추정 경남함안), 구야국(임나가라의 전신 추정 경남김해)
    삼한시대말엽 인구 대국은 2~6만 소국은 3천~2만. 삼한인구 약 구십만 추정(비슷한시기 고구려 인구 십여만, 중원삼국시대 촉국인구 약 백만)
     
    CE 200~700 중원 위제국 이북 공손연 공략, 이북군현 한(韓) 전쟁 한(韓) 패망, 변방소국 흥기(백제, 사로), 중원 서진(西晉) 혼란 이북군현 철수
    고구려 야마토 반도개입
    반도전국시대
    시라, 고구려, 야마토, 쿠다라(백제), 임나제국(諸國), 신미제국(諸國) 등
    DEUS EX MACHINA - 당제국
    중원통일 당제국 반도개입 쿠다라 야마토 고구려 제압 시라 병합추진, 시라 대당항쟁 승세, 토번 당제국 분쟁, 당고종 사망, 당제국 반도개입 포기
     
    시라시대
    이후
     
    땡중 궁예 혁명 실패
     
    시라가 추가획득한 영토인 이북의 호족 왕건의 왕씨고려강점시대
     
    친위대를 데리고 활약하던 이북의 호족 이성계의 이씨조선강점시대
     
    일청전쟁, 일노전쟁 묵묵히 일본군을 지원해온 반도인민들의 합방청원으로 이뤄진 일본제국시대
     
    태평양전쟁 종전 미군시대 - 이북은 소련군시대
     
    미국에서 온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저승망국시대 - 이북은 소련에서 온 독립운동가 김일성의 김씨조선시대
     
    군사엘리트 타카키,전두환 막부시대 - 이북은 김씨조선시대
     
    (현재) 반일소중화민족통일파쇼 미개한망시대 - 이북은 반미소중화민족통일파쇼 김씨조선시대
     
    (미래 예측) 조선족 자치구 주석 김정남 중화인민공화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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